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제자입니까? (사도행전 7:51-60)

분당소망교회 2016. 10. 7. 11:47

제자입니까?

 

       

사도행전 7:51~60 

 

남미 아르헨티나의 한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기독교신자들을 향해서 제자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 나는 제자입니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이 사람이야말로 나의 제자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시는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입니다. 그 스데반을 유대교인들이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모독죄로 모함하고 고발했습니다. 스데반이 체포되어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이 재판을 받은 법정은 스데반의 대 스승, 큰 어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판받으셨던 유대인 최고 법정입니다. 예수님을 결국 십자가의 형벌을 받게 했던 서슬 시퍼런 산헤드린입니다.

그 산헤드린의 최고수장인 대제사장이 스데반을 심문했습니다.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당신이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고발장이 들어왔는데 그것이 사실인지 물은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질문을 받은 스데반이 최후진술을 하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 스데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오늘 기독교인들 그 중에서도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스데반은 겸손했습니다.

스데반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종교지도자들을 향해서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2)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여러 어른님들 제가 여러분들에게 한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제 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라는 뜻으로 아주 공손합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도 겸손해야하겠지만 사람들에게도 겸손해야합니다. 특히 예의를 갖추어야 할 곳에서는 더욱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만 잘하면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정말로 하나님께 잘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겸손한 사람은 사람에게도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심지어 종교가 다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지켜야할 예의는 지켜야합니다.

 

사업하는 기독교인 사무실에 한 사람이 찾아와서 명함을 내밀었습니다. 총회에서 이단이라고 정한 종교 단체의 간부였습니다. 당당하게 명함을 내민 그는 그 단체에서 상당한 위치였습니다. 두 사람은 예의를 갖추고 한참을 대화했습니다. 회사 자금 사정이 어려운 것을 알고 회사에 운영자금을 충분히 대줄테니 대신 이 회사에 자기네 종교를 전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자금이 절실하게 필요했지만 그러나 그 사람은 기독교인으로서 도저히 그 제안만큼은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는 집요하게 제안했습니다. 별별 제안을 다했습니다. 끝까지 어쩔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 사람은 마지막 제안까지 거절을 당하자 그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선 그 자리에서 신발을 탁탁 털었습니다. ‘그것은아닙니다. 물론 그 사람은 자기 종교 의식에 따라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상대방이 있고 일반상식이 있습니다. 지켜야할 예의가 있습니다. 에티켓이 있고 매너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켜주어야 합니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정치지도자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어야하고 경제, 사회 교육의 지도자가 되기 전에 사람이 먼저 되어야합니다. 더구나 종교지도자는 더욱 더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학교 다닐 때 노()목사님이 하신 강의가 머릿속에 쟁쟁합니다. ‘여러분, 목사가 되기 전에 사람이 먼저 되십시오.’

사람이 아닌 목사는 아무리 목사 노릇을 잘해도 목사가 아닙니다. 지도자 일을 아무리 잘해도 사람이 안 되었으면 지도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스데반은 유대교지도자들이 비록 종교가 다르고 심지어는 스승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준 사람들이었지만 종교지도자들에게 보여야할 예의를 다 보였고 겸손을 다 갖추었습니다.

 

두 번째, 스데반은 성경지식에 통달했습니다.

스데반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지만 그러나 분명하게 직분은 집사였습니다. 물론 집사라도 사역의 범위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하든 간에 스데반은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집사였을 뿐입니다. 그런 집사 스데반이 성경을 환히 꿰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야곱을 거쳐서 모세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성경을 환하게 꿰뚫고 있었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고 기독교 신자가 될 때에는 성경지식이 없습니다. 당연하게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기 시작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기독교 신자로서 알아야할 것은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지도자라면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스데반은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성경 지식이 많다고 해서 이것저것 쓸데없이 다 끄집어 내놓은 것이 아니라 당시 그 상황 그리고 그 시간 그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꼭 맞는 말씀을 꼭 집어서 뽑아내었습니다. 이것은 스데반이 성경지식을 가진 것만이 아니라 성경을 충분히 이해했다는 말이 됩니다.

성경은 맨 처음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교회지도자들을 뽑았습니다. 교회를 오류로부터, 잘못된 것으로부터, 교회 아닌 것으로부터, 이단과 이단적인 요소로부터 교회와 교인들을 지키기 위해서 교회지도자들을 뽑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들은 지도자로 부름을 받은 순간부터 더욱 공부를 해야 합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공부해야하지만 지도자라면 그 순간부터 더욱 공부해야하고 계속 해야 합니다. 한 번 공부했다고 또 어느 정도 공부했다고 완성되는 것으로 여겨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지도자들은 늘 나는 모자라는 종이다, 나는 알지 못하는 종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 성경말씀대로라면 나는 무익한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속해서 공부해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마땅히 알아야할 하나님의 뜻,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가르치셨는지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아는 지식에 있어서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봉은 바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바울이 진심으로 한 고백이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3:12)

지금까지 달려왔지만 오로지 앞만 생각하고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아직 멀었다, 내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나는 달릴 수밖에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게 박식하고 그렇게 깊이가 있는 하나님의 종 바울이 이런 소리를 했다면 여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 번째, 스데반은 집사라는 직분이 말해주듯이 목회만 하는 목회자이거나 전문적인 사역자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평신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은 영적인 권세와 능력이 대단했습니다. 사도들에 비해서 전혀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라는 사도행전 68절에 그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권세와 능력은 특별한 직분을 받은 사람이라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특별한 직분자이기만 하면 다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받을만한 사람에게는’, ‘그럴만한 사람에게만하나님의 영적인 권세와 능력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가능하면 교회 지도자들에게 특별히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영적인 권세와 능력을 주시려고 애를 쓰십니다. 그렇게 해야 교회 지도자로서의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리 대단한 직분자라도 받을만한 사람이 안 되면 결코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약하시지만 절대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당신의 원칙을 지켜나가십니다. 반대로 특별한 직분이 없어도 받을만한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그런 권세와 능력을 주십니다. 바라기는 여러분들 모두 다 이런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 뜻을 이루어나가고, 하나님의 평화와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나누어줄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출애굽기 33장에서 하나님께서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33:19)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이 되십시오. 은혜 받을만한 사람, 긍휼을 받을만한 사람으로 사십시오. 하나님은 절대로 아끼지 않습니다.

 

네 번째, 스데반이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 겸손하게 예의를 갖추었다고 해서 결코 기가 죽거나 그것 때문에 할 말을 못하거나 할 일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도리어 예를 갖추고 겸손하면서 해야 할 일은 더 잘했고 강해야할 데는 그 누구보다 강했습니다. 이것이 교회 지도자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스데반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대단한 칭찬을 받을 정도로 예의가 바르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옳고 바른 일, 절대적인 일에 있어서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어른이라도 지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고 지지 않았습니다. 자기보다 흔히 말하는 더 높은 직분이라고 지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이 병든 사람들을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낫게 했습니다. 여러 가지 기사를 행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스데반은 자기가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하면서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셨다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교 사람들이 죽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스데반과 유대교인들 가운데 논쟁이 붙었습니다. 이때 착한 스데반이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사람을 상대해서 한 논쟁에서 넉넉하게 이겼습니다.

스데반이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 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6:8-10)

 

스데반이 유대교인들과의 이 논쟁에서 이긴 데는 대단히 중요한 한 부분이 있습니다. 스데반이 이긴 것은 그의 실력이나 능력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겼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지도자들, 직분자들은 이것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똑똑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잘 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 신자의 이김, 승리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21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21:12-14)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내 실력으로 하려고 하지 말라, 이것을 명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여기에 실패합니다. 그것은 능력이 없습니다. 권세가 없습니다. 내 실력, 내 능력으로 하려고 하다 보니 다른 사람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21:15)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주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일서 54절은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다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다’(요일5:4) 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 이름을 가졌다고 해서 신자의 이름을 가졌다고 해서 다 이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사람,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이긴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그 가르침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에서 말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

기독교 신자들이 세상 살아가는 방법은 이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나 사업을 하든지 자녀를 키우든지 간에 무엇이든지 우리 능력이 아니라 성령님의 능력, 성령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일이 이루어지는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세상 살아가는 방법, 세상 이기는 방식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스데반이나 바울 모두가 가장 확실한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다섯 번째, 스데반에게는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사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최후변론의 시간에 자신의 생명을 변호할 수 있는 마지막 소중한 기회를 자기를 위한 변론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스데반이 한 번밖에 없는 기회를 자기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변론의 기회로 삼았다는 이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소에는 나는 주님을 생각한다, 하나님이 먼저다, 교회가 먼저다, 나는 교회를 가장 귀하게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이해관계가 걸리면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무너집니다. 힘이 들고 경제적인 부담이 되고 자기 명예, 자기 체면이 손상될 것 같으면, 더욱 자기 목숨이 관계되면 더할 나위 없이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그렇게 사랑한다고 하는 주님은 온 데 간 데 없습니다. 나만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참으로 그런 순간, 생명이 걸린 그 순간에 자기 자신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님만을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세 번째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말렸습니다. 가면 이번에는 큰 변을 당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 자신도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번에 가면 아주 어려울 것이라고 계시로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계시하신 것은 나보고 들어가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가면 죽을 고생을 하겠지만 그래도 가겠는가를 물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물으신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그래도 갔으면 좋겠다는 하나님의 소원이라는 것을 바울이 알았습니다. 이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들어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루살렘 성전에서 붙들렸습니다. 성전에 가득 찬 그 유대인들이 다 폭도가 되었습니다. 이제 찢겨서 죽을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 위기일발의 순간에 바울이 구원을 받는데 동족인 유대인들, 같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방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로마의 천부장에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숨을 돌렸습니다. 한숨을 돌린 그 순간에 바울이 말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사실 그때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붙들린 이유는 완전한 오해였습니다. 이방인이 들어오면 안 되는 유대 예루살렘 성전에 바울이 이방인을 데리고 왔다는 오해였습니다. 전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이것만 제대로 설명하면 되는데 그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절호의 시간에 그 사실을 해명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말했습니다. 나를 위한 찬스가 아니라 주님을 위한 찬스로 받아들였습니다.

 

스데반이 그러했습니다. 긴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에 대한 해명은 한 마디도 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예수님을 위해서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해롭게 한, 처형한 그 사람들을 책망했습니다. 스데반에게 의분이 일어났습니다. 산헤드린이 어떤 곳입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던 대 스승 예수님까지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만든 곳입니다. 지금 재판관들은 그 당사자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스데반이 마치 어른이 아이를 나무르듯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51-53) 라고 책망했습니다. 대단한 책망입니다. 이 정도 되면 무엇이 돌아올지 불 보듯 뻔합니다. 스데반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분노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여섯 번째, 스데반은 모든 면에서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기독교인이라는 말의 본래의 뜻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크리스찬’, ‘크리스티아누스는 예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죽는 것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비참하게 죽으셨듯이 돌에 맞아 몸이 으깨어져서 비참하게 죽는 것까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죽는 마지막 모습 또한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면서 당시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스데반은 자기 몸이 돌에 맞아서 으스러지는 중에서도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7:60)라고 말했습니다. 바보같이 죽는 것도, 바보같이 용서하는 것도 스승 예수의 뒤를 따랐습니다.

 

우리나라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신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스데반의 뒤를 이어서 예수님의 길을 걸었습니다. 일제에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중간에 기회가 있었지만 그 기회를 붙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내 기회가 아니라 예수님의 기회를 잡아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옥에 갇히고 혹독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결국 감옥을 나오게 되는데 산 사람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 시체가 되어서 나왔습니다. 거적 데기에 싸여 초라한 달구지에 실려 나왔습니다. 그 주기철 목사님이 쓴 글이 있습니다. <영문밖의 길>이라는 제목입니다.

 

서쪽하늘 붉은 노을 영문밖에 비치누나

연약하온 두어깨에 십자가를 생각하니

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붉--은옷

--없이 걸어가신 영문밖의 길이라네

 

한발자욱 두발자욱 걸어가신 자국마다

뜨거운물 붉--은피 가득하게 고였구나

--악한 유대병정 포--악한 로마병정

걸음마다 자국마다 가진포악 지셨구나

 

아픈 다리 싸매주고 저는 다리 고쳐주사

보지 못한 눈을 열어 영생길을 보여주니

칠전팔기 할지라도 제십자가 바로지고

골고다의 높은 고개 나도 가게 하옵소서

 

십자가에 고개턱이 제아무리 어려워도

주님가신 길이오니 내가어찌 못가오랴

주님제자 베드로는 거꾸로도 갔사오니

고생이라 못 가오며 죽음이라 못가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