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이 보이는 것
사도행전 3:1~10
‘암 치료에 있어서 기적은 완치가 아니라 암의 진행이 멈춰서 더 이상 나빠지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세계적인 암 전문 의사가 한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 의사는 흥미로운 말을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얼굴을 한 암 환자들은 대부분이 의사, 변호사, 교수, 검사들이다. 이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치료에 진전이 느리다. 치료의 기미가 전혀 안 보인다 고들 한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지난 32년 동안 엠디 엔더슨에서 이런 사람들에게 치료에 임하는 자세, 마음, 설득하고 또 설득해왔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직업군의 사람들은 나의 그런 설득에도 굴하지 않고 아예 눈과 귀를 닫아버린다. 학력이 높고 지식이 많은 전문직 종사자들은 대부분이 자신의 지식과 확신을 신봉한다. 엘리트 코스를 거쳐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모르는 것도 아는 척하는 이상한 병이 있다.’
이 의사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암 치료에 있어서 기적이 잘 일어나는 특정 직업군과 성향의 사람들이 있다. 서울보다는 지방, 도시보다는 시골, 많이 배운 사람들보다는 조금 덜 배운 선량한 사람들이 치료 성과가 좋다. 생각이 너무 많고 계산적인 사람들보다는 가끔 욱하는 기질이 있더라도 순박하고 남을 잘 믿는 사람들 또한 성격적으로 명랑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다.’
암과 관계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관계없는 사람들도 기억할만한 아주 귀한 말입니다.
초대교회 시절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이 늘 그러듯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갑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늘 그러하듯이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는 사람도 늘 그러듯이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 구걸하는 사람이 기도하러 올라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도와달라고 구걸합니다.
다른 날에도 늘 이런 일이 있었지만 이날따라 무언가 달랐습니다. 베드로가 평소에 하지 않던 말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그리고 그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일으킵니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태어나서 40년간 한 번도 일어서지 못했던 사람이 즉시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습니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들고 감사 감사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 기적은 정말로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적이 대단한 것만큼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 기적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는가 여기에 따라 이 기적이 나와 전혀 관계없는 하나의 이야기 거리에 불과한 것으로 끝날 수도 있고, 반대로 이 기적이 나의 것이 되고 나의 권세, 나의 능력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신앙생활 어느 정도 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몇 가지를 생각해봅니다.
하나는 베드로와 같이 특별한 사람들은 베드로가 가졌던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베드로처럼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이런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은 이런 능력을 받을만한 사람에게는 그런 능력과 권세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이런 능력을 받지 못할 사람에게는 안 주신다는 말도 될 수 있겠습니다.
혹은 앉은뱅이가 낫게 된 것은 그런 기적을 받을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해석이고 또 실제로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 이런 가르침, 이런 인식에는 상당한 위험이 따릅니다. 어떤 위험이 따를까요?
그런 기적을 만드는 능력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나름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이런 저런 자리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그런 사람일뿐이라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대단한 것 같은데 이것도 못하는가?’ 이런 말이 따를 수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순교를 당했다든지 교회를 열심히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병으로 혹은 교통사고로 재난을 당한 사람들, 그렇게 충성스럽게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번듯하게 제대로 이룬 것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 비난에 잘못된 자괴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능력은 고사하고 그저 그런 사람조차도 못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사랑을 못 받은 사람이라는 말도 될 수 있습니다.
나름 신앙생활을 제법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병이 낫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가 풀리지 않고 도리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사람, 힘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자칫 잘못하면 본인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런 시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무언가 저 사람이 신앙생활 제대로 하고 충성도 하고 열심히 하고 있지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혹은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의아심을 사게 되고 본인도 그런 자괴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열 두 사도 중에 야고보 사도는 초대 교회 초창기에 유대왕 헤롯에 의해서 칼로 처형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열두 명의 제자, 사도를 길러내셨습니다. 3년 동안 그렇게 기르기 위해서 애를 쓰시면서 같이 다니시기도 하고 생활을 같이 하면서 열심히 길렀습니다. 야고보 본인도 열심히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일 하나 하지 못하고 처형되고 죽고 말았습니다. 사도 야고보에게 무슨 죄가 있었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무슨 큰 잘못이 있었겠습니까?
또 다른 한 사람을 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스데반 집사입니다. 이 스데반은 생각할 때마다 참으로 안타깝고 아깝습니다. 사도들이 교회 일을 다 하다 보니 목회 일을 제대로 못해서 목회 이외의 다른 일들을 할 수 있도록 일곱 명의 집사들을 뽑았는데, 그 집사의 기준이 상당히 엄격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믿음이 깊고 지혜가 충만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사람들이 그 기준이었습니다. 여러 사람들 중에서 일곱 명이 뽑혔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스데반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튼튼히 받쳐가는 일곱 명의 교회 기둥이 되었습니다.
이 스데반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잡혀갑니다. 그리고 재판을 받게 됩니다. 재판은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산헤드린 그 법정입니다. 재판을 받을 때 스데반의 모습을 성경은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6:15)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교, 전도는 이런 것으로 됩니다. 여러분들이 얼굴 활짝 펴고 웃는 것만 해도 남편을 전도할 수 있고 아내에게 멋진 기독교인의 모습, 예수님의 얼굴을 보일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일, 안 좋은 일 있어도 함께 일하는 직원들에게 얼굴 활짝 펴고 웃으십시오.
스데반은 죽음 직전에도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고 성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귀한 분입니다. 이런 사람은 오래 살아서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고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하는데, 스데반은 억울하고 누명을 쓰고 처형을 받게 됩니다. 그것도 온 몸이 돌에 맞아서 죽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스데반이 참으로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스데반이 얼마나 성령이 충만했는지에 대해서, 돌멩이에 맞아서 죽기 바로 직전에도 성경은 성령이 충만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성령이 충만했던 스데반이 대단한 능력은 고사하고 그렇게 억울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생각해봅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해서 40년간 한 번도 일어서지 못한 사람을 일어서도록 만들었습니다. 성령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스데반도 성령이 충만했는데 그 스데반은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에게 오신 성령님과 스데반에게 오신 성령님은 다른 성령님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는 사람은 성령 충만하지 못해서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조심해야할 말입니다.
남편이 신앙이 제대로 안 되었다고 걱정스러워하는 부인들이 많은데 조심해야합니다. 남편 신앙이 더 좋은지 잘났다고 하는 아내 신앙이 더 좋은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는 그냥 기도하고 저 남편이 나보다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들, 이런 분들이 좋은 믿음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잘못 된 이런 신앙 때문에 이 좋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서도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여러분을 행복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골프 TV에서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저렇게 잘 치는 프로선수 중에 얼굴이 밝은 프로가 거의 없습니다. 거의 다 얼굴이 무겁습니다. 왜 그렇게 얼굴이 무거운지 모르겠습니다.
기독교가 똑같습니다. 이 좋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서 왜 평화가 없고 왜 행복이 없는가? 얼굴이 무거운가?
잘못 믿어서 그렇습니다. 잘못 알아서 그렇습니다. 소위 베드로와 같은 특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안간 힘을 쓰다 보니 기독교 신앙이 즐겁지 않습니다. 가끔씩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잘못된 믿음이라고 책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와 같은 성령 충만함을 얻기 위해서 기도원에 가서 나오지 않는 방언 억지로 하려다다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만들기 위해서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다가 지치고 지쳐 결국에는 불신앙으로 나가떨어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또 부지기수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진 재산을 다 날려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왜 이 좋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무엇 한다고 재산을 날립니까? 의외로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도 가끔씩 언론을 통해서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온갖 방법으로 미혹해서 ‘재산을 빼앗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고 그것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제대로 알아야합니다. 예수님 믿으려면 제대로 믿어야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무슨 돈이 그렇게 듭니까? 또 뭐 하러 죽으라고 교회에 와서 일합니까? 남편들은 아내 잘 챙기고 아내들은 남편 잘 챙기는 그것이 신앙생활 잘 하는 것,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 잘못된 믿음, 잘못된 해석, 잘못된 가르침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눈을 하나님께로 예수님께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비롯한 사람에게 이끄는 것입니다.
다시 확인하십시다. 여러분의 눈을 여러분 자신, 여러분들의 일 그리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두는 동안 여러분에게 평화는 없습니다. 행복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욕심만 생깁니다.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가진 것만 보면서 어떻게 하면 이것도 얻고 저것도 얻는가? 이것 때문에 한평생 허덕이고 삽니다.
또 버림받는 마음이 생깁니다. 저 사람은 이것도 잘 되고 저것도 잘 되는데 나는 왜 그런가? 자기에게도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생각하지 않고 버림받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고, 열등의식에 빠진 사람이 많고 비관의식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 문제, 내 일, 나 그리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눈을 두면 그렇습니다.
앉은뱅이에게 일어난 그 기적을 두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오로지 여러분 자신 그리고 여러분들의 일에만 돌리던 그 시선을 이제는 멈추시라” 그만 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제는 여러분 눈을 나 하나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예수에게로 두라, 돌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앉은뱅이 기적을 소문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그 때 베드로가 기회를 얻어서 설교를 하는데 그 설교의 주 핵심이 그것입니다. 베드로는,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해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3:11-12) 라고 정확하게 말합니다. 이 사람을 낫게 한 것은 우리가 아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를 보지 말고 여러분의 눈을 다른 데로 돌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람을 낫게 한 분은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라는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말씀은 따라서 여러분들의 눈을 돌리려면 이 사람이나 나를, 우리를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예수님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기생이 나옵니다. 라합이라는 이방인 기생입니다. ‘이방인’ 기생이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놀라운 복을 받습니다. 알 것은 그런 복은 그냥 받는 것이 아니라 까닭이 있습니다. 이 라합에게 눈이 있었습니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그 놀라운 기적들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꿰뚫어보는 그런 눈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정탐꾼을 두 사람 보냈는데, 그 정탐꾼에게 라합이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흔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수2:10-11)
여기 하나님이라는 것은 진짜 신이라는 말씀입니다. 라합이 두 정탐꾼에게 한 고백은 단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의 그 위대하고 대단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은 신들 중에서 유일한 진짜 신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이방인으로 있다가 큰 복을 받은 나아만 장군을 아실 것입니다. 나아만은 무서운 병 나병에서 나았습니다. 나아만이 그런 놀라운 은혜를 받은 그것이 그냥이 아닙니다. 성경을 뜯어보시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 까닭을 정확하게 알고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엘리사가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고 오시라고 해서 갔습니다. 일곱 번 몸을 씻었습니다.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낫자 마자 나아만이 한 첫 번째 일을 열왕기하 5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왕하5:15)
여러분들의 신,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진짜 신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 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왕하5:17) 라고 말합니다.
나아만이 자기 병이 나은 것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낫도록 인도해준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도 참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아만의 눈의 초점, 시선의 초점은 단 하나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누차 본 그리고 기히 잘 알고 있는 사도행전 3장의 앉은뱅이 그 기적을 통해서 무엇을 보십니까? 베드로를 보십니까? 40년 만에 일어서게 된 앉은뱅이를 보십니까? 잘 아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이 기적을 보여주신 까닭은 그것을 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을 보라, 거기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 오른쪽에는 예수님이 계신다, 바로 그 예수가 부활해서 앉은뱅이를 낫게 했다”고 하십니다.
이제 여러분들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들은 우리 주님 예수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세상의 주인, 역사의 주인인 것을 아십니까? 그리고 그것을 확실하게 믿습니까?
각자 대답하셔야합니다. 그냥 입으로가 아니라 그냥 한 번 해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실로 알고 진실로 믿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된다면 앉은뱅이 기적이 여러분들에게 멀지 않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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