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같이 지혜로와라!
마태복음 10:16~23 ══════════════════
조금 아는 것은 모르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책 한권만 읽은 사람보다 더 무서운 사람은 없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고 전도를 보내십니다. 전도 나가는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우리가 아주 주의해야하고 잘 이해해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뱀같이 지혜로와라’ 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말씀들이 자주 본래의 뜻과는 달리 사용되고 악용되는 일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예를 들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라는 말씀입니다. 아마 가게 특히 개업하는 가게의 액자에서 자주 보셨을 것입니다. 참 좋은 말씀인데 그러나 여러분들이 이런 말씀을 보실 때 그 말씀이 본래 성경에서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제대로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욥이 큰 재난을 당하게 되어 그 많던 재산 다 날아갑니다. 열 명의 자식들도 다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욥의 몸은 병이 들어서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욥이 견디다 못해서 다소 불평적인 하소연을 하게 됩니다. 그때 욥 곁에 있던 욥의 친구가 한 말이 욥기 8장에 있습니다. 욥의 친구 수아 사람 빌닷이 말합니다,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욥8:2-6)
그 말 다음에 그 친구가 한 말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7)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이 개업하면 번창할 것이라는 축복이 아닙니다. 당신이 이렇게 잘못된 것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 회개하고 돌이키라, 그러면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 말을 많이 이용합니다. 오히려 기독교인들보다 더 많이 사용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본래는 율법 조문을 나열한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21:23-25) 라는 출애굽기 21장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는데, 이 율법의 본래 취지는 여러분들이 아무리 보복하고 원수를 갚고 싶어도 여러분들이 당한 것 이상 보복하는 확대적 보복은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즉 아무리 보복하고 싶고 아무리 화가 났더라도 만약 보복하겠다면 최대 여러분들이 당한 것 이상 넘어갈 수 없다는 제한적 보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율법을 사람들이 잘못 이해했습니다. 보복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당한 것만큼만 보복하면 된다, 이것은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용인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디까지 보복해야지 내가 당한 것만큼 보복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보복이 점점 더 확대되고 점점 더 많은 원수가 생겨납니다. 보복의 강도가 자꾸 커지게 되고, 개인의 일이 집안의 일로 문제를 크게 끌고 갑니다. 국가가 조금 당하면 그것을 빌미로 쳐들어가고, 침탈하고 노략질하는 일까지 생겨납니다. 확대재생산이 됩니다.
그 율법을 본래의 의미대로 다시 가르치신 것이 그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본래 율법의 취지를 훨씬 뛰어넘습니다. 예수님께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마5:38-3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여러분의 눈을 치는 악한 사람, 여러분의 이를 부러뜨린 못된 일을 한 사람이 있다, 참 악한 사람이지만 그런 악한 사람들에게 보복하려고 생각하지 말고 아예 상대도 하지 말라, 즉 당한 것 그것으로 끝내고 잊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뱀같이 지혜로워라’ 라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말씀 뜻 자체는 쉽습니다. 뱀의 지혜란 신중함입니다. 그리고 분별력이고 종합성입니다.
‘뱀같이 지혜로워라’ 라는 말을 생각할 때는 먼저 그 말씀 바로 앞의 말씀을 함께 생각해야합니다. 그 말씀 바로 앞에 어떤 말씀이 있는지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16절) 라는 말씀입니다. 흔히 하나님의 사람들,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들, 믿음이 좋다는 그런 사람들은 뜨거운 사명감만 있으면 된다, 충성심만 있으면 된다, 신앙만 있으면 된다, 순수함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만 충성심만 사명감만 가지고 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생각하는 기독교인에게 하시는 말씀이 “여러분들이 하나님 일을 한다고, 믿음으로 한다고 제발 미련 부리지 말고 지혜롭게 살아라, 일을 해도 지혜롭게 하라” 라는 말씀입니다.
여자 성도님들 가운데 교회에 충성하면서 그 충성 때문에, 교회일 하는 것 때문에 가정 제대로 안 챙기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남편 제대로 안 챙기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것도 좋지만, 하려고 하면 집안 일 다 챙기고 난 뒤 교회에 와서 일하는 것이지 내가 교회에서 이만큼 하니 그만큼 집안일은 덜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교회 일을 하다가 집안일을 등한하게 되고 남편과 자녀들을 덜 챙기게 된다면 차라리 교회 일을 하지 말라는 말씀까지 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남편으로부터 ‘그런 교회라면 안 나간다, 그런 기독교라면 안 믿는다.’ 라는 말을 들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녀들과 예배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은 좋은데 자기가 늦게 와서 자는 아이를 깨워서 예배드리자고 하니 그 아이가, 나중에 커서 내가 가장이 되면 이런 짓을 안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예 교회도 안 나옵니다. 이런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우리 기독교인들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있고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고 적대시해서 공격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는 일들이 그런 것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다른 기독교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기독교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특히 하나님께 영향을 미칩니다. 나 한 사람 개인이 한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교회 이름으로 하는 것, 교회가 하는 일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내가 아무리 보아도 이것이 맞다, 옳다고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또 우리 교회가 이것을 교회방침으로 정했다 하더라도 생각을 해보아야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어떤 영향을 줄지 하나님께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을 해보아야합니다. 내 돈으로 하는데, 우리 교회 결정이니까 라고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세상은 우리끼리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생각하려면 제대로 생각하고 제대로 분별력을 가지고 판단력도 가지고 종합적으로 생각할 줄도 알아야한다, 우리만 생각하고 내 가정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교회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필요하다면 생각하기도 싫지만 뱀의 지혜라도 배우라는 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고대 북이스라엘의 최고로 악한 아합 왕 그리고 그 아내 이세벨이 아주 못된 짓을 하였습니다. 지극히 선량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나봇을 그야말로 생짜로 모함해서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격노하셔서 당장 아합에게 ‘너의 피를 개들이 핥을 것이다. 너의 아내 몸뚱이를 개들이 먹을 것이다.’ 라는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아합이 기절초풍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 그 못된 아합이 어떻게 했는지 성경의 말씀을 잘 들어보십시오.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왕상21:27)
놀라운 것은 그 다음 성경 기록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왕상21:28-29) 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속으신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아도 아합이 진짜 회개한 것 같지 않습니다. 이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합이 한 것이 쇼든 진실이든 상관없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아합의 그런 쇼 같은 모습이라도 한 번 보여 봐라. 그런 것이라도 보았으면 좋겠다.’
이방인인 블레셋 지도자들에게는 그런 지혜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전쟁해서 승리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법궤를 빼앗아가서 자기네들 신상 앞에 두게 됩니다. 우리 신이 이겼다는 자랑이고 선언입니다. 그 후에 무서운 일들이 이어집니다. 법궤 앞에 서 있던 블레셋 신상이 넘어졌는데 목이 부러지고 두 손목이 부러집니다. 그리고 법궤가 있던 지방에 전염병이 무섭게 휩씁니다. 블레셋은 ‘이 나라에 변괴가 일어난 것이 우리가 한 잘못 때문이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그들에게 자기네들 신에 대한 자존감이 있었습니다. ‘절대로 우리가 빼앗아온 이스라엘 신과는 관계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존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에게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어쩌면 그럴 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블레셋 지도자들은 고집부리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그럴지 모르니까 법궤를 다른 지방으로 옮겨보자..’ 생각하고 옮겼더니 법궤가 옮겨온 지방에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그래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우리 신은 이스라엘 신보다 훨씬 강하다’는 생각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 더 해보자고 생각하고 또 다른 지방으로 옮겼는데 옮겨간 지방에 전염병이 또 무섭게 돌았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지도자들은 깨끗하게 승복했습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우리나라 지도자들 특히 정치지도자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이 이것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블레셋은 깨끗하게 승복했습니다. ‘우리가 천년만년 우리 신이 최고라고 생각했지만 아니구나..’ 우리 신이 이스라엘 신에게 졌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뱀같은 지혜가 이런 것입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이런 지혜를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구체적으로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눅1:1-2) 하고 해고시켜버렸습니다. 청지기는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눅1:3) 라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하면 혹시라도 내 살 길이 생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렀습니다.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라고 물으니 “기름 백말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얼른 여기 앉아서 오십이라고 쓰시라.” 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을 불러 “당신은..?” 라고 물었고 “밀 백 석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여기 앉아서 팔십이라고 쓰시라.”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눅16: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지는 다음 말씀이 여러분들이 들을 말씀입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눅16:8)
여기서 이 세대의 아들들이란 악한 사람들을 말하고 빛의 아들들은 믿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옳지 않은 청지기들의 교활함, 그 재주 좋음을 이해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청지기가 잘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 신앙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지혜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너무 분별력이 없다,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일들을 종합적으로 보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뱀같이 지혜롭다는 말씀을 생각할 때 꼭 하나 기억하실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 말씀 따로 하나가 아니라 뒤에 붙은 말씀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라는 말씀과 하나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두 마디 말은 한 마디 말입니다. 따로 보면 큰 문제가 생겨납니다. 그렇게 하면 기독교인들이 사기꾼이 되기 싶습니다. 교활하게 되기 쉽습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훨씬 더 교활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기독교가 같이 욕먹는 일이 있습니다. ‘뱀처럼 지혜로와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제발 지혜롭게 살아라, 분별없고 판단 없고 믿음만 가지고 산다고 하지 말고 좀 지혜로워라, 종합성도 있으라, 그러나 지혜롭다고 해서 결단코 비둘기와 같은 순결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라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 살 때 잘 알아야할 것은 내가, 우리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를 반대하고 적대시하는 사람들은 기독교를 비방하고 비판하려고 하고 흠을 잡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살아야합니다. 지금까지 괜찮았으니 지금까지 잘했다고 방심하고 거기에 넘어지면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다 날아가고 맙니다.
특히 하나님의 종이라는 목사들은 더 합니다 그래서 이런 기회에 다시 또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늘 그동안 생각해오던 바이지만 나이 한 살 한 살 먹어가면서 점점 더 욕심이 많아지고 추해져간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한 순간 넘어지게 되면 내가 저런 목사와 함께 신앙을 했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지게 됩니다. 하나님께 참으로 죄송한 일들이 당사자는 물론이고 여러분에게까지 있게 됩니다. 아차 방심하면 그렇게 됩니다. 특별히 교회지도자들은 이런 부분을 잘 생각해야합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다. 세상, 세상 사람들, 악한 사람들이 기독교 그리고 교회에게 흠 잡으려고 할 때 무엇을 타깃으로 할 것 같습니까? 기독교인들이 지혜롭지 못한 것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잘하지 못하고 큰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것으로 흠을 잡지 않습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교회답지 못하다, 신자답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다워야지, 기독교 신자들은 자기네들이 믿는 예수를 닮아가야지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 이것을 노립니다. 절대로 기독교신자들이 똑똑하지 못한 것 그것으로 비판하지 않습니다.
혹시 뱀같이 지혜로운 것과 비둘기같이 순결한 것 중에서 선택해야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다른 말로 한다면 멋지게 하고 잘하고 큰일하고 대단한 일을 하는 것과 순수한 기독교 신앙을 지키는 둘 사이에 갈등이 생겨나고 선택해야한다면 무엇을 선택해야할까요? 그 답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전혀 망설일 것 없이 뱀같이 지혜로운 것은 나중 나중입니다. 비둘기같이 순결한 것을, 신자다운 것을, 교회다운 것을 선택해야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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