소망 말씀(설교 말씀)

하나님의 사자들을..(창세기 33:1-11)

분당소망교회 2019. 1. 16. 13:15

 

 

 

하나님의 사자들을..

 

 

 

창세기 33:1~11 

 

 

한 언론인이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수지는 왜 섹시하지 않을까? 현아, 설현은 섹시한데 수지는 왜 아무리 노력해도 섹시하지 않을까?’

그 언론인은 이어서 질문이 잘못되었다. 수지는 섹시하지 않아도 아름답다. 수지의 아름다움은 섹시한데 있지 않고 다른데 있다. 수지는 섹시해보이려고 노력할수록 더 어색할 뿐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수지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현아도 모르고 설현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언론인이 한 그 말은 정말 의미가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그렇고 기독교 교회가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더 잘 보이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것을 꼭 해야겠다고 죽으라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본래의 모습 그대로가 제일 낫습니다. 교회도 교회 본래의 모습, 기독교신자들도 기독교신자 본래의 모습 그것이면 됩니다. 얼마든지 됩니다. 억지로 잘 보이려고 무엇을 특별히 잘하려고 할 것이 없습니다. 최소한 우리가 해야 할 일만 하고 마치면 그것이 제일 잘 하는 것입니다. 까닭이 있습니다. 교회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신자들에게는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아버지로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형의 문제로 허벅지 관절이 어긋날 정도로 하나님께 매달리고 씨름했던 야곱이 이제 고향을 향해서 다시 출발합니다. 얼마나 갔을까 예상대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앞에 보입니다. 형 에서의 일행이었습니다. 야곱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형을 향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형 앞에 땅에 엎드려서 일곱 번 절을 했습니다. 절을 하면서도 야곱의 마음은 두렵고 떨렸습니다. ‘형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정말로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400명이나 되는 군사를 데리고 온 형 에서가 야곱에게 반가운 얼굴을 한 것입니다. 환한 얼굴로 야곱을 향해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야곱을 얼싸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형과 동생이 서로 붙들고 울었습니다. 틀림없이 일어날 것 같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그렇게 걱정하고 두려워하던 전쟁, 형과 동생이 서로 치고 싸우고 죽이는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대신 평화가 왔습니다. 20년 만에 형제간에 평화가 생겼습니다. 야곱에게는 물론이겠지만 형 에서에게도 20년간 평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평화가 왔습니다. 형과 회포를 푼 야곱이 형에게 줄 준비한 선물을 주었습니다. 형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야곱은 가던 길을 계속 갔습니다. 20년간 야곱을 그렇게 짓눌렀던 형과의 일이 다 끝이 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일에 있어서 가질 수밖에 없는 의문이 있습니다. ‘야곱이 그렇게 걱정하고 두려웠고 답답했던 가슴, 그 일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쉽게 끝이 나게 되었는가?’ 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밤잠을 못 잤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에도 가슴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이 늘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기우였던가? 애초부터 형 에서에게는 야곱을 향한 원한이 하나도 없었는데 기우였던가? 괜한 걱정을 했던가? 아니면 애초에는 그런 마음이 있었지만 마음이 바뀌었는가..?

먼저 기우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기우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야곱이 형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야곱이 보낸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탐문을 했습니다. 형의 표정이 어떤지 분위기가 어떤지 다 알아보고 사람들로 부터 말도 들어보고 야곱에게 돌아와서 보고한 말이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32:6) 라는 말입니다. 400명이나 되는 장정을 사람 마중 나와 환영하는데 동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야곱이 쓸데없이 걱정했던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에서의 마음이 나중에 바뀐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에서의 마음을 바꾸게 했는가? 분하고 원통하고 화나고 죽이고 싶었던 에서의 마음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야곱의 정성입니다. 형의 마음을 풀기 위해서 야곱은 모든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냥 해야 하니까 하는 예물 준비가 아니었습니다. 마음을 다했습니다. 암염소를 준비했습니다. 숫염소도 준비했습니다. 암양도 숫양도 준비했습니다. 젖 나는 낙타도 준비했고 낙타새끼도 준비했습니다. 암소도 준비했고 황소도 준비했습니다. 암나귀도 준비했고 나귀새끼도 준비했습니다. 그것도 받으라고 한꺼번에 밀어 넣은 것이 아니라 세 떼를 나누어 첫째 떼에게 형을 만났을 때 형이 뭐냐고 물었을 때 에서님의 동생 야곱님이 보냈습니다.’ 라고 말하게 했습니다. 둘째도 셋째도 각 떼마다 사람을 붙였고 그 사람에게 형을 만나면 이렇게 인사하라고 말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형을 만난 야곱은 저 멀리서부터 형을 향해서 땅에 엎드려서 일곱 번이나 절을 했습니다.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의 종들과 종들의 자식들, 아내와 그 아내들의 자식들도 다 절했습니다. 야곱이 형을 위해서 준비한 정성은 대단했습니다. 그 정도의 정성이라면 그 정도의 마음태도라면 웬만한 사람도 감동시킬 만 했습니다. 그런 것도 필요합니다. 그런 것도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야곱을 향한 에서의 마음은 그 정도로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은 있어야할 요소, 필요조건의 작은 한 부분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일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되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이런 문제는 해결나지 않습니다. 남북 간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뭇사람들이 뭇 소리를 다하고 있습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 과연 뭇 사람들이 말한 그 방법, 그 경우의 수가 이 일에 맞는가?’ 라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동안 회사나 사회나 집안에서 원수 같은 일이 생겼을 때, 과연 그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정말로 해결되지 않은 일에 결정적인 요소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풀어주셔야지 해결됩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이 하도 힘들어서 사람을 보내어 나발이라는 부자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다윗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라의 대장군이었습니다. 왕의 사위였습니다. 국민들이 어렵다고 외침이 있을 때 그때마다 나서서 국민들을 보호해주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쫓기고 있지만 다윗이 그런 사람인데, 미안한 말이지만 한갓 돈 좀 있다고 목축업자에 불과한 나발이 큰 수모를 주었습니다. 수모를 당한 다윗이 그 나발의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려고 군대를 400명이나 데리고 출동했습니다. 그런데 급히 다윗을 찾아 나온 나발의 아내, 그 아내를 보고 다윗의 마음이 풀렸습니다. 아내들에게 이런 지혜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라고 지혜롭게 그 모든 문제를 풀었습니다. 그때 그 나발의 아내를 향해서 다윗이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오늘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급히 와서 나를 영접하지 아니하였더면 밝은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두지 아니하였으리라’(삼상25:32-34)

아비가일이 모두 죽이겠다고 날뛰는 다윗의 마음을 가라앉혔습니다. 나발에 대해서 마음을 푼 것, 피비린내 나는 보복을 막았습니다. 그런데 그 일에 대해서 다윗이 한 말을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비가일 당신이 나에게 달려온 것, 당신이 내가 피비린내 나는 보복하려는 것을 막은 것,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좀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야곱이 외삼촌 집에서 보복이 두려워 도망쳐 나왔을 때, 외삼촌이 추격하여 잡혔을 때였습니다. 그때 외삼촌이 한 말을 보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일주일 만에 야곱을 따라잡은 외삼촌이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31:29) 라는 말을 했습니다. 외삼촌이 야곱에게 한 말의 뜻은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너를 손보려고 했다. 사실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하든 너를 꼭 손보고 싶다. 그러나 어젯밤에 너의 하나님께서 나에게 나타나셨다. 그 하나님께서 너에게 한 마디 말도 못 붙이게 하셨다. 그것 때문에 내가 참을 수밖에 없다. 내가 지금 너에 대해서 참는 것은 너 때문이 아니라 너의 하나님 때문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남북 간의 문제, 누가 이렇게 한다, 누가 저렇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힘 있는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 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풀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해야 할 노력은 다 해야 합니다.

 

야곱의 형 에서는 20년 전의 원한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기회가 되기만 하면 반드시 내가 야곱을 손보고야 말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물론 에서도 동생인지라 이해하고 잊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속에 있는 원한은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드디어 그 때가 왔습니다. 야곱이 외삼촌 집을 떠나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에서가 생각했습니다. ‘야곱도 상당한 재산이 있다고 하니 야곱의 사람들도 제법 있을 것이다. 내가 대강 준비해서는 어렵겠다.’ 그래서 군사를 400명이나 모았습니다. 20년 전에 동생을 꼭 죽이고 싶었던 마음까지는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 그 원한을 이대로 넘어가게 되면 병이 날 것 같다,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그냥 넘어갈 수는 도저히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에서가 군사를 대동하고 야곱이 오는 길목을 향해서 출동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야곱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 에서가 400명 군사를 거느리고 출발하고 야곱을 만나는 그 사이에 기적과 같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성경은 전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에서의 마음은 180도로 바뀌었습니다. 죽이고 싶던 원수 야곱이 사랑하는 동생 야곱으로 바뀌었습니다. 마음이 바뀐 에서가 야곱을 보니 자기도 모르게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야곱을 향해 달려가서 부둥켜안았습니다. 동생의 입을 맞추었습니다. 함께 울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무엇이 이런 일을 만들었습니까?

 

어제 영국 어느 연구소에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서 한 마디 했습니다. ‘한반도 3년 내에 전쟁 발발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참 두려운 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것을 막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에서의 이 일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성경의 여러 가지 일들을 미루어 가능한 일 하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자를 에서에게 보내십니다. 사자만 보내신 것이 아니라 에서 군사 400명과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군대를 당신의 사자와 함께 보내십니다. 그리고 에서의 눈을 밝게 하십니다. 에서가 군사 400명을 거느리고 자신만만하게 오고 있는데 눈이 밝아져서 보니 깜짝 놀랍니다. 자기와 자기 군사 400명을 빙 둘러싸고 있는 불말과 불병거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사가 그랬습니다. 엘리사가 있기 때문에 적국 아람이 이스라엘을 도저히 침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람은 엘리사를 체포하기 위해서 군사를 파견했습니다. 엘리사가 자고 있는 숙소를 포위했습니다. 아침에 사환이 보고 기겁을 해서 엘리사에게 뛰어갔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기도했습니다. 그 일을 열왕기하 6장은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6:17)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서의 눈이 밝아져서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군대를 보고 기겁을 합니다. 우리는 족탈불급(足脫不及)이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기겁을 한 그 에서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좋은 말로 타이릅니다. “에서야, 하늘 아래 너의 형제는 너와 야곱 둘 뿐이다. 야곱은 잘했어도 잘못했어도 너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다. 야곱이 지금 너에게 용서를 구하려고 오고 있다. 너의 용서를 받고 싶어서 오고 있는 그 야곱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좋은 말로 했지만 그러나 어마어마한 군대를 대동한 하나님의 사자가 에서를 타이릅니다. 에서의 마음이 바뀝니다. 그 밉고 밉던 동생이 세상에 둘도 없는 동생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나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고 사회에서 이런 일이 있을 때, 집안에서 이런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은 얼마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에스겔 36장에서 내가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36:26) 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이 아직 에서가 자기를 향해서 군사 400명을 거느리고 출동한다는 소식을 듣기 전의 일을 321절에서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32:1)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와 하나님의 군대를 보게 됩니다. 야곱은 지금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형이 어떤 마음으로 다가오고 있는가? 전혀 알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먼저 야곱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내가 내 사자를 보낸다, 내 군대를 보낸다고 말씀하시는데 왜 보내셨겠습니까? 야곱을 보호하기 위해서 당신의 사자를 보내시고 당신의 군대를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당신의 군대를 보내십니다. 이 나라가 지킬만한 가치가 있으면,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 이 나라에 있으면, 여러분들이 진실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보시고 이; 나라에 당신의 사자를 보내시고 군대를 보내십니다. 전쟁 하나도 없이 숙원을 다 풀어주시는 역사를 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도 무슨 일이든지 어떤 역사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고 여러분은 그런 하나님의 자식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