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짓는 사람들
느헤미야 3:1~10(신년예배) ═══════════════
뉴욕 타임즈의 한 유명 칼럼니스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단지 돈벌이를 위해 선택한 직업은 설사 그 대가로 얻는 돈을 자선활동에 쓴다 해도 인격을 좀먹는 일이다.’ 그는 그 말의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돈벌이만을 위한 직업 선택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는 이스라엘의 느헤미야는 최고 인격자, 최고의 신앙인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바벨론을 무너뜨린 페르시아 왕의 최고위 비서가 되었습니다. 느헤미야의 그 직책은 최고의 명예,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관심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자기 조국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밤낮으로 조국 이스라엘 소식에 온 신경을 기울였습니다. 바벨론 침공 시 맨 처음에 붙들려 온 느헤미야는 어느덧 페르시아의 최고위 관리가 되었지만 자기 귀 그리고 마음을 오로지 조국에 쏟고 있다가 어느 날 조국 이스라엘로부터 온 사람에게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은 불타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여러 날 동안 울고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것만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 할 일을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단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기회, 주실 것을 기다립니다.
드디어 기회가 왔습니다. 왕이 느헤미야의 얼굴이 수척한 것을 보고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때를 기다렸습니다. 조국의 비참한 상황을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마음속으로 준비해오던 모든 것들을 말씀드립니다.
“왕이여, 저로 하여금 제 조국 이스라엘로 돌아가서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도록 해주십시오. 저를 얼마동안 고국 이스라엘로 보내주십시오. 갈 때 통행증도 발급해 주시고 성을 재건하는데 필요한 목재들도 허락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왕의 사랑을 받던 느헤미야는 왕으로부터 모든 것을 허락받습니다. 페르시아 왕은 느헤미야를 이스라엘 총독으로 임명합니다. 느헤미야가 조국으로 갑니다. 총독으로 부임합니다. 부임 즉시 성벽을 재건합니다. 여기서 하나 빠뜨릴 수 없는 것은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왔지만 총독의 월급을 한 푼도 받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페르시아에서 모은 돈을 가지고 와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보태게 됩니다.
느헤미야 3장은 성벽 재건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각각 어떤 일을 했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국 사람인 우리로서는 이 기록은 거의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당사자나 유대인 후손들에게는 의미가 있겠지만 오늘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나라 한국 사람들 그리고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서 모든 세대의 기독교인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을 말씀하시고 가르치십니다.
먼저 기록하신 순서입니다. 이런 일을 기록할 때 대개는 이것은 이렇게 했고 저것은 저렇게 했다는 등의 공사 과정들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난 후 이 일은 누가 했고 저 일은 누가 했는지 기록하지만 오늘 3장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은 그 기록순서를 거꾸로 하셨습니다. 일한 사람들의 이름을 3장에 먼저 기록하고 이어지는 4장, 5장, 6장에서 어떤 공사과정이 있었는지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나, 하나님은 일의 결과, 과정 그런 것보다 제일 먼저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일을 잘 하는 것을 말하지만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십니다. 여러분 한 분 한분을 그렇게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은 나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과 교회간의 가장 큰 차이는 이것입니다. 세상은 일을 중요하고 일의 성과 결과 업적을 중요시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저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여러분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아신다면 여러분은 정말 행복할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안타까운 일은 이것 하나입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교사 중 한 사람인 허드슨 테일러에게 물었습니다. “선교사님, 그 기적 같은 선교를 이루어낸 방법이 무엇입니까?” 허드슨 테일러가 “저의 방법은 하나님의 방법 곧 사람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에 또 가르치시는 것이 있습니다. 느헤미야 3장은 아주 지루할 정도로 계속해서 사람들의 이름이 이어집니다. 사람 이름을 하나하나 빠뜨리지 않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나는 나를 위하여 내가 사랑하는 내 나라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여러분의 조국을 위해서 수고한 사람 하나 하나를 다 기억한다’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다 그냥 넘어가도 나는 각 사람이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 상세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록은 영원토록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느헤미야 3장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10:42). 당신이 사람 한 사람 상을 다 챙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3장이 어떻게 기록했는지 보겠습니다.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그 다음은 여리고 사람들이 건축하였고 또 그 다음은 이므리의 아들 삭굴이 건축하였으며 어문은 하시나아의 자손들이 건축하여 그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그 다음은 학고스의 손자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므세사벨의 손자 베레가의 아들 므술림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바아나의 아들 사독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들의 주인들의 공사를 분담하지 아니하였으며..’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 여기에서 한 일들은 예루살렘 성벽의 북쪽 부분입니다. 그들이 어떤 일들을 했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북쪽은 적의 공격에 제일 많이 노출된 곳입니다. 적이 쳐들어오면 제일 먼저 이쪽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가장 위험한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나를 위하여, 여러분들의 조국 이스라엘을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생명을 돌보지 않고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수고한 사람들을 특별히 더 기억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위험한 곳, 사람들이 잘 나서지 않은 곳에 일한 사람들은 이러이러한 사람들이었다고 말씀하시면서 나는 이들을 특별히 기억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 6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은 서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서쪽은 파괴정도가 가장 심한 곳입니다. 물론 그 공사를 할 때 재료비를 주지 않습니다. 공사를 맡은 사람이 자기 비용으로 공사를 해야 했고 자기 사람들로 공사를 해야 했습니다. 가장 수고가 많았고 가장 비용이 많이 들었습니다. 바베론 포로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집들도 짓지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것을 감당한 사람인지 누구인지 하나님께서 하나하나씩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부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 가장 위험한 곳에서 일했고 누가 더 많은 수고를 했는지 다 기억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4절부터 마지막 32절까지는 평범한 지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위험하고 비용부담이 많은 곳에서 일한 사람들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일을 한 사람들 다 기억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읽다보면 하나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32절 말씀까지 누가 어떤 것을 건축했고 수리했다고 말씀하시는 가운데 5절을 지나다 보면 눈에 띄는 것이 있습니다.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들의 주인들의 공사를 분담하지 아니하였으며’ 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주인이 누구인가요? 이것을 정확하게 번역한 성경이 있습니다. 미국의 킹 제임스 버전은 ‘Their Lord’ 즉 ‘그들의 하나님, 그들의 주님’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드고아의 귀족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이것도 기억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마태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주가 하시는 말씀을 보는 듯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으니라’(마25:42-43)
‘느헤미야 시대 때 이런 사람이 있었다, 조국은 그렇게 참화를 겪고 많은 사람이 죽고 어떤 강도들이 또 노략질하러 올지 모를 그 때에 모든 사람들이 조국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내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수고하고 힘썼는데 귀족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으면서, 부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을 나는 기억한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정 반대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많이 어려웠습니다. 재료도 없이 일하느라 어려웠는데 자기 맡은 일을 다 하고 난 뒤에 자기 손이, 자기 힘이 필요한 곳에 가서 이중으로 또 일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워낙 귀한 사람들이라 한 번 짚어보겠습니다.
먼저 ‘삽배의 아들 바룩’(20절) 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1절에서 ‘그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바룩은 제사장이었습니다. 자기 일을 하고 난 뒤 또 어디에 할 일이 있나 찾아간 사람이 바룩이었습니다. 그리고 ‘학고스의 손자 우리야의 아들 므레못’(21절)은 ‘학고스의 손자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이 중수하였고’(4절) 라는 말씀에서 또 볼 수 있습니다.
‘베냐민과 핫숩이 자기 집 맞은편 부분을 중수하였고’(23절)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는 ‘하림의 아들 말기아와 바합모압의 아들 핫숩이 한 부분과 화덕 망대를 중수하였고’(11절) 말씀으로 보아 이미 했는데 또 와서 한 것입니다. ‘드고아 사람들이 한 부분을 중수하여’(27절)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5절) 라는 말씀에서 그들이 또 다른 곳에서 일을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셀레먀의 아들 하나냐’(30절)과 ‘그 다음은 하나냐 등이 중수하되’(8절)에서도 알 수 있고,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이 자기의 방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30절)라고 므술람이 나오는데 그는 ‘그 다음은 므세사벨의 손자 베레가의 아들 므술람이 중수하였고’(4절)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곳에서 수고한 것만으로도 힘든데, 그것도 안 한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또 다른 곳에서도 수고한 사람들입니다. 아마 이분들 모두 틀림없이 심판대 앞에서 심판주 우리 예수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 라는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아마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눅19:17) 라는 이 말씀도 들었을 것입니다.
2018년입니다. 2017년까지의 일은 여러분이 어떤 용을 쓰고 힘을 써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2018년은 오늘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여러분이 얼마든지 최고로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장식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장식하겠습니까? 어떤 기록을 남기고 싶습니까? 이 2018년이 지나가면 더 이상 변경시킬 수 없는 굳어버린 결과가 될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세상 나라 자기 조국을 위해서 수고하고 힘써서 크게 칭찬받고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들처럼 2018년이 여러분들에게 큰 복이 되는 한 해가 되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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