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상 3:3~18 )

분당소망교회 2017. 4. 14. 10:32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상 3:3~18  

 

어느 지방에 아지매에게 밉보이면 밥을 못 얻어먹지만 아재에게 밉보이면 아예 그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밉보여도 괜찮은 일이 있고 밉보여서는 안 될 일이 있습니다. 밉보여도 괜찮을 정도가 있고 밉보여서는 안 되는 정도, 넘어가서는 안 될 정도, 선이 있습니다. 또 밉보여도 될 데가 있고 밉보여서는 정말 안 되는 데가 있습니다. 그런 대상이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마태복음 12장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12:31)

사무엘 시대 때의 제사장 엘리도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2:25) 라고 이와 비슷한 말을 자식들에게 했습니다.

 

사무엘이 어렸을 때였습니다. 한 열두 살 정도 되었을 때인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밤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자고 있는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은 아직 어려서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신 줄 모르고 제사장에게 쫓아가서 말했습니다. 아마 할아버지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 부르셨습니까?’ 엘리는 자기가 부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째 또 부르셨습니다. 또 엘리에게 쫓아가서 자기를 불렀는지 물었습니다. 세 번째 또 부르셨습니다. 여전히 사무엘은 알지 못했습니다. 또 엘리에게 할아버지 부르셨습니까?’ 라고 하자 그제야 엘리가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엘리는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부르셨으니 다음에 한 번 더 부르시면 제가 여기 있으니 말씀하십시오.’ 라고 대답하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왜 열두 살밖에 되지 않고 말귀도 알아듣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무엘을 부르셨을까?’ 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7) 라고 그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제일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를 부르는 분이 하나님인 줄도 알지 못하는 사무엘을 세 번이나 계속해서 부르셨습니다. 모르실 리가 없는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부르셨을까요?

정말로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꼭 말씀하고 싶으신 것이 있으셨다면 아직 말귀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무엘을 부르실 것이 아니라 적어도 부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아는 엘리를 불러서 말씀해주고 그 말을 사무엘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으면 되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더구나 하나님께서 나중에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12)라고 하신 말씀으로 보아 사무엘에게 하고 싶으셨던 말씀은 제사장 엘리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 말씀을 사무엘이 아니라 엘리에게 하셨어야 할 텐데 왜 알아듣지도 못하는 사무엘을 계속해서 부르셨을까요?

 

그 이유는 너무도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와 말씀하시고 싶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보기 싫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인생 살면서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거기까지 가서는 안 됩니다.

과거 독재정부 시대 때 정부가 문학작품에 대해서 사사건건 간섭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참다못해서 여러 명의 작가들이 절필 선언으로 대항했습니다. 이런 정부 밑에서는 글을 못 쓰겠다는 것입니다. 작가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작가의 생명은 글 쓰는 것입니다. 목사의 생명은 설교하는 것,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 판사들이 나서서 이런 저런 소리를 많이 하는데 판사의 생명은 판결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판사가 나는 재판하지 않겠다, 목사가 나는 설교하지 않겠다, 작가가 글 쓰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나는 이 세상이 꼴도 보기 싫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작정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란 아무리 잘나도 남편에게 말을 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남편에게 이말 저말 해야 숨통이 트입니다. 아내라는 존재자체가 그렇습니다. 남성들에게 남성들의 존재성이 있는 것처럼 아내에게는 아내의 이런 존재성이 있습니다. 남편에게 말을 해야지 행복해지는 아내가 남편에게 말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말하고 싶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내 남편이 정말로 보기 싫다, 보기도 싫다는 절규입니다.

선지자 이사야 시대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해도 해도 너무 했습니다. 사사건건 불순종했고 불평이 많았고 불만이 심했습니다. 죄악이 너무 심했습니다. 하나님은 속상하셨습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 터질 것 같은 심정을 누군가에게는 말씀하셔야했는데 이스라엘 백성과는 말하기 싫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당신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그들과 이야기해야했지만 하나님은 그들과 말하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참다 참다 못해서 드디어 말씀하셨는데 말귀 알아듣지 못하는 하늘과 땅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1:2-4)

터질 것 같은 심정을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당신의 자식들이 아니라 하늘과 땅에 대고 소리치셨습니다 .

 

사무엘 시대에 엘리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이 이러했습니다. 말하기는 해야 하는데 말하시기가 싫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화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절대로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실수할 수 있고 심지어는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있어도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습니다. 그 선은 절대로 넘어서는 안 됩니다. 너하고는 말도 하기 싫다는 소리를 사람에게 듣는 것도 안 좋지만 하나님께는 더욱 듣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나 엘리는 그 도를 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도를 너무 넘어버리면 돌이키기 어렵습니다. 사람에게도 하나님에게도 이 부분은 명심해야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조금 울면 야단칠 수도 있지만 많이 울게 되면 정신 바짝 차려야합니다. 아이들이 밥 먹지 않겠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은 먹어야하는 존재인데 너무 화나면 밥을 먹지 않겠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이런 소리를 하면 정신 차려야합니다. 도를 넘게 되면 상처가 되고 마음속에 없어지지 않는 그 무언가가 생기게 되어 돌이키기 힘이 듭니다. 여기까지 가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것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떤 주인이 멀리 가는 종 세 사람을 불러서 각각 장사하라고 돈을 맡겼다. 그 중에서 두 사람은 열심히 장사해서 돈을 조금씩 남겼는데 한 사람은 장사하지 아니하고 그 돈을 파묻어두었다. 나중에 주인이 와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종이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25:24-25) 라고 아주 못된 말로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주인이 대노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25:30) 지시했다

순종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아주 악한 데 주인을 아주 못된 주인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 종은 주인이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 아닙니다. 아예 꼴도 보기 싫어서 내어 쫓기는 사람입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여기까지는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일이 엘리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제사장 엘리는 하나님이 자기를 젖혀놓고 사무엘을 부르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자기를 부르시지 않고 말귀 못 알아듣는 사무엘을 부르셨는지 알았던 것입니다. 아마 엘리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사무엘을 불러서 물었습니다. 무언가 큰 일이 있다, 무언가 나에게 단단히 화나셨다는 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가 사무엘을 불러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묻자 사무엘이 자세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멩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14)

자기 집을 멸망시키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난 뒤의 엘리의 반응입니다,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18)

하나님이 그렇게 결정하셨으면 그렇게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이 옳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합니다. 엘리가 그 심판 선언을 받고 난 뒤 이렇게 좋은 말, 아주 신앙적인 말을 했는데 정말로 그 대답이 신앙적인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얼른 보면 상당히 신앙적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주인이시므로 하나님이 작정하셨으면 이루어져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엘리의 이 반응은 아주 비신앙적인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엘리는 너무 몰랐습니다. 무엇을 몰랐는지 보겠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께서는 엘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사무엘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사무엘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엘리를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알게 됩니다. 그러나 나와는 말하기 싫어서 나를 부르지 않으시고 사무엘을 부르신 것을 얼른 알았어야 합니다. 제사장이라면 사무엘아, 사무엘아부르신 것이 엘리야, 엘리야라고 부르신 것이라는 것을 얼른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이라면서 세 번이나 불렀을 때쯤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도 사무엘을 부르신 것이라는 것까지밖에 알지 못했습니다. 엘리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신 것이라는 것을 얼른 깨달았어야했습니다.

두 번째, 자기 대신 말귀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무엘을 부르신 것은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정말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신 것은 나를 부르신 것인데 그렇다면 나에게 아주 중대한 것을 말씀하고 싶으시다는 것을 알아야 했고 자기가 할 것을 해야 했습니다.

세 번째, 마지막에 엘리가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알았습니다. 자기 집, 자기 집안, 자기 자식들에 대해서 저주하시고 심판하시겠다는 예언입니다. 여기서 그 예언이 하나님께서 꼭 그렇게 하고야 말겠다, 틀림없이 그렇게 되게 하고야 말겠다는 움직일 수 없는 하나님의 심정인지 하나님의 사람들은 알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 한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또 경고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경고인지는 몰라도 또 경고하시고 부탁하시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살면 내가 말한 그 무서운 심판 저주를 당할 수밖에 없다. 이제라도 돌이켜서 그 심판을 면하도록 하라는 안타까운 하나님의 호소입니다. 그것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처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삼상3:13)

누구 죄입니까? 아들들 죄입니까? 엘리의 죄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엘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것처럼 엘리의 집안이 멸망하게 된다면 결정적인 이유는 두 아들의 죄가 아닙니다. 이런 아들들을 두고도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은 엘리의 죄 때문입니다. 아버지들은 잘 알아야합니다. 책임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잘 알아야합니다. 엎드려야할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내 자식이 잘못되었거나 내 아내가 또 내 남편이 잘못되었을 때 엎드릴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도 이것에 실패했습니다. 두 형제가 제사를 지냈는데 동생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아주셨는데 가인의 제사는 받아주시지 않았습니다. 속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의 제사를 받아주시지 않고 용납하지 않으셨는지 분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4:6-7)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이것이 첫 번째 기회입니다. 이때 가인은 빨리 알았어야했습니다. 잘못이 무언지 몰랐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엎드렸어야했습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말귀를 못 알아들었습니다. 좀 더 분명하고 큰 소리로 말씀해주십시오.’ 라고 말하면 됩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아실 것은 엎드리는 것은 빨리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찾아가서 엎드리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 기회를 놓치고 더 악한 죄로 갔습니다. 정말로 악한 죄,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때도 하나님께서는 당장 심판하지 않으시고 한 번 더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4:9) 라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모르십니까?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때라도 가인이 하나님, 정말로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엎드렸다면 혹시라도 길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인은 이때에도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4:9) 라고 못된 대답을 했습니다. 결국 최종 심판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4:11-12)

인간 같은 삶을 살지 못하는 심판을 주신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은 죄 때문입니다. 다른 죄가 아닙니다. 혹시 벌을 줄지라도 돌이켰다면 멸망까지는 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돌아왔어야 했습니다.

 

이것을 잘 한 사람이 있습니다. 모세입니다. 출애굽하고 난 후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으려고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40일간이나 있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 오랫동안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한다고 다짐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금송아지를 신으로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단단히 화가 나셨습니다. 대노하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겠다’(32:9-1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멸망시키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가 너무 큽니다. 그때 모세가 즉각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32:11-13)

 

여러분도 이런 기도를 하십시오. 혹시라도 여러분의 아들, 딸이 잘못했을 때, 여러분의 주변에 있는 사람이 잘못했을 때, 남편이 잘못했을 때 이런 기도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원망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모세는 하나님께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32:32) 라는 기도까지 했습니다. ‘내 남편에게 벌을 주시려면 내 이름을 지워주십시오. 저는 내 남편과 같이 지옥에 가겠습니다. 같이 망하겠습니다.’ 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렇게 한다고 하나님께서 함께 지옥에 보낼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시고 즉각 당신의 뜻을 돌이키십니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라는 출애굽기 3214절은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대표 모세가 하나님 앞에 엎드렸기 때문에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던,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엘리는 여기에 실패했습니다. 그때 그것을 알고 빨리 엎드렸다면 달랐을 것입니다. 용서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1:1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주 들은 이 말씀을 유념해서 보십시오. 그냥 붉은 것도 아닌 주홍같이 붉은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나한테 오기만 하면 용서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도저히 씻기지 않을 것 같은 악한 죄라도 나에게 돌아와서 엎드리기만 하면 너 때문에 네 남편이 용서받을 것이고 네 자식들이 용서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나 더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돌아와서 엎드리면 용서만 하시고 끝내실 것 같습니까? 절대로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진실로 돌아오면 벌은 주되 벌과 다르게 어마어마한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이런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용서해주고 끝나는 정도, 조금만 무엇을 주고 끝나는 정도가 아니라 여러분이 확실하게 돌아오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면 옛날에는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이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복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다윗입니다. 엎드려야할 사람은 엎드리십시오. 그것은 여러분들의 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