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창세기 43:1~14)

분당소망교회 2016. 10. 7. 11:45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창세기 43:1~14

 

    정신과 의사의 이야기입니다. 정신과에 입원해있던 한 부인이 의사에게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제 밤에 무서운 꿈을 꾸었답니다. 자기 집 화초가 다 말라죽는 꿈이었습니다. 자기는 지금까지 한 번도 화초를 말려 죽인 적이 없었고 아무리 병든 화초도 자기 손에 오면 척척 살아났는데 그런 꿈을 꾸었다는 것입니다. 그 부인이 의사에게 선생님, 화초는 사람처럼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물을 주고 정성껏 사랑을 주면 반드시 살아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화초가 다 죽었죠?’ 부인은 꿈인 것을 알면서도 그 사실에 대해서 두려워 견디지 못했습니다.

확인해보았습니다. 화초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 꿈이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난 후에도 그 부인은 여전히 그 꿈을 불안해했습니다.

 

정신치료를 통해서 그 환자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막내였던 환자는 초등학교 때 무척이나 사랑하고 따르던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습니다.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큰언니 집에 가서 살게 되었지만 거의 혼자 힘으로 대학을 마쳤습니다. 좋은 대학을 갔기 때문에 직장도 좋은 곳으로 갔습니다. 직장생활을 잘했습니다. 현재 훌륭한 남편을 만나 좋은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자녀들도 잘 자랐습니다.

그런데 생활이 안정되면서 오래전 상처가 살아났습니다. 사랑하던 부모가 성장기에 다 돌아가셨고 그렇게 가고 싶은 대학을 아무도 가라고 권하지도 않았으며 자기가 애를 쓸 때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부모가 더욱 그리웠습니다. 그러면서 이 부인은 아무도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 나를 돌볼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슴 속에 굳혔고 이 생각을 굳게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그 부인에게 화초 가꾸기는 바로 이러한 자신에 대한 마음에서 출발했습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해줄 사람이 없다. 아무도 나를 보호해줄 사람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가꾸고 사랑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돌보지 않으면 나는 죽을 수밖에 없다.’ 이 마음이 화초 속에 옮겨간 것입니다. 그 화초의 생명이 곧 그 부인 자신의 생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가꾸고 돌보듯이 화초를 그토록 정성껏 가꾸고 돌본 것입니다.

 

이제 그 부인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비록 그 부인은 과거에는 힘들었습니다. 아픈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려웠지만 다른 사람들은 쉽게 가지 못하는 좋은 대학에 갔고 훌륭한 남편도 만났습니다. 자식들도 훌륭히 자랐습니다. 안정된 가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인은 왜 그 상처를 안고 힘들어 아파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어릴 때 부모의 상실로 인한 상처가 부인 마음 속 깊이 크게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아픔으로 자리 잡았고 두려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언제 또다시 내가 그런 아픔을 겪게 될 것인가? 언제 또 내가 그런 상실을 겪게 될 것인가?’ 이런 마음이 너무 크게 자리 잡기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그 아픔과 상처가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상실에 대한 아픔,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창세기 선악과 사건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완벽한 에덴동산에서 살았습니다. 아무것도 부족함 없는 완전한 삶이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에덴동산의 상실, 아픔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의 것입니다. 그 상처와 아픔을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알지 못합니다. 아무리 안다고 해도 알지 못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에도 계속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언제 또 우리가 이런 상실을 당할 것인가? 언제 어떤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인지 늘 두려움 속에 살았습니다. 인간 모든 사람에게 상실의 두려움으로 있다고 창세기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있는 상실의 두려움이 야곱에게도 있었습니다.

야곱은 형에게 아주 못되게 했습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여서 형이 받을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결국은 쫓겨나게 됩니다.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멀리 외삼촌댁으로 도피했습니다. 이때 정든 집, 정든 고향, 사랑하는 부모를 떠나야하는 상실의 아픔을 야곱은 겪었습니다. 많은 세월이 지나 형편이 잘 풀렸습니다. 네 명의 아내까지 두었지만 그 네 명의 아내 중 하필이면 그 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라헬을 잃어버리는 상실의 아픔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사랑하는 아들 열한 번째 아들을 잃어버리는 최악의 상실을 다시 겪게 됩니다. 이 상처, 이 아픔이 야곱 속에 자리 잡게 됩니다.

 

죽은 아들 요셉을 가슴에 묻고 산지 20여 년이 되었습니다. 야곱 집안에도 양식이 없어서 굶을 지경이 됩니다. 그러던 중 이집트에는 곡식이 넉넉하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야곱이 곡식을 구해오라고 열 아들을 이집트로 보냈습니다. 곡식을 구하러 갔던 야곱의 아들들이 이집트에서 간첩으로 몰렸습니다. 결백을 증명하려면 그 중 하나를 인질로 두고 열두 번째 아들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는 지시를 받게 됩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돌아와서 야곱에게 그 사실을 말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베냐민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보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의 상실이야 어쩔 수 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다시는 상실을 겪지 않겠다,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것이 야곱의 심정이었습니다.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이것은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겠다.’ 야곱의 심정은 충분이 이해됩니다. 그러나 절대 못 보낸다, ‘절대라는 말이 하나님 앞에서 통하겠습니까? 인간 앞에서라면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하시기로 작정하신 일이라면 인간의 절대는 하나님의 절대앞에서 설 자리를 찾지 못합니다.

 

날이 지나갑니다. 야곱의 집안사람들은 이제 못 먹는 날이 먹는 날보다 많아집니다. 굶는 것도 한계에 이릅니다. 인간이 아무리 강하고 모질어도 먹지 못하는 것은 견디지 못합니다. 아무리 강하고 모질어도 내 새끼 굶는 것만큼은 이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굳게 버티던 야곱이 어쩔 수 없이 드디어 항복합니다.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가거라, 이집트 총리에게 드릴 예물도 준비하라, 곡식 값도 두 배 준비하라그 말을 하면서 야곱은 자기 생애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말을 합니다. 그 말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는 14절 말씀입니다.

드디어 야곱이 항복을 합니다.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항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면 누가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가? 하나님이 데리고 가신다면 나로서는 보낼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하나님께 항복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살립니다. 이것이 사람을 살립니다. 이것이 우리를 살립니다.

큰 일이 있을 때, 가슴 아픈 일이 있을 때, 너무도 두려운 일이 있을 때 그것이 인간의 일인지 혹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지 먼저 보아야합니다. 인간의 일이라면, 세상의 일이라면 애를 써보기도 해야 합니다. 힘도 써봐야 하고 발버둥도 쳐봐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그 어떤 것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빨리 두 손 드는 것이 낫습니다.

 

드디어 항복을 한 야곱의 이 항복은 욥의 항복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욥은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그렇게 존경받고 인정받던 욥은 열 자식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라도 남았으면 좋았겠지만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많던 재산이 하나도 없이 다 사라졌습니다. 그때 욥은 얼른 알았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자연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욥의 모습을 욥기 1장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0-21)

 

이제 우리는 야곱이 드디어 하나님께 항복하고 난 뒤 나머지 일들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확인하려고 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이집트로 갔습니다. 총리를 만났습니다. 의외로 넘치는 환대를 받았습니다. 발 씻을 물도 대접받았습니다. 인질로 잡혔던 시므온도 석방되었습니다. 잃어버릴까 걱정 염려 두려워하던 베냐민은 다섯 배의 대접을 받습니다. 드디어 이집트 총리가 자기가 요셉이라고 자신의 정체를 밝혔습니다. 믿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들로서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세계 최강국 이집트 총리가 자기네 동생이라니 도무지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집트 총리 요셉이 아직 흉년이 5년 더 남았으니 속히 아버지 모시고 이집트로 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마차를 준비했습니다. 그야말로 황금마차를 준비했습니다. 이 일을 전해들은 야곱은 자기 귀를 의심했습니다. 요셉이 보낸 마차를 보고서야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이십 수년간 맺혔던 한이 다 풀렸습니다.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때 야곱은 틀림없이 생각했을 겁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베냐민을 보낼 걸 왜 바보같이 그랬던가? 내가 베냐민을 제때 보내기만 했다면 그만큼 더 빨리 요셉을 만날 수 있었을 텐데, 그동안 밤잠 자지 않은 날, 잠 못 자고 뒤척이던 날, 가슴 속으로 통곡하던 날이 얼마였던가? 시므온이 감옥 속에서 그만큼 고생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어린 손자손녀들이 못 먹어서 굶주리는 일이 적었을 텐데

 

야곱이 왜 진즉 베냐민을 보내지 못했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믿노라 하면서도 진짜 믿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능력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이 일에는 별 도리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언제나 옳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최선을 다한 다음에는 하나님께 맡길 줄 알아야합니다. 최선을 다하고 난 후 결과가 나오면 그것이 어떤 결과이든 간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주인이시고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들,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각별한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항상 옳습니다. 지금 당장은 힘들고 좀 어렵고 고통스럽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하시는 일은 항상 옳습니다. 로마서 8장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당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세상에게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잃어버림을 당했다면, 상실을 당했다면 그 잃어버림, 상실도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에게 버림당했다고 생각되어질 때 여러분이 모든 노력을 다했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들이 있는가?’ 라는 원통한 일들은 여러분이 최선의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났다면 그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동안 야곱은 버티고 또 버티었습니다. 그러다가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자기뿐만 아니라 어린 손자들도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도저히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되었을 때 어쩔 수 없이 포기했습니다.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얼마나 미련합니까? 얼마나 불신앙적인 모습입니까? 야곱이 신앙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입니다. 자기로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과 이미 거리가 너무 멀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 고생을 했습니다.

얍복 강가에서 믿음이 생겼습니다. 한동안 그 믿음으로 버티었습니다. 그러다가 얍복 강가에서 만났던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이 일이 끝나니 저 일이 생기고 온갖 어려움이 계속해서 찾아왔습니다.

야곱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던, 자기가 쥐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먼저 보냅니다. 모든 재산을 다 보내고, 모든 종들을 다 보내고, 사랑하는 자식들, 사랑하는 아내들 다 떠나보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일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 신앙, 그 일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야곱은 죽을 고생을 다했습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절대로 이것만큼은 놓지 못하겠다는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꼭 붙들고 있는 그 무엇이 있습니까?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 내가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것, 내가 특별히 사랑하는 것, 이것만큼은 절대 놓칠 수 없다는 것과 떨어지는 것, 이별, 결별.. 진정한 자유는 거기서 출발합니다.

잃어버리면, 떠나보내면 고독하면 아픕니다. 힘듭니다.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과 진정한 만남이 생깁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진정한 만남, 진솔한 만남이 있을 때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야곱이 베냐민을 마지막으로 떠나보냈는데 여기에는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단지 베냐민만 떠나보낸 것이 아니라 자기 모든 집착을 떠나보낸 것입니다. 야곱이 마지막 남은 베냐민을 떠나보기로 한 결단은 야곱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이 아니라 최고의 결단이었습니다. 야곱이 베냐민을 보내기로 결정한 그 순간, 야곱의 일생에 있어서 모든 훈련, 모든 시련이 종결됩니다.

요셉을 잃어버린 20년 세월 야곱이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얼마나 고통스러워했습니까?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습니까?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이었습니까? 얼마나 어리석은 세월이었습니까? 맨 처음 요셉을 잃어버렸을 때 야곱은 내가 죽겠다, 내가 죽어서 요셉이 간 그 음부에까지 내려가서 요셉을 만나겠다고 통곡했습니다. 누가 말려도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 거절하고 사양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베냐민을 보내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습니다. 얼마나 미련한 일입니까?

 

다시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미 과거에 잃어버린 것이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고 그때 내가 이랬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하고 후회하는 것이 없습니까? 이제 이것만큼은 잃어버릴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있습니까? 이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 이것만큼은 놓을 수 없다고 움켜쥐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한 퇴역장군이 애지중지하는 찻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집에서는 그 찻잔을 그 집의 가보로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이 장군이 그 찻잔을 닦다가 하마터면 땅에 떨어뜨릴 뻔했습니다. 찻잔이 장군 손에서 미끄러져 내려간 것인데 역시 장군이라 달랐습니다. 훈련된 솜씨로 떨어지는 찻잔을 낚아챘습니다. 식은땀을 흘렸습니다. 그러던 장군이 찻잔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 던져 깨버립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그 전쟁터를 누리던 내가 이 찻잔 하나 때문에 식은땀을 흘리다니..’

 

여러분, 차라리 일찌감치 놓아버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뺏기기 전에 여러분들이 놓아버리십시오. 내가 쥘 수 없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놓아버리십시오. 여러분의 손에서 놓고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 던지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하는 것보다 몇 배, 몇 천 배 더 훌륭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십니다. 여러분들이 쥐고 있으면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여러분도, 일도 망가집니다. 얼른 놓고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만드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