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마태복음 8:18-27)

분당소망교회 2019. 3. 5. 08:32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마태복음8:18~27

 

 

핸드백을 날치기 당한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행여나 싶어서 날치기 당한 핸드백 속에 들어있는 자기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보았습니다. 뜻밖에 범인이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가씨는 상냥한 목소리로 데이트 신청을 했습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입니다. 만나보면 서로 통하는 것이 있을 것 같습니다.” 온갖 수다를 다 떨었습니다. 범인이 선뜻 응해왔습니다. 아가씨가 경찰서에 신고했습니다. 신고를 받은 경찰서의 형사가 난감해합니다.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고서야 나올 리가 있을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고를 받은 이상 안 나갈 수도 없는 일이라 형사는 반신반의하면서 약속한 장소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약속한 시간이 되자 범인이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날치기한 핸드백을 손에 들고 나타났습니다. 붙들렸습니다. 형사 주변에 있는 사람 전부 다 그 범인이 정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범인의 정신을 감정하기 위해서 정신과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범인은 전혀 이상이 없는 멀쩡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요즘 사람들의 사고패턴이다. 즉흥적이고 단세포적인 사고..’ 범인 정신 감정을 한 의사가 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다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흥분 잘하는 민족입니다. 선동이 잘 됩니다. 미혹이 잘 됩니다. 잘 흔들립니다. 여기에 휩쓸렸다, 저기 휩쓸리는 그런 민족입니다. 예수님은 그때 약관 서른 여 살의 이름 없는 젊은 선생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그 많은 사람들이 따른 이유도 혹시 이스라엘 민족의 즉흥적이고 단세포적인 흥분됨이었을지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7:28-29) 라는 말씀으로 보아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차원이 달랐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이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했습니다.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 진지라’(2-3)..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기 병을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의 그 무서운 나병을 깨끗하게 해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서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5-7) 한 백부장이 자기 하인의 중풍병 즉 뇌졸중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꼭 좀 고쳐달라고 부탁하자 백부장의 부탁에 예수님께서 가서 고쳐드리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때 백부장이 한 말입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8-9).. “아니 선생님 그럴 것 없습니다. 오실 것 없습니다. 선생님이 말씀 한 마디만 하시면 얼마든지 나을 것입니다. 제 밑의 부하들이 제가 무슨 말을 하든지 다 시키는 대로 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모든 병들에 대해서 그런 분이십니다. 그 병들이 예수님께서 한 마디로 나으라면 낫고 없어지라 하면 없어지는 그런 예수님이 아니십니까? 오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한 마디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10),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13) 백부장의 이 말에 예수님께서 백부장을 크게 칭찬하면서 말씀 한 마디로 저 멀리 있는 백부장 하인의 중풍병을 치료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집에 들어가니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워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장모의 손을 만지셔서 그 열병을 낫게 해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14-15)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16)..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서 베드로의 장모 병을 낫게 해주셨더니 예수님께서 오셨다, 이런 대단한 분이 오셨다는 소문이 온 동네에 퍼졌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환자들을 많이 데리고 많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18)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왔는데, 그때에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 서기관 한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 되기로 결단하고 선생님 제가 선생님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서기관은 예수님께 대단한 감동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서기관이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성경원어인 헬라어는 디다스 칼로스인데, 이것은 나를 직접 가르쳐준 그래서 내가 존경할 수밖에 없는 선생님, 내가 정말로 존경하는 선생님이라고 부를 때 쓰는 말입니다. 서기관이라는 직업은 당시 시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신분이었습니다. 어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성경의 가르침 이것은 절대적인 그들의 삶의 기둥입니다. 시민들은 그것을 알아야 제대로 살 수 있고 제대로 행동할 수 있지만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바로 서기관입니다. 시민들은 어떤 일이 있을 때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하는 이 일이 맞는지 틀리는지 검증하기 위해서 서기관을 찾아가서 묻습니다. 또 성경의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서기관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서기관은 상당한 어른입니다. 이런 사람이 당시 아직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젊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더구나 그 자리에는 평소에 자기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주 둘만 있을 때 존경한다는 말을 하다가도 여러 사람들이 있으면 않습니다. 내가 못난 사람이 되고 내 위치가 떨어질 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앞뒤가 다릅니다. 앞에서는 존경한다고 온갖 소리를 다하지만 뒤에서는 있는 말 없는 말 다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인데 이 서기관은 달랐습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선생님이라고 불림 받는 사람이 아직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젊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호칭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질 것은 그 서기관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 했던 것,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 무엇 때문인가?’ 라는 것입니다. 아마 그 서기관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들었을 것입니다. 자기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너무도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너무도 대단했습니다. 정말로 차원이 달랐습니다.

또 하나, 그 서기관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동도 되었지만 앞으로 계속해서 사람들을 가르쳐야합니다. 저렇게 차원 높은 가르침을 하는 선생님의 제자가 된다면 지금까지 자기가 가르치는 것보다 좀 더 잘 가르칠 수 있겠다는 생각도 충분히 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병 고치는 능력입니다. 정말로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자기도 예수님처럼 저런 능력이 있으면 좋겠다, 권세가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인지상정이고 누구에게나 다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일곱 집사 중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사마리아에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있었는데 상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시몬이라는 마술사를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이 시몬이 빌립 집사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많은 병을 고치는 것을 보고, 또 빌립이 어떤 사람에게 안수하자 성령님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 자기도 그런 능력이 있으면 좋겠다고 부러워합니다.

사도들이 오자 마술사 시몬이 많은 돈을 가지고 와서 선생님들 이 돈을 받으시고 저에게도 그런 능력을 주십시오. 제가 사람들에게 안수를 하면 그 사람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저에게 그런 능력을 주십시오.’ 라고 부탁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신도들도 내가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면 기도가 응답받기를 소원합니다. 특별히 입시 공부하느라고 힘드는 자녀들이나 이웃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해서 하나님께서 응답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목회자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저도 오랫동안 성경을 연구했지만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성경의 깊은 뜻을 좀 깨달았으면 좋겠다는 염원이 있습니다. 때로는 아무리 여러 가지 책과 같이 연구해도 제대로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많이 답답합니다. 그런 목회자들이 예수님처럼 깊은 깨달음, 높은 지식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거기다 예수님처럼 고매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어느 목회자가 없겠습니까?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가르치면 여러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많은 사람의 삶이 바뀌고 가정이 바뀌는 이런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서기관이 이런 것 때문에 찾아왔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서기관의 이 말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것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는 20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라가고자 하는 기독교인들, 특히 전적인 예수님의 제자 즉 목회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길은 어떤 것인가? 기독교의 참 제자도는 어떤 것인지 중요한 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제자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좋은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편안하게 제 몸 하나 눕힐 곳조차 보장되지 않는다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예전에는 목사의 직업이 이발사 뒤에 있었습니다. 그때가 차라리 나았습니다. 요즘 신학교 경쟁률이 저렇게 높은 것, 한편으로 불행입니다. 혹시라도 거기에 더 잘 길이 있을까 싶어 찾아오는 사람도 없지 않고 적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하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20)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조금 더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날 제자 중에서 야고보와 요한 두 제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께,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되면 주님 오른쪽에 우리 둘 중 하나, 또 왼쪽에 하나를 앉혀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제자의 길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구나.” 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다.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라는 앞부분입니다. 예수님께 제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 예수님 왼쪽 오른쪽에서 제자의 길로 가는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주어지는 것이 있다, 반드시 받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고난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고난, 그 고난을 받는다, 참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그것을 받는다. 제자의 길을 제대로 가는 제자들은 반드시 고난을 당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8장은 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족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8:17)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고난은 현실적인 고난입니다. 몸으로 당하는 고난, 경제적으로 당하는 고난, 자기 때문에 가족들이 당하는 고난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참된 제자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이 고난이 따른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20:23) 라는 뒷부분을 통해서 영광의 자리 그것은 보장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의 길을 간다고 할지라도,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간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영광의 자리는 보장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제자의 길을 가는 사람들 중에서도 영광 받을 사람도 있지만 받지 못할 사람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제대로 알아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기 때문인지 그동안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21) 라고 말했습니다. 이 제자의 말은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얼른 가서 장사지내고 오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의 말은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그때부터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의 말씀을 가만히 듣고 보니 그러다간 망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 제자의 길이라면 안 가고 싶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란 모두에게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고난을 좋아할 사람 없습니다. 그리고 영광을 싫어할 사람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영광은 좋아하고 고난은 싫어합니다. 목사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일 뒤에 예수님께서 무덤 사이에 귀신들린 사람을 치료해주시는데 그 일을 통해서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 사이에서 벌거벗고 힘들게 살아가는 귀신들린 사람을 치료해주셔서 귀신이 쫓겨났습니다. 그것 때문에 많은 돼지들이 물에 빠져서 몰사했습니다. 그 소식을 마을 사람들이 듣게 됩니다.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려고 나옵니다. 보고 난 뒤에 하는 말이 의외였습니다. 우리 같으면 그런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선생님 우리와 좀 더 있어주십시오.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가르쳐주기도 하고 이런 일, 저런 일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할 것 같지만 그들은 달랐습니다. 선생님, 미안하지만 우리 마을에서 떠나주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주소서 하니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려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8:30-34)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참 놀라운 일이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정말로 대단하신 일이지만 당장 내가 손해 보는 일, 내 재산 손해보고 내가 힘들 것 같은 일은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신 이유가 여러 가지 있었지만 중요한 이유는 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잠시 쉬시기 위해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는데 베드로의 집에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몸져 누워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환자를 두고 쉴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 열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자 그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또 몰려와서 이번에도 쉴 수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 가신 길이 바로 이 길입니다. 제자들은 이 길을 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건너편으로 가기 전에 배에 오르셨습니다. 배가 큰 풍랑으로 심하게 흔들립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 풍랑에 익숙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풍랑에 익숙한 사람들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풍랑이었습니다. 그런 풍랑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그런 풍랑 속에서도 주무셨다는 것은 너무 피곤하신 것이 예수님의 하루하루 생활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의 영광과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그 자체가 고난입니다. 그 높은 자리에서 이 낮은 땅에 오신 그 자체가 고난입니다. 거기다 인간도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온갖 수치와 모욕을 받으시고 심지어 그렇게 사랑한다고 따라다니던 제자에게 배신까지 당하셨습니다. 끝내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여러분, 제자의 길은 이런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걸어가는 길이 바로 제자의 길입니다.

그러나 참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예수님에게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온갖 권세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설교를 해도 차원이 다른 설교를 하시는 능력을 주셨고, 무슨 병이든 고치는 능력을 주셨고 바다의 물결까지도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마침내는 그 예수님에게 만민의 주로 서는 자리 그 자리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 오른편의 영광을 허락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 제자의 길, 그 길은 고통이 있습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손해 봅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그 고난 그대로 당하지는 않겠지만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난을 마다하지 아니하고 나도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 그 고난의 길을 가겠다고 작정하고 그 길을 묵묵히 걷는 제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셨던 권세와 능력 그리고 영광을 주십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2:5-11)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이 이것입니다. 이 고난, 이 낮아지심, 그 고통 다 당하셨습니다. 그 예수님께 하나님께서 그런 능력과 권세 그리고 영광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알고 예수님처럼 그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셨던 권세와 능력 그리고 영광도 함께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