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석위에 놓은 사람
누가복음 6:43~49
오늘은 우리 교우 중 한 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공개적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하는 간증이 있겠습니다. 정복희 권사님입니다.
“어느 날 78년생 아들이 직장부근에 쓰러져있는 행려환자 한 분을 발견하여 동료 한 분과 함께 병원으로 이송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병원 담당의사가 두 사람도 엑스레이를 찍어보라고 했습니다. 그 행려환자는 결핵환자였습니다. 검진을 했더니 아들의 폐에서 작은 점하나가 발견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큰 병원으로 가서 다시 재검을 해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열흘 동안 입원하여 검사한 결과 아들의 폐에 있는 작은 점하나는 본인도 모르게 결핵을 앓은 흔적일 수 있으니 매년 검사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매년 검사를 받고 있던 중 아들의 기침과 감기 증상이 심해서 다시 병원을 찾아 검사를 해보니 아들의 폐가 조금씩 굳어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더 놀란 것은 그 다음 방문 때였습니다. 그 병은 폐섬유화증이라는 희귀병으로 치료방법은 폐이식 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습니다. 저는 너무도 기가 막혔습니다.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건강했던 아들에게 갑자기 이런 일이 닥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친구 며느리가 똑같은 증상으로 약으로 치료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병원을 찾아가 검사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로 폐 이식밖에 방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나마 희망을 걸었던 일말의 기대마저 산산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주님 저에게 어찌하여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저는 기도했습니다. ‘주님은 죽은 나사로와 야이로의 딸과 과부의 아들도 살리신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녀 태형이도 살려주실 줄 믿습니다.’ 하고 주님께 온전히 맡기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다른 병원의 흉부외과 폐이식 권위자이신 교수님을 소개받고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폐의 70%가 굳어진 상태였습니다. 저는 말문이 막혀 기도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졌습니다. 이제 저의 기도는 그저 ‘주여, 주여’ 라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폐가 70% 굳은 상태라 심한 호흡곤란과 기침을 동반하여 교수님은 산소 호흡기를 처방해주셨습니다. 또한 수술하려해도 체력이 약해지면 이겨내지 못하니 집에만 있지 말고 출근도 하고 평소와 똑같이 생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가 2014년 2월 초였습니다. 폐 이식 등록을 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아들은 출근할 때는 휴대용 산소통을 어깨에 메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수지에서 직장이 있는 서현동까지 사용하기는 부족한 산소량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가족은 아들 직장과 가깝고 교회가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이사하는 과정에서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저희는 교회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3층 빌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더욱 새벽기도에 매진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들은 여전히 산소통을 어깨에 메고 출근하였습니다. 그런데 직장에서 점심 식사 후 화장실에 갔다가 뇌의 산소 부족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아들은 급히 응급실에 실려 갔고 그 다음부터는 출근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아들은 수시로 기침을 하였고 더 힘든 고통과 시름하였습니다. 체중은 점점 빠져 뼈와 가죽만 남아있었습니다. 그런 아들을 보고 있자니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습니다. 이제는 수술 날자가 빨리 잡히기만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 금요일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중보기도를 하던 중 이식을 받을 준비를 하고 병원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아들과 함께 입원준비를 하고 병원으로 가던 중 기증자의 폐 상태가 좋지 않으니 다시 집으로 돌아가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정상인들에게는 3층 계단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아들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럽고 먼 거리였습니다. 아들은 한 걸음 한 걸음 부축을 받으며 발을 뗄 때마다 허덕이며 힘겨워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수술 받으러 갔다가 되돌아온 것이 두 번이나 더 발생했습니다. 그때마다 실망감이 몰려왔습니다. 한참 젊은 30대 중반의 나이에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아들을 보자니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드디어 세 번째 연락에 마침내 수술실까지 들어가 기증자의 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술실 앞 전광판에 <박태형 수술 중>이라는 알림만 계속 나왔습니다. 한 두 시간이 지난 후 교수님이 수술복을 입으신 채 나오셨습니다. 85세의 여자 뇌사자의 폐의 늑막이 유착이 심하여 이번에도 폐 이식을 받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시 실망감에 빠졌습니다. 교수님은 ‘태형이가 너무 살이 빠져 하나님이 살 좀 찌우고 오라고 하시나부다’ 라고 하시면서 우리를 위로해주셨습니다. 그때 아들의 몸무게는 42Kg였습니다. 1박2일 동안 1인실 입원비와 심장과 폐 기능을 도와주는 비싼 에크모 장비 비용만 내고 나오자니 너무나 속이 상했습니다. 그때가 6월 28일이었습니다. 너무나 속이 상해 집으로 돌아와 하나님을 원망하며 남편과 아들이 듣지 못하게 안방에서 극동방송을 틀어놓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내어 엉엉 울었습니다. 제가 듣기에 마치 동물의 울음소리 같았습니다. 제가 그런 소리를 내면서 울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 울음소리는 이후의 시간에도 저도 모르게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렇게 울고 있던 그때 예수님께서 저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들을 온전히 주님께 맡긴다고 해놓고, 주님을 온전히 믿는다고 해놓고 그러지 못하고 염려와 불평으로 가득한 저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주님께 온전히 맡기고 의지하기로 다시 기도했습니다. 그때 저의 마음속에 강한 확신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살려주시는 확신이었습니다. 찬송가 432장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와 복음송 등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찬양의 고백들이 흘러나왔습니다. 저는 마음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확신과 믿음을 주시지 않으셨다면 견디기 힘든 어려운 순간이었습니다.
두 달이 지난 8월 9일 교회에서 금요 중보기도를 하던 중 입원준비하고 병원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꼭 수술할 수 있도록 해주시리라 믿고 주님과 함께 아들과 저는 병원으로 출발했습니다. 병원에 도착하여 수술준비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로 수술을 시작한다고 하셨습니다. 지난번 취소된 수술 뇌사자의 폐는 85세였지만 이번 폐 이식자는 30세의 젊은 나이로 교통 환자로 뇌사판정을 받은 청년의 폐였습니다. 아들보다 네 살이나 어린 청년이었습니다. 태형이가 젊은 사람의 폐를 이식받는다는 것이 감사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 제 아들보다 젊은 나이에 사고를 당한 청년의 생명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저보다 더 큰 슬픔의 시간을 보냈을 청년의 부모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그 청년에게 또 그 청년 부모에게 미안하고 감사했습니다.
그 청년의 생명이 우리 아들의 생명을 살렸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살리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또 한 생명을 통하여 저의 아들을 살리고 계셨습니다. 딸과 사위, 남동생과 아들 친구들이 수술실 앞에서 함께 기도하며 기다려주었습니다. 기도하며 눈물로 밤을 새워 토요일 새벽 4시경 10시간의 수술이 무사히 끝나고 아들은 중환자실로 이동하였습니다. 수술실을 나온 아들의 몸에는 의료기기와 온갖 호수들이 몸을 감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볼 때 한없이 눈물이 나왔습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이었습니다. 이런 어미의 마음을 주님은 아실 것입니다. 수면상태를 유지해야 이식받은 폐와 인공호흡이 잘 맞아 폐에 거부반응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보호자 대기실에서 항상 대기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매일 새벽 5시에 나를 깨우셨습니다. 중환자실 앞에서 새벽기도를 드리고 면회시간이 되면 수면상태에 있는 아들의 병실 문을 조금 열고 늘 무의식중인 아들에게 ‘아들 수고했다. 잘 이겨내 주어서 고마워. 엄마는 문 앞에서 항상 기도하고 있으니 걱정마라. 너의 침대 옆에서 하나님이 지켜주신단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하루 일과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너무나 감사하게 폐에는 아무런 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열과 호흡이 고르지 않아 기관절개술을 해야 한다고 하셨지만 이 또한 하나님께서 무사히 지나가게 해주셨습니다. 순간순간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주셨던 확신대로 역사해주셨습니다. 소변 호스, 기저귀, 다리에는 순환역할을 도와주는 바지통에 여러 가지 보조기구를 달고 신음하던 아들은 15일의 수면유지가 끝났습니다. 그리고 15일째부터 조금씩 유동식을 코로 주입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소화를 시키지 못해 배속에는 가스가 가득하여 관장하는 일을 반복하였습니다. 또한 치료과정에서 40여 번의 수혈을 하였습니다. 여러 위기와 문제가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20여일의 중환자실 생활을 청산하고 일반 병실로 이동하였습니다. 일반 병실에서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장시간 소변 카테타를 꽂고 있어 방광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카테타를 빼고 나니 아들은 10분마다 소변이 마렵다고 했습니다. 물론 소변과 대변은 받아내고 있었습니다. 대변은 기저귀로 받아내었고 매일 새벽 엑스레이를 찍고 가슴과 복부를 확인해야했습니다. 또 아침저녁으로 뜨거운 스팀 타월로 아들의 팔 다리 복부 마사지를 해야 했습니다. 장운동을 돕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육체적으로는 너무도 힘든 시간이었지만 아들이 조금씩 회복하는 모습을 보니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차츰 좋아져 이제는 몸에 복잡하고 얽혀있던 호스를 다 빼고 산소호흡기만 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간의 힘든 과정으로 여윌 대로 여윈 아들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는 것조차 너무나 힘들어했습니다. ‘엄마, 나 걸을 수 있을까요?’ 아들이 물었습니다. ‘그럼, 걸을 수 있고말고, 하나님이 이렇게 치료해주셨는데 걷고 뛰고 다닐 수 있지.’ 라고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여기까지도 인도해주셨으니 끝까지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대로 점점 아들의 몸 상태는 호전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휠체어를 타고 재활치료를 받으러 가야했지만 어느덧 아들의 몸이 조금씩 좋아져 폴대를 잡고 조금씩 걸을 수 있었습니다. 아들의 인생이 다시 시작된 것입니다. 이때 아들은 프로필에 ‘다시 태어나다.’ 라고 써놓았습니다. 아들은 정말 다시 태어났습니다. 아기 때 대소변을 받아내고 걸음마 시켰던 그 엄마와 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들은 30대 중반에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아들은 병원사정으로 2013년 9월 17일 추석명절에 조금 무리하게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20일, 일반 병실에서 20일 총 40일 만에 37Kg의 몸무게로 퇴원하였습니다. 저는 너무나 큰 대가를 치르고 믿음의 큰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운동과 음식조정을 잘 하며 1년 휴직기간 동안 58Kg의 정상체중으로 회복하여 2014년 7월 1일부터 다시 직장에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동안 도움을 주신 담임목사님과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감사는 간증입니다. 또한 최고의 찬양이 간증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권사님 가정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하나님께 찬양 드립니다.
위기가 사람을 만들지는 않는다. 다만 위기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준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6장 첫머리는 예수님께 대한 시비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음모와 위기로 이어집니다. 분위기가 아주 흉흉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일행을 비난합니다. 고발할 증거를 찾기 위해서 모든 애를 다 쓰고 있습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이 분이 가득하여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처치할지 논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라는 11절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유대종교지도자들의 본격적인 공격에 대비해야합니다. 그러한 위기 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서 오늘 우리들에게 가르치시는 바가 있습니다. ‘기독교회 그리고 기독교 신자는 무엇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가? 무엇으로 싸워야하는가? 교회와 신자는 무엇으로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말씀하시는 것은 먼저 기도이다, 무엇보다도 기도이다, 항상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특별히 기도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위기에 맨 처음 하신 일이 기도입니다. 12절에는 그것을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보통 때도 그렇지만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무엇보다도 기도해야합니다 당연하게 기도하겠지만 잘 아실 것은 ‘내가 기도했습니다.’ 라고 그냥 핑계대고 변명할 정도의 기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아닙니다. 흉내만 내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저 한 번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모든 힘을 다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어디서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집에서도 할 수 있고 그 자리에 앉아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가까운 데서도 할 수 있고 쉽고 편하게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올라가셔서 그것도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신자들의 기도는 그냥 하는 기도, 그것은 아닙니다. 신자들은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핑계를 참 잘 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우리 핑계에 넘어갈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기도를 했는지 아니면 흉내만 냈는지 모양만 냈는지 하나님은 너무 잘 아십니다. 그리고 모양만 낸 기도, 흉내만 내 기도는 하늘나라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맙니다.
두 번째,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세우셨습니다. 일이야 얼마든지 예수님 혼자서 하실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혼자 그 일을 하시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함께 하시려고 제자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는 유한한 생명이 있는데 예수님이 떠나가시고 나면 그 뒤에 그 일을 계속 할 수 있도록 제자들을 세우셨습니다.
13절에서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셔서 밤을 새워 기도하신 이유 중 중요한 이유 하나가 바로 이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를 제자로 세울까?’
오늘날 교회가 이것을 알아야하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제자를 세워야합니다. 그런데 쉽게 그냥 제자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세울지 애를 써야합니다. 기도해야합니다. 그리고 난 뒤 세워야합니다.
사실 당시 예수님께서 세우신 제자들은 우린 눈으로 볼 때 다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눈으로 보면 그 정도 사람으로 무슨 일을 할까 싶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스승 예수님을 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라는 16절 말씀은 그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게 그리고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중요한 것을 가르치십니다. 제자들을 세우기는 세워야하겠는데 세울만한 사람이 없다와 같은 핑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핑계, 이유로 제자를 세우지 못할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제자들을 세워야합니다. 교회지도자들이라면 제자들을 세워야합니다. 우리가 제자들을 세우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 최고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일체 핑계하지 말고 이런 저런 말하지 말고 기도하고 제자들을 세워야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20절)..
그냥 세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쭉 가르치셨다는 말씀입니다. 또 39절에는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39절)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교회지도자들은 제자를 세우는 것으로 만족하고 끝낼 것이 아니라 가르쳐야합니다. 자꾸 가르쳐야합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가 에티오피아에 선교를 다녀왔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31명의 교회지도자들과 교역자들을 파송했는데 그냥 두면 되지 않습니다.
작년에 에볼라 때문에 가지 못했는데 꼭 이렇게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어떻게 하든 기도하지 못하게, 교회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어둠들이 얼마나 방해하는지 모릅니다. 어제 뉴스에서 보았듯이 에티오피아에 폭동이 일어났는데 일흔다섯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에티오피아에 있었던 마지막 날 새벽에 일어나서 보니 군인들이 총을 들고 골목마다 있었습니다. 빨리 빠져나가야한다는 소식이 들어와서 아침도 제대로 못 먹고 그 새벽에 빠져나왔습니다. 빠져나오고 나니 무사히 나갔는지 여러 군데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런 위험이 있어도 해야 합니다. 어려움이 있어도 해야 합니다. 돈이 들어도 해야 하고 멀어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에티오피아를 주선교지로 택한 이유는 거기는 멀어서 잘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 교회는 남미 쪽으로 선교를 하고 유럽의 교회는 힘이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멀리 잘 가지 않습니다. 에티오피아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거기에 교회도 많이 있습니다. 특히 에티오피아 정교회가 있는데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저것이 정말 교회인지 걱정될 부분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가르쳐야합니다. 우리가 이 일을 위해서 간 것입니다.
교회는 가르쳐야 되고 교회지도자들은 항상 제자들을 가르치고 또 가르쳐야하고, 제자 된 사람들 그리고 기독교신자들은 내가 신자 되었다, 제자 되었다고 만족하고 끝낼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공부하고 배워야합니다. 배우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기독교신자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제자의 모습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성숙한 제자, 상당히 성장한 제자의 모습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미안하지만 제자가 아닙니다.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우기를 거부한 사람은 그 사람이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이미 끝난 인생입니다. 겉으로는 살아있고 대단한 사람인지 몰라도 배우기를 끝낸 사람은 죽은 인생입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더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이라는 이름 자체에 배운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 예수님께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신자라고 하면서, 제자라고 하면서 배우지 아니하는 사람, 배우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더 이상 신자가 아닙니다.
이렇게 세우신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강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입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46절) 라고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뜻은 제자라면 순종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겉모습이 아무리 갖추어진 제자의 모습이라도 제자가 아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다, 내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달란트 비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장사를 잘해서 돈을 남겼기 때문에 칭찬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칭찬받은 까닭은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예수님으로부터 그렇게 책망 받고 어두운 데로 내어 쫓긴 까닭은 사업했는데 돈을 못 남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순종하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말씀하신 것이 마태복음 7장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2-23) 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사람들에게 이렇게 책망하십니까? 잘못한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했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 쫓아냈고 주의 이름을 많은 권능으로 행했습니다. 전부 다 주님의 이름으로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호되게 책망하실까요? 순종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좋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제자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라 순종이라는 말씀입니다. 본질이 없는 제자, 그것은 제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또 있습니다. 힘들고 어렵고 위기가 가득한 이 세상, 참 복잡한 세상입니다. 도무지 어떻게 해야 우리가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 아들딸들이 어떻게 하면 이 어려운 세상을 제대로 헤쳐 나갈 수 있겠는가? 참 걱정이 많은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을 교회 신자들이 헤쳐 나갈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순종이라는 말씀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싸움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대장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 신자들 우리가 할 일은 교회가 할 일은 제자들이 할 일은 순종입니다. 사람들은 급하게 되면 이것을 잊어버립니다. 우선 당장 급한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이 일을 해야 할까? 저 일을 해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실패하고 맙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미디안은 너무 크고 강한 적입니다. 이스라엘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기드온이었습니다. 힘들게 이스라엘에서 3만 명의 군사를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 숫자로는 족탈불급이었습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 3만 명이 너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줄이라고 하셔서 줄였더니 또 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줄이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삼만 명을 삼백 명으로 줄였습니다. 기드온은 순종했습니다. 정말로 말도 안 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상황을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은 순종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숫자를 그렇게 줄이라고 하셨으면 무기라도 좀 좋은 것으로 챙겨야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항아리를 들고 나가라고 하셨고 횃불을 들고 나가라, 나팔을 들고 나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싸움에는 도무지 도움이 안 되는 것, 거추장스러운 것들이었습니다. 순종하는지 아닌지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싸움은 내가 한다, 너희들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 무기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한다, 너희들에게 필요한 것은 순종!’이라는 말씀입니다. 말도 안 되는 내 말에도 순종하겠는가 않겠는가? 이것입니다. 기드온은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무슨 일이 있든지 없든지 항상 생각할 것은 ‘내가 어떻게 하는가? 잘 할 수 있는가?’ 그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주님께 순종해야할 것이 무엇인가?’ 입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2016년은 더 힘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사람은 훨씬 더 쉽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늘 생각할 것은 ‘내가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께 순종할 것이 무엇인가?’ 입니다. 급할 때일수록 더 그렇게 하십시오. 이것이 승리의 길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로 하나님을 생각하는가? 내가 무엇을 순종할 것인지를 생각하는가? 아니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내가 어떻게 할까? 내가 무엇을 할까? 그렇게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그 결과는 달라집니다. 인생이 달라집니다. 삶의 터전이 달라집니다.
아이들 동화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깊은 숲속 오두막집에 아기 돼지 삼형제가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엄마 돼지가 아기돼지들에게 ‘이제 너희도 컸으니 각자 자기 집을 짓고 살도록 해라. 꼭 기억할 것은 튼튼한 집을 지어야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삼형제는 각각 흩어져서 집을 지었습니다. 놀기만 좋아하는 첫째 돼지는 근처에 있는 짚을 모아 대충 초가집을 만들었습니다. 게으른 둘째 돼지, 근처에 떨어져있는 나뭇가지를 그냥 주어다가 엉성하게 나무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첫째와 둘째 돼지는 신나게 놀았습니다. 그러나 셋째 돼지는 형들과 달랐습니다. 벽돌을 가져다가 차곡차곡 쌓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첫째와 둘째 형들이 셋째를 놀려댔습니다. 셋째는 형들이 놀려대도 열심히 벽돌집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놀고 있는 두 아기돼지에게 늑대가 나타났습니다. 첫째, 둘째는 혼쭐이 나서 자기 집으로 도망갔습니다. 늑대가 따라갔습니다. 첫째 돼지 집에 쫓아가서 크게 한숨 불자 초가집이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둘째 집을 찾아갔습니다. 거기서도 힘을 다해서 크게 불자 나무집도 크게 휙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첫째와 둘째는 급히 셋째 동생 집으로 도망갔습니다. 이까짓 집 정도야 하고 늑대가 온 힘을 모아서 크게 불었지만 셋째 집은 꼼짝 하지 않았습니다. 손으로 밀어도 발로 차도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이들 동화이지만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신자됨의 핵심은 순종입니다. 순종이 있느냐 없느냐 여기에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순종하는 사람인지 아닌지에 따라서 그 사람이 진정한 기독교신자인지 아닌지 결정이 납니다. 기도 잘하고 찬송 잘하고 성경 좀 아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순종하는지 아닌지가 중요합니다.
두 번째, 순종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서 인생의 결과가 달라집니다.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지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46절~49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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