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듣고
마태복음 7:17~27
새겨들을 말이 하나 있습니다. ‘불행은 자기 일은 하지 않으면서 남의 일에만 관심 둘 때 시작되는 법이다. 화는 욕심은 많은데 일은 하지 않으면서 기운이 남아돌 때 불행과 함께 생기는 현상이다.’
자기 일은 하지 않으면서 남의 일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생겨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비판의식입니다. 비판의식이 강한 사람들은 대체로 똑똑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똑똑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행복하지는 못합니다.
산상수훈의 마지막 장인 마태복음 7장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7:1) 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서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얼른 보면 우리가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할 이유가 마치 우리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비판받지 않기 위한 타산적이고 계산적인 가르침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말씀을 가만히 보면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하시고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십니다.
먼저 ‘여러분 눈에 보이는 남의 허물은 여러분에게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 허물이 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사람에게는 그 허물이 없고 나에게 있는 것인데 그것이 다른 사람의 허물로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라는 것을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라고 2절에서 말씀을 하십니다.
투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Projection’ 이라는 영어로 하는 것이 좀 더 쉬울 것 같습니다. 아주 쉬운 비유로 든다면 영화관의 스크린과 같습니다. 영화관의 스크린에는 슬픈 장면, 기쁜 장면, 감동적인 장면, 격동적인 장면 등 여러 가지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본래의 스크린은 흰 바탕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많은 장면이 나오는 영화는 스크린에 비추는 기계에서 나올 뿐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남을 비판하는 것이 그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허물이 상대방이라는 스크린에 비친 것일 뿐이다. 그 허물은 사실은 여러분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그 말씀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실은 자기에게 그 허물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그 허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부끄러우니까 마치 허물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없는 허물을 만들어내어서 비판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나에게 허물이 없는 것처럼 감추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을 ‘외식하는 자’(5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위선하는 사람 즉 속에 허물이 가득한데 마치 자기는 허물이 없는 사람처럼 외부를 장식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의 눈에 다른 사람에게 비판할만한 허물이 보이면 얼른 알라, 그 허물이 다른 사람의 허물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있는 허물이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허물을 가리기 위해서 괜히 애꿎은 사람을 이렇다 저렇다 비판하지 말고 속히 여러분에게 있는 그 허물을 고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3-4절)
5절에서는 ‘외식하는 자여’ 라고 강하게 책망하시면서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기독교의 명언이라고 세상에 알려져 있는 황금률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말씀 중에 하나가 이 황금률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황금률이라는 위대한 주님의 말씀도 얼른 보면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먼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라는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대접받기 위해서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완전히 계산적입니다.
오해할 수 있는 말씀이 또 있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요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라는 7절과 8절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까? 구하는 것을 다 받았습니까? 찾는 것 다 찾았습니까? 문 두드리는 것마다 다 열리던가요? 자칫 잘못하면 예수님께서 그저 한 번 해보시는 말씀으로 끝나버릴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을 제대로 알아야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시선입니다. 눈을, 여러분의 마음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 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들의 시선을 여러분에게 두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받을 것은 어떻게 하면 받는가? 내가 문을 두드릴 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주셔서 그 열린 문으로 이런 문제, 저런 문제 해결할 수 있는가? 먹지 않고 자지 않고 구하고 문을 두드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해결하여 주시는가? 여기에 눈을 두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가르침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그저 ‘나’, ‘우리’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하나님께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이 나의 하나님, 내 아버지라고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여기에 초점을 가지고 하나님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은 신자들이 요구하면 어떻게 반응하시는 하나님이신가? 그 하나님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은 여러분이 구할 때 찾을 때 문 두드릴 때 못 들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안타까운 심정으로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데 그것을 모르는 듯 외면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반드시 틀림없이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평소에도 마찬가지이지만 일이 있을 때마다 힘들 때마다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9-11절)
세상 살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 힘든 일, 어려운 일 보지 말고, 못된 사람이 있으면 그 악한 사람을 보지 말고, 세상에 거꾸로 돌아가는 일이 있을 때 그것을 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여러분이 가슴 아파할 때 더 가슴 아파하시고 여러분에게 안타까운 일이 있을 때 더 안타까워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시다. 어떻게 하면 여러분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줄까? 여러분들은 자고 쉴 때에도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면서 고민하고 연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을 알고 생각하고 쳐다보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입니다.
황금률,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12절) 핵심이 여기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의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시라면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가? 예를 들어서 누가 자기에게 안타까운 심정으로 구하는 사람이 있을 때, 나에게 와서 무엇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있을 때, 나에게 와서 무엇을 열어주기를 바라는 사람, 호소하는 사람이 있을 때 신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바라는 것, ‘하나님, 이렇게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이 문을 꼭 열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라고 바라는 그것을 여러분도 다른 사람에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황금률의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서 그것이 대접 받는 것이라면 ‘내가 하나님께 이런 대접을 받고 싶습니다. 사장님에게, 회장님에게,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내가 이런 대접을 받고 싶습니다.’ 라는 소망처럼, 여러분에게 그렇게 애원하는 부탁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땅하게 여러분도 그 사람에게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에게 주기를 싫어하는 사람, 남을 대접하기를 내켜하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이라면 자기도 대접받을, 자기도 무엇을 받을 그런 가치 자격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가 구하는 것을 주시겠는가? 그런 사람이 찾는 것을 찾게 해주시겠는가? 그런 사람이 안타깝게 문을 두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분 좋은 마음으로 문을 열어주시겠는가? 그렇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예수님 말씀이 그것입니다.
6절에서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개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왜 개라고 말씀하시며 돼지라고 말씀하십니까? 누구를 향하여 개라고 말씀하시고 누구를 향하여 돼지라고 말씀하십니까? 귀 있는 분들은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노릇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노릇하면서 나에게 이것 달라 저것 달라 하나님께 요구할 수 있고 사람에게 대접을 받고 싶다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 말씀입니다.
여러분, 자기 가치는 자기가 만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을 가치도 그리고 사람에게 사랑받을 가치도 사실은 자기가 만듭니다. 하나님께 사랑받을 만한 가치,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대접받을만한 가치, 구하는 것을 주시는 것도 여러분들이 찾을 때 찾아낼 수 있게 해주시는 것도 그리고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문을 열어주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인데 간절하게 부탁만 한다고 해서 주시고 열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럴만한 사람에게 주시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십니다. 그럴만한 사람에게 열어주시고 그럴만한 사람에게 찾게 해주시고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주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기독교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판단하시는가?’
먼저 기독교인들은 말만 가지고는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인들이 말 잘한다고들 하는데 사실 말을 잘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말을 잘 해도 말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은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또 신앙의 겉모습으로 하나님께서 판단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그런 가치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 기준은 그 사람의 삶이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 사람이 과거에 그리고 지금 살면서 삶의 열매를 어떻게 맺었는가? 이것에 따라서 판단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16-19절)
여러분들 가운데 나는 정말로 그럴만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나는 악한 사람이고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귀한 일들 불쌍한 사람 돌보고 가난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 이 사람 저 사람 긍휼한 마음으로 본다면 여러분은 절대로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나쁜 열매에서는 그런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좋은 열매에서는 그런 것이 나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20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산상수훈의 클라이맥스가 나옵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자기 가치를 인정받는 삶의 열매는 무엇이고 그러면 어떻게 하면 맺을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 하나하나 설명하십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선 말은 아닙니다. 말 잘하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말 잘하면 내가 마치 그런 사람인 것처럼 스스로 착각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신앙의 모습도 아닙니다. 그런 것으로는 기독교 신자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받는 하나님의 선물인 천국도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21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의 마지막 말씀에서 아주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라는 2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종교적 능력도 아니다, 종교적 성과도 아니다, 업적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열매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단한 선지자 노릇했다고 하는 것,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다는 대단한 일도, 대단한 능력으로 세상 사람들이 참 대단하다고 할 만한 큰일을 한 것도 꼭 주님과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보면 그런 것들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 쫓아내고 대단한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 것처럼 보이는 그런 일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불법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니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2-23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냥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23절) ‘분명하게 말하는데, 그 사람을 나는 알지 못하고 그 사람들은 불법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산상수훈의 마지막 결론이 나옵니다. 참된 기독교 신자의 결정적인 증거인 열매 맺는 삶이란 무엇인가? 무엇 같습니까? 그리고 예수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절) 라고 말씀하시고, 24절에서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라고 말씀하시고 26절에서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 잘 아십시오. 기독교는 지식의 종교가 아닙니다. 이것저것 많이 알지 못해도 됩니다. 옛날 어른들은 별로 몰랐습니다. 성경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고매한 인격을 함양하기 위한 수도의 종교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삶이 있는 종교입니다. 행동하는 종교입니다. 성경 말씀을 많이 알고 대단한 성경 지식을 갖춘 것 그것을 기독교 열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삶으로 행동으로 나타났을 때 그것을 기독교의 열매, 신자의 열매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고보서 2장에서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 믿느냐 잘하는도다’(약2:19)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정도는 귀신도 믿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아하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약2:20)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4-17)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시면서 아주 조심하실 것이 있습니다. 나는 이런 귀한 일, 저런 귀한 일 많이 했다, 그것만 가지고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기분 좋으라고 한 것일 뿐 예수님 말씀과 전혀 다릅니다. 주님 말씀은 내가 생각하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했는가, 아닌가?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기준은 단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말씀을 삶으로 살았는가? 실천했는가? 아닌가? 입니다.
산상수훈을 마치면서 여러분들에게 질문합니다. 하나 하나 각자가 짚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과거에 그리고 지금 산상수훈의 가장 중요한 심령이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까? 그 열매가 어디에 있습니까? 한 번 짚어보십시오. 내놓을 만한 열매가 있습니까? 기독교인들은 자기가 다 긍휼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긍휼한 열매를 만들었는가? 하나님 앞에 이것입니다 라고 내놓을만한 것이 있습니까?
소금의 역할을 빛의 역할을 다 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소금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여러분의 녹인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중에 보시고 그때 네가 녹인 것이라고 말씀하실만한 것이 있습니까? 그것을 하늘에 쌓아두었습니까? 빛을 발하기 위해서 나의 무엇을 태워야하는데 나의 무엇을 태웠습니까? 내 것을 태웠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고 삶의 열매라고 말씀하십니다.
달라는 사람에게 얼마나 흔쾌하게 주었습니까? 정말로 불쌍한 사람, 힘든 사람에게, 말로 아니라 눈으로 가슴으로 여러분에게 달라는 사람들이 있을 때 적게 드려서 미안하다 라고 하면서 나누어 준 것이 있습니까? 그 열매가 어디에 있습니까? 구제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보이게 자랑하고 이름 내려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게 이 사람 도와주고 저 사람 구제한 그 열매가 어디에 숨겨져 있습니까? 나중에 하나님께서 이것이 너 그때 은밀하게 구제했다고 하는 것이 있는 지 한 번 짚어보십시오.
여러분이 하늘의 보물을 어떤 것으로 쌓아두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모든 것이 말로는 쉽지만 막상 내가 실제로 하는 것은 정말로 어렵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좁은 문,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산상수훈 마지막에 여러분들에게 부디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걸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면서 당신이 가지고 계신 능력과 권세를 나누어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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