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형통이란..(창세기 33:19-21)

분당소망교회 2019. 3. 19. 11:37

 

형통이란..

 

 

 

창세기 39:19~21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중에 잘못 알고 있는 것들, 사실과 다르게 알고 있는 것들이 제법 많습니다. 재미있는 예를 하나 들면 호랑이가 어흥하는 것입니다. 옛날 어른들은 어린 아이들을 놀릴 때에 호랑이 흉내를 내면서 잡아먹자. 어흥이라고 말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호랑이가 어흥하는 소리를 지르는 것은 호랑이가 상대방에게 겁을 주려는 것으로 모두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물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에 의하면 호랑이가 상대방을 향하여 어흥하는 것은 미지의 세계 또는 미지의 상대방에 대한 공포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호랑이가 어흥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겁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호랑이가 상대방에게 겁이 났기 때문에 지르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자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신자들도 기독교에 대해서 잘못 아는 것이 제법 많습니다. 가장 잘못 알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빌립보서 413절 말씀의 이해입니다. 이 말씀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마치 내가 하지 못할 일이 없다, 내가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말로 잘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의 참된 뜻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나는 견딜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인생 살다보면 옛날에는 괜찮았는데 이제는 초라한 사람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경제적으로 넉넉했는데 이제는 경제적으로 힘든 사람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나 참되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옛날에 존귀해본 적도 있으니 이제는 초라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넉넉한 마음을 가집니다. 옛날에 존귀했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옛날에 나도 넉넉하게 살아 본 적 있으니 가난하게 사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넉넉하게 사는 것, 가난하게 사는 것의 차이를 별로 두지 않습니다. 배고픈 상황이 와도, 궁핍한 상황이 와도, 어려운 상황이 와도, 무언가 잘못 되어도 그리스도 안에서 넉넉하게 견딜 수 있다는 말씀이 바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입니다.

이 이해에 있어서도 또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할 때 내가 견디는 인내심이 많고 참을성이 많아졌기 때문에, 기독교의 도를 닦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상황이 어떠할지라도 나에게는 모든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이것 때문입니다. 도를 통했기 때문에, 이제 제법 도를 닦고 인격이 고양되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그런 말씀은 아닙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이나 기독교인들이나 잘못 아는 것이 많습니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노예로 팔렸습니다. 이집트까지 끌려갔습니다. 경호실장격인 이집트 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노예가 된 것입니다. 다행히 요셉이 종으로 살면서 주인의 신임을 얻어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총무가 되었습니다.

종이 되었지만 가정총무로 그럭저럭 살고 있는 요셉에게 또 어려운 일이 닥칩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됩니다. 바르게 살려고, 정직하게 살려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를 썼는데 그것이 도리어 죄가 되어서 감옥에 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말에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바깥에서도 새고 안에서 단단한 바가지는 바깥에서 단단하다.’ 라는 말이 있는데 요셉에게 딱 맞는 말입니다. 주인 보디발에게 신임을 받았던 요셉은 감옥에 들어가서도 신임을 받습니다. 감옥의 간수장에게 신임을 받아서 감옥의 총무로 있을 수 있어서 감옥 속의 죄수로 살면서도 다소 편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 39장에는 기독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형통이라는 단어입니다. 세 번이나 있습니다. 2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말씀하시고, 3절에도 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라고 말씀하시고, 23절에서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전체에서 형통이라는 말이 한 곳에서 가장 많이 쓰여 있습니다. 그것도 단 한 사람 요셉에 대해서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39장은 기독교의 형통,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형통이란 어떤 의미인지 가장 잘 가르쳐 주고 배울 수 있는 곳입니다.

 

형통이란 무엇인가? 우리말 사전에는 모든 일이 뜻대로 잘 되어가는 것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기독교인들도 대부분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형통하십시오.’ 라고 하면 모든 일이 뜻대로 잘 되십시오라는 축복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형통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는 창세기 39장에서도 과연 그런 의미인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2절과 3절의 상황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1절부터 보십시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라고 말씀하시고 2절에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미래시제가 아닙니다. 현재시제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저 멀리 이집트까지 노예로 끌려갔는데 그런 사람을 두고 하나님은 형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앞으로 형통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형통한 사람이 바로 요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절에도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라고 하나님께서 지금 요셉을 형통하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3절에서도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종으로나마 그럭저럭 살만했는데 또 억울한 누명을 썼습니다. 어떤 누명입니까? 주인집 마나님이 요셉에게 친하게 지내자고 추근거립니다. 요셉이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이럴 수는 없다고 뿌리쳤습니다. 그러다 거꾸로 누명을 썼습니다. 정직하게 살려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되었는데 그런 사람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형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형통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전에서 말하는 형통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즉 기독교의 형통은 일이 내 뜻대로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형편이 좋아지는 것,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 이런 것이 기독교의 형통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예는 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복에 대해서 가장 잘 말씀하신 마태복음 5장의 말씀에 나오는 여덟 가지 복은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덟 가지 복 모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원하는 것, 기독교이라도 나는 꼭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할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먼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 자체는 그냥 관념적으로 들으면 괜찮습니다. 말뜻이 괜찮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물으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 내용을 안다면 그렇지 못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뜻은 내게 재산이 있든지 없든지, 내 지위가 어떠하든 간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다는 선언입니다. 이런 것을 원하는 사람 있습니까?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사람들이 바라는 것입니까? 초라하게 보이고 못나게 보이고 바보같이 보이고 싶은 사람은 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예수님께서 아주 자신 있게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에는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슬퍼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이런 것을 원합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는데 긍휼히 여기는 사람 되어보셨습니까? 힘듭니다. 이론상으로는 좋지만 주머니가 남지 않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딸을 위해서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 힘든 사람, 없는 사람, 아프리카 사람, 북한 사람, 난민들,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느라고 내 자식을 위해서, 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조금 주머니가 뭐가 있기만 하면 긍휼이 여기는 마음, 이 사람 저 사람 도와주고 싶은 마음 때문에 주머니가 남지 않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말로는 참 좋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바르게 살려고 하고 제대로 살려고 하는 이런 노력, 그러나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 하면 인생이 힘들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같이 복이 있는 사람 같지 않습니다.

여덟 가지 복, 팔복이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이 하나 더 있습니다. 제 구복, 아홉 번째 복이 있는데 이 아홉 번째 복은 마음적인 것이나 인격적인 것이 아닙니다. 가장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2035절은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물질을 주는 것, 돈을 주는 것, 힘으로 도와주는 것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현실적인 일, 실제적인 세상적인 일에 있어서 받는 사람이 더 복이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형통이란 어떤 의미인가? 먼저 창세기 39장은 명시적으로 기독교의 형통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형통은 이런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2절에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상황과 형편과는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 이것이 형통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 형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절에서도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는 것, 이것이 바로 요셉에게 형통이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기 때문에 요셉은 형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3절에서도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것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습니다. 바르게 살려고 정직하게 살려고 죄를 뿌리치다 그렇게 되었는데 그런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은 형통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듣기 좋습니다.

 

또 하나는 형통의 세상적인 정의와, 가장 형통한 사람, 하나님께서 이 사람은 형통하다고 세 번이나 말씀하시는 요셉의 실제 상황과의 비교를 통해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다시 생각해봅니다. 세상적인 형통의 사전적인 정의는 일이 내가 말하는 대로, 내 뜻대로 잘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통은 어떻습니까? 정반대입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요셉은 일이 자기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잘 되지 않았습니다. 잘 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 더 생각해봅니다. 사랑하는 한 가족, 한 아버지 밑에 있는 한 자식들이었습니다. 그 형들에 의해서 노예로 팔렸습니다. 저 멀리 이집트까지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바르게 살려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나를 사랑하시는데 그런 내가 어떻게 그런 죄를 지을 수 있습니까? 나는 못합니다.’ 하다가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억울한 누명을 썼습니다. 요셉의 뜻대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반대였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뜻대로 되었습니까? 오늘 여기까지 본다면 여기까지 상황이나 형편이나 일들이 요셉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두 번째를 정의하면 기독교의 형통은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라고 확실하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 가운데도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 라는 말이 있습니다. 땅이 무엇입니까? 지구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전부 다 여러분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 내 가정, 내 자식, 내 조국의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시옵소서.’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겟세마네 기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할 수만 있으면 이 쓰라린 잔을 저에게서 넘어가게 하십시오. 십자가만큼은 저에게서 넘어가게 하십시오.’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에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그러나 아버지여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원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최고의 기도입니다. 그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형통은 하나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필경 생각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끝이 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생각해야할 것은 그렇다면 기도교의 형통이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나는 깨어지고 부서지고 망해도 괜찮다는 말인가? 나 혼자라면 그럴 수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가정, 내 사랑하는 자식들, 내 가족들이 깨어지고 망하고 부서져도 괜찮다는 말인가? 내 조국에 전쟁이 일어나고 망하고 모든 것들이 다 무너지고 어려운 나라들처럼 그렇게 되어도 기독교의 형통,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진다면 괜찮다는 것인가? 그것이 기독교의 형통인가? 라고 반드시 질문을 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절대로 그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의 형통이 그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형통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일어선다, 회복된다, 반드시 멋지게 되고 강하게 된다, 때로는 최고로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이 힘쓰고 애써서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우연히 그렇게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대해서 내가 여러분들을 그렇게 만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형통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하나님 뜻을 이루는 사람,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는 사람은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야 만다고 말씀하십니다. 요셉의 경우에서 우리가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과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되었습니다. 반드시 회복한다, 멋지게 될 것이다, 강하게 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한다고 말씀하신 그대로 되었습니다.

 

요셉이 고생을 좀 오래 했습니다. 열일곱 살에 노예로 팔려가서 서른 살까지 고생했습니다. 제법 깁니다. 못견디겠다구오? 여러분도 다 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시험 때마다 시험 공부하느라 힘들지 않았습니까? 비슷합니다. 요셉은 더 힘들었겠지만 크나 작으나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비슷합니다. 전방에 가서 고생하는 군인이나 후방에서 고생하는 군인이나 당사자들에게는 비슷합니다. 여러분도 그 정도 고생했습니다.

요셉은 13년을 고생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요셉은 세계 최강국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모든 부귀영화 존귀를 받았습니다. 13년간 고생을 했지만 80년 동안 그 자리를 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형통입니다.

 

로마서 8장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말씀하십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