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거짓말
마태복음 26:69~75
1944년 겨울, 폴란드 유대인 격리구역 게토입니다. 독일군이 점령해서 통치하고 있는 게토, 거기 있는 유대인들은 독일군의 통제를 견디다 못해 속속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유대인들의 연쇄 자살이 멈추기 시작했습니다. 게토의 유대인 중에 제이콥이라는 사람이 퍼 나르는 영국 BBC라디오 방송 뉴스를 듣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400km밖까지 연합군이 들어왔답니다. 히틀러가 곧 항복할 거랍니다.’ 유대인들은 자기가 전해들은 뉴스를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제이콥의 라디오 중계로 게토는 점점 희망이 넘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뉴스와 함께 사람들에게 퍼져나가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이콥이라는 사람이 라디오를 가졌다는 소식입니다. 당시 게토에서 라디오 소유는 사형에 처해지는 중범죄였습니다.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제이콥은 연합군이 나치를 물리치고 진격하고 있다는 희망적인 뉴스를 계속해서 ‘중계’합니다. 그러다가 아뿔사 제이콥이 라디오 가졌다는 사실이 독일군에게 알려집니다. 제이콥은 뉴스를 퍼뜨려 저항군을 만들려고 했다는 반역죄로 체포됩니다. 독일군이 제이콥을 회유하기 시작합니다. ‘만약 당신이 ’사실은 내가 라디오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하기만 하면 처형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수용소에 있는 유대인들 앞에 서게 된 제이콥은 심하게 갈등합니다. 사실은 제이콥이 라디오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자기가 뉴스를 만들어 가짜 뉴스를 전달한 이것을 사실 그대로 말해서 사람들의 희망을 빼앗을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거짓말을 지켜서 사람들이 가진 희망을 빼앗지 않을 것인가? 고민하던 제이콥은 후자를 결정합니다. 계속해서 거짓말을 지켜나가기로 했습니다. 제이콥은 총살을 당해서 죽습니다. 이 비극적인 제이콥의 죽음과 반대로 제이콥의 거짓말에 희망을 안고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가던 도중에 연합군을 만나게 됩니다. 연합군을 만난 유대인들은 서로 손에 손을 잡고 감격에 넘쳐서 춤추고 노래를 부릅니다. 영화 이야기입니다. <제이콥의 거짓말, Jakob the Liar> 이라는 영화입니다.
끝까지 거짓말을 지킨 제이콥이 총살을 당하기 전에 나치 대장 앞에서 지었던 미소가 기억에 남습니다. 조금도 비굴하지 않는 모습, 오히려 자기가 나치를 이겼다, 당신 같은 나치 대장을 이겼다는 당당함이 서려있는 웃음이었습니다.
영화 속에 제이콥이 웃었던 것과는 달리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심하게 통곡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전날 많은 제자들 중 특별한 제자 몇 명만 따로 불렀습니다. 그 제자들과 함께 성만찬을 하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오늘밤에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릴 것이다.” 라고 심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잘 나서는 베드로가 발끈하면서 대들었습니다. “선생님, 다른 친구들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나만큼은 절대로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그 말에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베드로를 꼭 집어서 “베드로야,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베드로는 물론이고 다른 제자들까지 다 나서서 맹세하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선생님과 함께 죽는 일이 있어도 절대로 선생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십니다. 거기서 가룟 유다와 함께 온 병정들에게 체포됩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제자들 중에 베드로가 한 번 나서기는 했지만 그 후의 일을 성경은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마26:56)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병정들에게 체포되신 예수님께서는 심문받기 위해서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셨습니다. 거기는 이미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종교재판하기 위해서 재판관들이 모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집에서 심문을 받고 계실 때 뜻밖에도 도망쳤던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에 나타났습니다. 멀리 도망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도망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떻게 되셨는지 많이 궁금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오늘 본문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자기는 예수라는 사람을 전혀 모른다고 세 번이나 거짓말을 했습니다. 닭이 울었습니다. 닭 울음소리에 베드로는 예수님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대제사장 집밖으로 나와서 심하게 통곡했습니다. 그 일 이후 베드로는 닭 울 때마다 자다가도 닭이 울기만 하면 벌떡 깼다고 합니다.
충성한다는 것은 참 좋습니다. 그런데 충성이라는 것은 말은 쉬울 수 있지만 실제로 하기란 정말로 어렵습니다. 그런 것이 충성뿐이겠습니까? 다른 많은 일들이 그렇습니다. 말로 하는 것은 쉽지만 실제로 하는 것이 어려운 것들이 많습니다.
우선 ‘열심’만 해도 그렇습니다. 무엇을 하려고 시작하는 사람 중에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학생들도 새 학기가 되면 열심히 공부하려고 하고 사업하는 사람들은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래 열심인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교회 봉사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시작은 좋지만 오래도록 제대로 봉사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사랑을 말해보겠습니다. 처음 사랑할 때 대단한 결심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나는 죽기까지 죽도록 사랑하겠다고 합니다. 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마치 생명까지 다 내어놓을 듯하던 사람, 당신이 없으면 나는 죽을 것이라는 표현을 하고 그런 모습을 보이던 사람들이 조금만 잘못 되어도 너무도 쉽게 등을 돌립니다. 심지어 원수가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사랑하겠다고 했으면 좀 아니다 싶어도 끝까지 사랑하십시오. 한 번 충성하겠다고 했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실 때까지 변치 않고 충성하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십시오.
믿음도 그렇습니다. 가장 속기 쉬운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기도 쉽고 자기 자신도 속이기 쉽습니다. 믿음이 없는데 믿음이 있는 것처럼 자기도 속습니다. 이것은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 노래 가사 중 이런 말이 있습니다,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보면 시들하고....’ 사실이 그렇습니다. 헤어지면 그리운데 만나면 또 시들합니다. 이 노래를 지은 사람은 아마 무언가 좀 아는 듯합니다. 노랫말은 ‘몹쓸 것 이 내 심사..’ 라고 이어집니다. 또 이어지는 다음 말이 재미있습니다. ‘믿는다, 믿어라, 변치말자 누가 먼저 말했던가’ 우리 서로 믿자, 끝까지 가자고 자기가 말했습니다. ‘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죄 많은 내 청춘..’ 가만히 보니 자기가 그런 것입니다. 자기가 믿는다, 사랑한다고 해놓고 자기가 변했습니다. 2절도 비슷합니다. ‘좋다할 때 뿌리치고 싫다할 때 달려드는 모를 것 이내심사..’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더합니다. 어렵고 다급할 때는 대단한 믿음을 보입니다. ‘하나님, 믿습니다. 정말로 믿습니다.’ 하나님께 바짝 달려듭니다. 밤낮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다가 일이 풀리면 내가 언제 하나님을 찾았던가? 언제 하나님께 매어 달렸던가? 내가 언제 기도했던가? 그런 모습을 보입니다.
인간들의 그런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으면 마귀들이 비웃겠습니까? 야고보서 2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드니라’(약2:18-19)
삶은 없이, 행동은 없이 말만 잘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마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 좋아하네. 나도 그 정도의 믿음은 있다. 그걸 믿음이라고 하느냐? 그런 사람을 신자라고 하느냐?’ 라고 귀신이 말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크게 비난을 받아야합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까? 아주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제자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그 많은 제자들 중에 열 두 제자를 뽑았습니다. 그 열 둘 중에서도 따로 뽑힌 소위 최측근 3인방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세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거기에 뽑혔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베드로가 나섰습니다. 일만 있으면 나서서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회를 주시지 않으시면 그렇게 나설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최측근 3인방 요한, 야고보, 베드로를 항상 데리고 다니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수백 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열둘만 뽑았습니다. 이 열 둘은 늘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열두 사도들은 자기네들은 정말로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더 특별한 일에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 데리고 가셨으니 남아있는 제자들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반면에 따라가는 세 사람은 얼마나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런 베드로였습니다.
죽은 회당장 딸을 살릴 때 그 세 사람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변화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옛날에 돌아가신 그 대단한 이스라엘의 선지자 두 분이 나타나셔서 예수님과 함께 말할 때, 그때 이 세 사람이 따라갔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때 가룟 유다는 빠지고 열한 명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열 한 명 중 세 사람을 제외한 여덟 명에게는 거기 그냥 앉아있으라고 말씀하셨고 그 세 사람은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때 다른 제자들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세 사람을 따로 데리고 간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만히 앉아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얘들아, 정말로 내가 죽게 되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승이 제자들에게 이런 말하기 쉬울 것 같습니까? 정말로 어렵습니다. 죽게 되었으니 제발 나를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부탁하신 것인데 그런 부탁을 받은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렇게 거짓말하고 배신할 수 있습니까?
이런 베드로이기 때문에 비난을 받아야하겠지만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베드로가 그렇게 밉습니까? 거짓말을 넘은 그 베드로의 배신이 마냥 밉지만은 않은 것이 모든 신자들의 공통된 느낌 같습니다. 베드로를 잘 비난하지 않게 됩니다. ‘세상에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느냐? 어떻게 저렇게 나쁜 사람이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의 해프닝 같은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더 나아가 동정도 하고 이해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베드로에게도 이런 적이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위안으로 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큰 배신을 했는데, 그 큰 거짓말을 했는데 베드로가 그렇게 밉지 않고 그렇게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까닭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마음, 베드로의 마음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이 2,000년 동안 기독교 신자들에게 전해집니다.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남편을 정말로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남편은 그 마음을 느낍니다. 남편이 돈 잘 벌어주고 잘해준다고 아내들이 정말로 다 고마워할 것 같습니까? 아내에게 정말로 잘해주고 마음이 있는 남편은 아내가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느낄 수 없다면 돈만 대주는 허깨비와 같이 살아가는 남편이 됩니다. 베드로의 마음은 2,000년 동안 모든 신자들에게 전해집니다. 베드로는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했다는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큰 죄를 지은 사람은 사실 다윗입니다. 다윗처럼 그런 죄를 지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이 밉습니까? 수천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국기에 다윗의 별을 그려두고 다윗을 흠모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으로서 도저히 지을 죄가 아닌 그런 무서운 죄를 지은 다윗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밉지 않고 이해가 될까요? 마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했다, 그것을 사람들이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도 할 수 있고 죄도 지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완벽한 인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할지라도 속에 진정한 마음이 있는 것, 이것입니다. 이것이 느껴지는 사람이 있고 아무리 겉으로 잘해도 이것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베드로도 느껴졌고 다윗도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아십시오. 이런 마음이 있는 사람은 실수를 해도 실패를 해도 결국은 돌아옵니다. 마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 일도 아닌데도 빠져나가고 그냥 없어지고 맙니다. 충성하다가 잘못된 사람, 그러나 마음이 있는 사람은 돌아와서 이전보다 더 충성하게 되고 마음이 있는 사람은 사랑하다가도 무언가 잘못되고 오해가 되고 혹은 실패가 있고 실수가 있어서 떠났다가도 다시 더 큰 사랑으로 돌아옵니다. 믿음은 더 그렇습니다.
이제 확인해보십시오. 참된 신자들은 다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러해도 참된 신자들은 한 번 충성한다고 했으면, 한 번 사랑한다고 했으면, 한 번 믿는다고 했으면 끝까지 충성하고 사랑하고 믿습니다. 하나님에게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그렇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참된 신자는 자기 혼자만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예수님께서 계셔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정말로 내 속에 예수님을 모시면 예수님이 그 속에 계시면서 도와주십니다. 실패를 해도, 실수를 해도, 떠나도 그 속에 계시면서 예수님께서 도와주시기 때문에 기어코는 돌아옵니다. 더 큰 충성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돌아오도록 예수님께서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더 노력하게 하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먼저는 여러분 마음 속에 참된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사랑을 해도 진정으로 사랑하십시오.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십시오. 거짓 사랑할 시간이 없습니다. 거짓 믿음 가질 시간이 없습니다. 금방 인생이 끝납니다. 지금 젊다고 생각하십니까? 금방 늙습니다. 나이가 많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 사랑하시고 진정 충성하시고 진정 믿으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의 행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습니다.
죽으셨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죽음 이후에 제자들을 만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권세를 받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진정 그 속에 예수님을 모신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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