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의 기도
하박국 3:1~15
얼마 전에 신문에 한 언론인의 날선 글이 실렸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법원이 이명박 전 대통령을 구속하면서 공개한 사연은 여든 다섯 글자였다. 범죄의 소명이 있고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는 간략한 내용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구속 때 공개한 사유는 스물일곱 자였다. 내용은 증거 인멸의 염려 하나였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 사유도 마흔 석자에 불과했다. 전 대통령이든 글로벌 기업총수든 잡범이든 이백 자 원고지 절반도 안 되는 이유로 구속된다. 스물일곱 자든 여든 다섯 자든 입 다물고 철창행이다. 그 싸늘한 침묵이 폭력적으로 느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구속되는 당사자는 몇 백배 더 할 것이다.
이런 법원이 지난 주 전례 없는 사유서를 발표했다. 이천 팔백 서른여덟 자 짜리 사유서, 이백 자 원고지 열여덟 장 넘는 분량이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에 대해 검찰이 청구한 구속 영장 기각 사유였다.
법원의 영장 발부는 영장주의라는 말을 쓴다. 영장주의는 사법부의 영장 없이 행정부가 국민의 신체 구속과 강제수사를 함부로 못하도록 규정한 헌법 이념이다. 영장주의는 불구속 수사, 불구속 재판을 원칙으로 한다. 이런 원칙을 깨고 예외로 구속해야한다고 구속영장을 발부할 때 스물일곱 자 사유를 내놓던 법원이 불구속 재판이라는 원칙대로 불구속을 하면서는 이천 팔백 서른여덟 글자의 사유를 발표했다.」
그 언론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헌법 이념에 따른다면 반대로 해야 했다. 구속되는 사람을 납득시키기에는 이천 팔백 서른여덟 자도 부족하다. 반대의 경우 즉 구속하지 않고 불구속 하는 데는 스물일곱 자이면 충분하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여러분들 한번쯤은 정색을 하고 질문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판사들의 그런 모습은 정의로운 것인가? 거기에 정의가 있는가?’
그러면서 꼭 빠뜨리지 말 것은 여러분 자신에게 끊임없이 해야 하는 질문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나는 정의로운가? 내가 하는 일에는 정의가 있는가?’입니다. 끊임없이 생각해보아야합니다.
대단한 사람, 잘난 사람, 유명한 사람들의 정의는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있어지고, 있다 해도 없고 없다 해도 있습니다.
실제적인 정의는 여러분들에게서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작은 일에 얼마나 정의로운가? 여러분이 회사를 경영하면서 내 직원들에게 나는 얼마나 정의로운가? 상사라면 내 부하들에게 나는 얼마나 정의로운가? 크든 작든 간에 돈 쓸 때 그 돈 쓰는 모습이 얼마나 정의로운가? 힘없고 약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가 하는 행동의 모습은 얼마나 정의로운가..? 여러분들은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되풀이 하고 질문에 따라서 여러분들이 움직이면서 그렇게 산다면 이 사회는 필경은 정의로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말기 무렵에 앗시리아를 제압한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합니다. 나라의 쓸 만한 사람들은 모두다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희한한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있는 일입니다. 그런 일이 있을 때 괜찮은 사람, 쓸 만한 사람들은 끌려가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 ‘모자라는’ 사람들이 남아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평소에는 큰 소리 치지 못하고 제대로 소리 한 번 못 내다가 쓸 만한 사람 괜찮은 사람들이 다 없어지면 그 자리에 자기네들이 마치 무엇을 얻은 양 설쳐댑니다.
이스라엘이 그러했습니다. 쓸 만하지 못해서 남겨진 사람, 포로로 끌고 갈 가치조차도 없던 사람들이 남아서 백성들을 압제하고 착취했습니다. 백성들은 권력자, 가진 자들의 횡포로 도탄에 빠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도 이때는 가진 사람들의 편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책망하는 하나님의 종들도 별로 없었지만 몇 명 하나님의 종들이 그런 자들의 형태를 책망했더니 그 종들을 잡아서 무자비하게 처형하고 말았습니다. 나라에 정의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온통 부정, 불의, 불신앙이 가득했습니다. 신앙은 액세서리에 불과했고 장식에 불과했습니다.
이스라엘이란 나라는 일반 국가가 아니고 하나의 교회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 하나님을 믿노라,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교회인데 교회라고 하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저히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믿을 수 없는 정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쯤 되면 나라가 틀림없이 망합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국가 말기적인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잘 아십시오. 이 정도 되면 꼭 망합니다. 나라도 망하고 가정도 망하고 기업도 망하고 개인도 망합니다. 이스라엘은 정치, 도덕 모든 부분에서 타락하고 엉망이 되었습니다. 나라가 나라꼴이 아니었고 사람 살만한 곳이 되지 못했고 사람 사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이때 남아있던 하나님의 종 선지자 하박국이 하나님께 간절하게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정의가 아니십니까? 하나님에게 있는 것은 전부 다 정의인데, 이렇게 정의가 없고 불의가 가득한 이 나라 이대로 두시겠습니까? 하나님 부디 이 나라에 정의가 회복되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래 알았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의외의 말씀이었습니다. ‘똑똑히 보아라, 놀라서 질겁할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귀를 의심할만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내가 영악하고 무서운 족속, 사납고 날랜 바벨론을 일으켜서 네가 말한 이스라엘의 불의를 짓밟겠다. 손을 단단히 보겠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보금자리를 빼앗을 것이고, 먹이를 찾아 덮치는 독수리같이 닥치는 대로 휩쓸 것이고, 바벨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들을 끌어다가 모래덩이처럼 쌓을 것이고, 그렇게 잘났다고 하는 이스라엘의 고관쯤은 우습게 여기고 임금은 노리개로 삼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난 뒤 하박국이 기겁을 했습니다. 기절할 뻔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께 손을 봐달라고 부탁했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그렇게 무서울 정도까지 될 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하박국이 큰일 났습니다. 자기가 하나님께 손 봐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자 하박국은 너무 놀랐지만 감히 이스라엘이 받을 벌을 좀 줄여달라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럴 얼굴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당할 이스라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아파서 무언가 말씀을 드리기는 드려야한다는 생각에 말을 돌려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하나님 맞습니다. 다 좋습니다. 그러셔야죠. 그러나 하나님이 아시는 것처럼 바벨론은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악한 나라입니다. 벌을 받아야 하기로는 이스라엘이 받을 것보다 몇 배를 더 받아야할 나라가 바벨론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나라 바벨론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라고 돌려서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또 대답하십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렇다면 바벨론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고 난 뒤 그 다음에 바벨론을 칠 것인데 바벨론은 내가 이스라엘을 치는 것보다 훨씬 무섭게 치겠다. 비참하게 멸망시키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하나님 말씀은 역사에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 아십시오. 정의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까닭은 믿는 사람들의 세상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세상에서도 하나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입니까? 정의의 하나님입니다. 정의의 하나님께서는 불의는 보지 못하십니다. 단지 사람들은 한계가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정의를 다 볼 수 없습니다. 한계 진 인간의 눈에는 못되고 악한 사람들이 잘 되는 그것만 보입니다. 선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 그것만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들에게 벌을 내리지 아니하시고 그대로 악한 사람들이 잘 되는 그것만 보입니다. 선한 사람들을 안 도와주시는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선한 사람들, 순진한 사람들이 고통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우선 아실 것은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실까?’ 라는 섭섭한 마음, 원망스러운 마음 이것을 조심해야합니다. 여러분들이 보시는 눈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잘 알지 못하고 섭섭해 하고 원망하는 것, 이것은 인간적으로야 그럴 수 있지만 자칫 너무 섭섭해지고 너무 원망스러워지면 큰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회복할 기회까지 놓치고 더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섭섭할 것입니다. 원망스럽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하고 빨리 그만두어야합니다. 그럴 때 잘하게 되면 전화위복의 복을 받습니다. 잘못된 일, 억울하게 당한 일, 원통한 일들은 전부 다 제자리로 돌아가고 바르게 되고, 지금까지 내가 받지 못했던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잘하면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당한 모든 일들에 대한 보상을 하나님께서 넘치게 해주십니다. 원통하고 원망스럽고 가슴 아픈 일들이 있을 때 꼭 아시시오. 여러분들만 원통하고 원망스럽고 가슴 아픈 일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여러분들보다 더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가슴도 아프면 그냥 보지 못하시는데,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고백하고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그런 일을 당할 때 그냥 둘 것 같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보다 더 힘들어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반드시 정의를 이루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대답을 받은 후에 하박국이 한 기도입니다.
하박국의 이 기도는 원통한 일, 억울한 일, 가슴 아픈 일을 당했을 때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하는가 중요한 모델이 되고, 한편으로는 큰 비결이 됩니다.
그러나 하박국이 이런 기도를 하게 되기까지 그냥 된 것은 아닙니다. 그동안 수없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묵상하고 귀를 기울여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늘 교통하십시오. 하나님을 쳐다보고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여러분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으면 이런 응답을 받게 됩니다.
하박국이 이제 기도하는데 첫 번째는 다소곳합니다. 겸손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제대로 알지 못했을 때는 하나님께 항의도 하고 따지기도 하고 원망도 하고 불평도 했지만, 오랫동안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대해서 계속해서 공부한 결과 이제 하나님을 알고 난 뒤부터는 따지지 않습니다. ‘악한 자가 왜 저렇게 잘 됩니까? 그런 사람을 왜 손 보지 않습니까? 선한 사람을 왜 제대로 돕지 않습니까? 하나님, 하시는 것이 옳습니까? 하나님 이것은 꼭 해주셔야합니다. 저것은 아닙니다.’ 그런 요구를 일체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인정합니다. ‘하나님 옳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안 틀리십니다.‘ 라는 기도를 합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고통당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아주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이 고통당하는 이유는 세상 것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나를 힘들게 했던 일, 고통스러웠던 일을 들고 내내 ‘즐깁’니다. 한 번 당하는 것이 아니라 볼 때마다, 생각할 대마다 당하고 또 당합니다. 볼 때마다 원통한 일을 당합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번 당했으면 되었지 자꾸 무엇을 봅니까? 나를 괴롭혔던 사람,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 원통 스러웠던 일들을 자꾸 쳐다보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사실 여러분들이 당한 일, 여러분들을 힘들게 했던 사람들이 여러분을 그렇게 힘들게 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당하는 것입니다. 시선을 문제에 두지 마십시오. 고통만 있습니다. 얼른 눈을 들어서 하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두면 이런 문제가 없어집니다.
하박국이 조국 이스라엘에 그 어려운 일들, 조국 이스라엘이 그렇게 잘못된 일들, 그리고 그 못된 바벨론이 조국 이스라엘을 괴롭혀서 침공하는 일들을 볼 때 너무 괴로웠습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이스라엘보다 더 악한 바벨론을 들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고통스러웠고 속에서 분노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잘하신다는 말만 합니다. 그러자 고통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 잘 아실 것이 있습니다. ‘내가 사람에게 눈을 두지 않겠다. 그런 일에 눈을 두지 않겠다.’ 이것은 참 쉽지 않습니다. 방법을 알아야합니다. 여러분들이 사람에게 눈을 두지 않겠다, 힘든 일에 내 시선을 두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고, 여러분의 눈을 하나님께 두면 자동적으로 여러분의 시선은 사람들에게서 그런 일에게서 떨어집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비로소 알게 됩니다. 힘든 일도 없고 고통스러운 일도 없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생겨나옵니다. ‘하나님은 정말 대단하시다,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하나님은 정의로우시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힘든 일은 그대로 있는데, 못된 사람들은 여전히 내 곁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때문에 여러분들은 ‘하나님은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라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은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께 너무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구나. 지금까지 이런 은혜를 받고서도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몰랐고 내가 감사한 것이 없었구나, 참 죄송하게도 내가 그런 복을 받고서도 그에 마땅한 삶을 살지 않았구나.’ 라는 고백이 생겨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원망이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병에 안 걸립니다. 걸린 병도 낫습니다.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병, 경제, 자녀 모든 문제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이렇게 하십니다. 그야말로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 찬송이 제대로 나오게 됩니다. 지금까지 없던 평안, 드디어 여러분에게 찾아옵니다.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평안이 찾아옵니다. 첫 번째, 하박국은 다소곳하게 겸손하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런 자세로 서게 됩니다.
두 번째는 경배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2절)
하박국이 놀랐다고 말합니다. 놀란 이유는 하나님 대답하신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다 보니 너무 하나님께서 대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감격이 됩니다. 세상을 마음대로 엎으시고, 마음대로 새로 만드시고 마음대로 없게 만드신 하나님을 알고 나니 하나님이 대단하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을 이제 이해하고 나니 하나님이 너무도 기묘했습니다. ‘나도 제대로 공부하고 경험도 많이 해서 경우의 수를 백 가지 정도 알고 있었는데, 하나님께는 경우의 수가 천 가지, 만 가지도 넘는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는 저런 방법, 저런 길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깜짝 놀라게 됩니다.
이사야 28장 29절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면 이렇게 됩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원통한 가운데 하나님을 쳐다보면서 하나님과 교통하면 어느덧 이런 비밀이 여러분들에게 들어오게 됩니다.
시편 139편은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139:14)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너무 대단하십니다. 저는 이제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기기묘묘하게 일하시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이럴 때 이런 사람들에게 주시는 큰 은혜 중 하나는 전적인 위탁이 생깁니다. 지금까지 믿는다, 믿는다,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면서 내가 들고 있었습니다. 내 경제문제, 내 사업 문제, 건강문제, 가정문제, 자녀문제를 믿고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내가 들고 있었지만 그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나면 전적으로 위탁이 가능합니다. 그러면 무거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들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 인생이 왜 힘듭니까? 내가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작은 것을 들고 있는 것도 힘든데, 30년, 40년, 50년, 70년 한 번 들어보십시오.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하나님께 다 맡길 수 있습니다. 거기에 자유가 있고 평화가 있고 여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의 큰 문제 중 하나가 전적 위탁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공부 좀 했다고 경험 좀 했다고 내가 좀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붙들려고 합니다. 내가 해보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믿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맡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다 들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불안합니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내 인생을 앞으로 어떻게 할까? 내 노후를 어떻게 할까? 내가 없으면 내 아이들이 어떻게 될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한 일이 무엇이 있다고 그럽니까? 자기가 있으면서 내 아이 편하게 했는지 힘들게 했는지 누가 압니까? 여러분 물론 잘한다고 했겠지만 사실은 한 일이 별로 없습니다. 아이 힘들게만 안 했으면 다행입니다.
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가정도 맡기고 사업도 맡기십시오. 여러분 사업이 얼마나 크든지 다 하나님께 맡기세요. 자유로운 영혼이 되십시오.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면 가능합니다. 제대로 알기만 하면 내 모든 것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위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쳐다보면서 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어떤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겁나지 않습니다.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멋진 모습으로 살 수 있습니다. 아무 좋은 일 안 생겨도 하나님을 제대로 알면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필요 때마다 여러분의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고 지키시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박국의 기도는 간구가 아니라 찬양입니다.
‘하나님, 정말로 잘하십니다. 고맙습니다. 하나님 알아서 하십시오.’ 라고 빙그레 웃을 수 있습니다. 간구할 때 얼굴은 찌푸리게 됩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잘 아십시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주워온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인이 아니라 지나가는 객이 아니라 자식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합니다. 하박국이 지금 그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간구가 아니라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하박국이 간구를 하는데, 바른 간구를 합니다. 어떻게 간구하는지 보십시오.
하박국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난 뒤 ‘하나님, 내 조국을 적으로부터 구원해주십시오. 내 조국을 보호해주십시오 내 가정을 챙겨주시고 내 자식의 미래를 하나님께서 돌보아주십시오. 내 건강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든 회복시켜주시고 도와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내 소원대로 내가 바라는 대로 무엇을 원하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나’가 없습니다. ‘우리’가 없습니다. 대신 하박국에는 하나님만 있습니다. 그저 ‘하나님, 지금까지 잘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지금까지 하시던 대로 그냥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저의 문제, 제 가정의 문제, 내 자녀의 문제, 경제문제, 내 건강의 문제 그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시오. 더 힘 있게 하십시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악한 바벨론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시는 것, 우리로서는 너무도 원통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얼른 하시고 더 힘 있게 하십시오.‘ 라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라는 본문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알고 나니 깜짝 놀랍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나니 이런 하나님인줄 몰랐습니다. 이제 알았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람도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여러분들은 얼마나 잘 아실 것 같습니까? 어렵습니다.
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기도 잘 하지 않아도 됩니다. 공부 그렇게 많이 하지 않아도 됩니다. 늘 하나님을 보시고 하나님이 잘 안 보이면 눈을 들어서 하늘을 보십시오. 하나님 옆에는 예수님이 계신다는 아십시오. 하박국이 지금 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2절) 라고 말하고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2절) 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내 소원이 아니라, 우리의 바라는 바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바를 얼른 이루어주십시오‘ 라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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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에 빠뜨리지 않고 기억하시고 기도하실 것이 있습니다. 본문 2절 마지막에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제가 이제 하나님을 좀 알았다고 이런 소리 저런 소리 잘난 소리 하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저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저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나님 은혜가 아니면 제가 어떻게 살겠습니까? 저는 전적으로 그저 하나님 은혜에 삽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삽니다. 누가 무엇이 나의 힘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만이 힘입니다. 하나님, 이런 나를 보시고 제가 좀 부족하더라도 저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제가 평화와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어도, 제가 하나님께 이런 저런 말할 자격이 하나도 없어도 그저 하나님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저를 한 번 봐주십시오.
기도는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잘난 기도 하지 마십시오. 이런 기도를 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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