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하나님의 신명 (사무엘상 7:5~14 )

분당소망교회 2017. 6. 29. 12:46

    

 

 

하나님의 신명

 

      

사무엘상 7:5~14  

 

재미있는 글이 하나 있습니다. 한 의학자가 자기가 연구하던 바이러스를 대신해서 편지를 썼습니다.

1969년 미국 공중 위생국장이 말했지. ‘이제 전염병은 대부분 끝이 보인다.’ 그 말을 듣고 우리 바이러스들은 코웃음을 쳤지.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얘기야. 인간은 영원히 우리 바이러스를 이길 수 없어. 우리 중 최고참이 감기야. 가장 오래되었지. 그런데 감기를 100% 치료할 수 있는 백신을 아직까지 개발하지 못했잖아? 우리의 생명력은 우리가 생각해도 대단해. 달라진 환경에 즉각 변이를 일으켜 적응하지. 설사 지구에 핵폭발이 일어나도 우리 바이러스들은 살아남을 거야. 우리도 인간과 공존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헤르페스 알지? 많이 피곤하면 입 주변에 작은 수포가 생겼다가 몸이 괜찮아지면 사라지지. 그게 바로 헤르페스야. 인간이 유일한 숙주이지. 그런데 헤르페스는 절대로 인간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하지 않아. 왜냐하면 숙주가 치명상을 입으면 우리만 손해니까. 에이즈도 비슷해. 1981년 발견되었을 때만 해도 감염자가 거의 다 죽었어. 그러나 지금은 수명이 5년에서 10년까지 늘었고 바이러스 독성도 30%부터 40%까지 약해졌지. 에이즈가 인간과 공존을 선택한 거야. 반면 에볼라는 멍청해. 이 친구는 파괴력이 너무나 강해서 감염된 인간들을 1주일 안에 모두 죽여 버렸어. 그 결과 자신들도 멸종되다시피 했지.

아이들 장난 같은 바이러스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깊이 새겨들어야할 말입니다. 특히 강한 사람, 있는 사람 즉 힘 있는 사람, 재산 많은 사람들이 깊이 생각해봐야합니다. 공존, 배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 무엇보다도 많이 생각해보아야할 말입니다.

 

이스라엘과 전쟁한 블레셋이 하나님의 궤를 전리품으로 빼앗아갔습니다. 그러다가 혼쭐이 났습니다. 온 나라가 뒤집어졌습니다. 온갖 방법을 써보아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이스라엘의 법궤를 다시 이스라엘로 돌려보내면 되겠다는 생각 끝에 긴가민가하는 심정으로 법궤를 다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자 블레셋의 그 큰 문제들이 다 해결되었습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이긴 것으로 만족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스라엘의 신인 하나님의 법궤까지 빼앗고 건드렸다가 전쟁에서 잘 이기고도 곤욕을 당했습니다.

한계를 알아야합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법궤 때문에 생긴 문제는 블레셋에서만 있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블레셋이 법궤를 돌려보낸 곳이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라는 지역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하나님의 궤가 자기 마을로 오니 너무너무 좋아하다가 그만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함부로 다룬 것입니다. 그러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변을 당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의 벧세메스 사람들도 블레셋 사람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궤는 화를 불러온다고 생각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그들도 하나님의 법궤를 이웃 마을로 보내버리고 맙니다.

그 다음 하나님의 법궤가 간 곳은 기럇여아림이라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블레셋이나 이스라엘의 베세메스에서는 큰 재앙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변을 당했는데 기럇여아림에는 전혀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지 그것을 잘 보아야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귀하게 여겼고 하나님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삼상 7:1)

 

잘 아십시오.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그 사람을 멸시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도 그 사람을 귀하게 여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은 믿는 사람들, 기독교인, 이스라엘 사람들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입니다. 믿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들 똑같이 하나님을 멸시하면 하나님도 그 사람을 멸시하고, 설사 믿지 아니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면 하나님도 그 사람을 귀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궤가 당신 스스로 애를 쓰고 힘을 쓰고 역사하셔서 이스라엘로 돌아왔는데, 돌아온 하나님의 궤를 사모하는 사람, 귀하게 여기는 사람, 찾는 사람, 아쉬워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냥 보고 끝내버렸습니다. 그 세월이 20년입니다. 20년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무도 하나님의 궤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찾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20년이 지나고 난 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모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귀하게 여기던 하나님의 궤가 돌아왔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20년 동안 귀하게 여기지 않다가 20년이 지나고 난 뒤 왜 귀하게 여기고 사모하게 되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신을 차려서 그런가? 그랬으면 참 좋겠지만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아쉽게도 지난번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난 뒤 계속해서 블레셋의 압제를 받아왔는데 이제는 그 압제 수탈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고 고달파서 하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동안 블레셋의 압제에서 벗어나려고 모든 노력을 다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죽도록 고생만 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방법이 없어서, 살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어떻게 하다 하다 안 되어 마지막 죽을 때가 되어서 하나님을 찾는가? 이런 사람들에게 옛날 이스라엘인들이나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8:18)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 기독교인들이 고통당하는 것, 어려움을 당하는 것, 무거운 짐에 눌려 사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프십니다.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 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8:18-2) 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탄의 소리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바보 같은가? 길르랏에 와서 유향을 얻어서 치료하면 나을 텐데, 의사에게 와서 치료하면 나을 텐데, 그 의사인 나 하나님이 있지 아니한가? 왜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하고 마지막에 와서야 살려달라고 돌아오는가?’ 라는 한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이 미련함은 한 시대만의 일이 아닙니다. 늘 그래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하나님 믿는 사람조차 평소 좋을 때는 찾지 않습니다. 그러다 급한 일이 있고 답답한 일이 있고 절박한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을 찾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버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삽니다. 그런데 뒷방에 모셔놓고 쳐다보지 않습니다. ‘절대로 나는 하나님을 버리지 않습니다.’ 라는 말을 하려고 하나님을 떠나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 소리를 하려고 뒷방에 모셔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아무리 나를 버리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너희들은 나를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사사기 전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사기 3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3:7)

평안하고 아무 일이 없으니 악을 행하고 좋은 곳을 찾아가서 즐겼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동안 섬겼더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3:8-9)

좋을 때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가서 여기저기 즐기다가 힘들어 도저히 견디지 못하니까 하나님을 찾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살만하게 되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3:12).. 이들은 또 죄를 지었습니다.

이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자손을 모아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암 왕 에글론을 열여덟 해 동안 섬기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3:12-15)

이스라엘 자손들은 18년 동안 압제를 당하고 나니 죽을 맛이었습니다. 이때서야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챙겨주셨습니다. 그러자 또 이어지는 이들의 행실에 대해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4:1-3)

살만하니 또 하나님을 찾지 않고 떠나서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죽을 고생을 하고 난 뒤에서야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이렇게 살려두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6:1).. 또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주시니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6:1-2)..

다 빼앗겼기 때문에 이들은 마을에 살지 못했습니다. 이때의 이들의 모습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치러 올라와서 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 먹을 것을 남겨 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짐숭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 메뚜기 떼같이 많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낙타가 무수함이라 그들이 그 땅에 들어와 멸하려 하니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6:3-6)

 

이렇습니다. 편하고 괜찮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고 마음대로 여기저기 다니면서 즐기다가 죽을 맛이 되어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어떻게 보면 좀 괘씸합니다. 많이 미울 것 같습니다. 내 자식이라도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 그런 나라를 하나님께서는 미워하지 않으십니다. 괘씸하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때서라도 찾아오기만 하면, 돌아오기만 하면 받아주고 또 받아주십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입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기하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작은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아직 돌아가실 때가 멀었는데 아버지에게 유산을 나누어달라고 졸라대었다.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아들의 몫을 떼어서 주었다. 그 작은 아들이 그것을 가지고 먼 나라에서 허랑방탕하게 탕진하고 말았다. 먹을 것이 다 떨어졌다. 심지어 돼지치기를 하면서도 돼지가 먹는 돼지죽도 제대로 얻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때서야 이 작은 아들이 아버지를 생각했다. ‘내 아버지 집에는 하인들이 먹는 것도 넉넉했는데 나는 여기서 돼지죽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는구나. 이제라도 아버지 집에 가서 아들로가 아니라 하인으로 받아달라고 하자.’ 이 아들이 아버지 집에 돌아갔다. 아버지가 저 멀리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작은 아들인줄 알아보고 뛰어나와서 안고 입 맞추고 받아들였다.‘

저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아버지가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쫓아나가는 장면이 그려집니다. 젊은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는 먼 곳에서 제대로 잘 보지도 못하는 늙은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차리고 뛰쳐나갔고, 아들을 위해 잔치까지 벌여주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이야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대로 있었습니다. 20년 동안 하나님을 나 몰라라, 마치 모르는 분처럼 생각하다가 죽을 정도가 되어서야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바르게 살아야지, 신앙생활 제대로 해야지 생각했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삼상7:3-4)

이들은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새 생활이 시작되었고 믿음 안에서 삽니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삼상3:6)

여기서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렸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종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 시작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럴 때 꼭 일이 생깁니다. 마음 다잡고 제대로 내 가정을 챙기고 신앙생활 하고 봉사하고 헌금생활 하려고 새롭게 시작할 때 꼭 일이 생깁니다. 이스라엘도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삼상7:7)

신앙생활 제대로 하려고 했습니다. 다른 마음을 먹지 않았습니다. 바르게 살려고 했습니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와서 내 가정을 지키고 내 아내를 사랑하고 교회에서 봉사도 하려고 했는데 어려운 일이 생깁니다. 자주 이런 일이 생겨납니다. 이때 그런 시험이 오는 이유를 알아야합니다. 어둠이 여러분들을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고 정직하게 살고 깨끗하게 살고 더 가정적으로 살고 신앙생활 제대로 하려고 하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정을 파괴시키고 여러분 마음을 어둡게 하고 어떻게 하든 하나님으로부터, 교회로부터 멀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어둠은 계속해서 여러분들을 흔들어댑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교회로부터 멀어지면 별로 손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런 것을 미리 알면 괜찮습니다. 모르면 당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신앙생활 제대로 하려고 했던 것이, 내 가정을 더 챙기려고 하던 것이, 내가 바르게 살려고 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다 저 멀리 떨어지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것을 생각하시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정말로 큰 복을 받는 것, 진정한 구원 받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것까지 알아야합니다. 내가 가정에 돌아오고 신앙생활 좀 하니 하나님께서 얼른 내 회사를 회복시켜주시고 건강을 회복시켜주시고 나에게 복을 주실 것 같지만 금방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끝까지 견디어 나가야 합니다. 이겨 나가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시험을 잘 이겨냈습니다. 그 위기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때만큼은 하나님을 믿어보아야 소용없더라, 돌아가 봐야 소용없더라.’ 라고 생각하면서 주저앉거나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의 종을 찾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삼상7:8)..

신앙을 붙들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신앙으로 간다, 신앙 때문에 위기가 닥쳐도 우리는 신앙으로 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성경을 보면 우리 하나님도 신명이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신명이란 흥겨운 신이나 멋’, 기분 좋으면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신명나시면 당신의 신명을 이기지 못하시고 우리가 생각하기에 도를 넘는, 한계를 넘는 일까지 하십니다. 스바냐 3장이 말씀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나님이 신명나시면 우리가 깜짝 놀라게 됩니다. 어떻게 이렇게 까지 챙겨주시는가? 이렇게까지 복을 주시는가? 이렇게까지 응답하시는가? 이런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주시려고 작정하시면 막 퍼부어주십니다. 이렇게 한 번 살아보십시오. 하나님을 신명나게 한 번 해보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물론 믿는 여러분들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까지 신명이 나십니다.

문제는 하나님도 신명나고 싶어 하시지만 신명나게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때문에 신명나기 원하십니다. 여러분 가정 때문에 신명나기 원하십니다. 그렇게 힘든 것이 아니고 그렇게 특별히 잘해야 하나님께서 신명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20년 동안 하나님을 찾지 않다가 찾기만 해도 하나님은 신명나셨습니다. 평소에 괜찮게 살아왔는데 조금만 더 잘하면 하나님은 깜짝 놀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집나간 탕자 이야기하실 때에도 하나님의 신명을 살짝 비추셨습니다.

이때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온 작은 아들을 아버지는 그냥 받아주시기만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온갓 것을 다 해주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라고 지시하였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라고 하였고,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고 말했다. 그것은 사실 여러 사람 눈에 좀 과한 것이었다. 그래서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제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기면서 불순종하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그런 나를 위해서는 한 번도 염소새끼 한 마리도 제대로 잡아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재산을 창녀들에게 탕진한 동생이 돌아오니 나에게는 한 번도 해주지 않았던 그 귀한 송아지까지 잡을 수 있습니까?’ 라고 항의할 정도였다.‘

그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신명이 있는 분이십니다.

 

20년 동안 하나님을 찾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랬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너무 오래 찾지 않아서 죄송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서가 아니라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밉다 하지 아니하시고 얼른 받아주셨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이런 이스라엘이라면 괘씸해서라도 도와주실지라도 한참 있다가 도와주시고 해결해주실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즉각 그 자리에서 일어서셨다는 것이 성경 말씀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희한하게 이때 침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볍게 물리치셨습니다. 그동안 아무런 힘도 없던 이스라엘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20년 동안 압제를 당하고 눌림을 당하면서 한 번도 평화, 샬롬이라는 것을 누리지 못하다 20년 만에 샬롬을 찾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20년 전 전쟁에 져서 빼앗겼던 많은 땅을 다 찾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10)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삼상7:10-11)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13)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삼상7:13-14)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이 나셔서 당장 급한 것, 필요한 것, 해달라고 하는 것 다 해주는 거기에 더해 요구하지 않은 것까지 다해주셨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을 생각하면 좀 딱합니다. 지난번에 전쟁에서 이겼다면 그것으로 끝냈으면 좋았을 텐데 이스라엘의 궤까지 빼앗아 가서 곤욕을 당했습니다. 20년 동안 조공을 잘 받아왔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서 다만 신앙 잘하겠다고 제사를 드리는데 식민지를 더 탄탄하게 하기 위해서 침공해왔다가 그만 20년 동안 잘 수탈해왔던 이스라엘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가만히 보면 하나님이 연출하신 것 같습니다. 하필 그 때 쳐들어오게 만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도록, 참된 평화를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물밑에서 다 연출하셨습니다. 가만히 있는 블레셋을 칠 수 없어서 꼬드겨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쳐버리셨습니다.

 

바다에 사는 바다 달팽이들이 잘 살다가 자주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평소에는 바다 속 해저 동굴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멀쩡하게 바다 속에서 잘 살다가 갑자기 바다 속을 빠져나와서 바다 위에 있는 바위 위로 기어 올라갑니다. 그러면 날아다니면서 쉴 곳을 찾던 갈매기들이 바위 위에 바다 달팽이들을 보게 됩니다. 쉬기도 하고 먹을 것이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갈매기들은 바다달팽이를 먹을 때 웬 떡인가 생각하면서 맛있게 먹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웬 떡이 아닙니다. 바다달팽이 속에 있던 기생충은 때가 되면 이상한 물질을 뿜어냅니다. 그러면 바다달팽이들이 정신을 잃게 되고 몽롱하게 되어 뭍으로 올라갑니다. 그걸 갈매기가 얼른 집어먹습니다. 사실은 바다달팽이 속에 살던 기생충이 지금까지 바다달팽이를 먹고 살다가 다른 것을 먹고 싶어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의학자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의학자들도 모르고 우리도 모릅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이런 일을 하십니다. 사람에게도 하십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렸습니다. 그 악한 일을 자기 형님들이 했습니다. 아무리 미워도 자기 동생을 그렇게 팔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처음에는 살만했습니다. 거기서 요셉은 신앙을 지키려다 누명을 덮어쓰고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신앙 지키려고 했으니 하나님께서 챙겨주셔야 하는데 안 챙겨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감옥까지 들어갔습니다. 좋은 바가지는 계속해서 좋은 바가지입니다. 요셉은 감옥에 들어가서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장관 급 사람이 감옥에 들어왔습니다. 요셉이 그에게 있던 어려운 문제를 풀어주자 그 장관은 자기가 나가기만 하면 요셉의 억울한 일을 풀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풀려난 장관은 요셉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일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39:23)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말이 안 됩니다. 이렇게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형통입니까? 그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고 죽을 일을 당했는데 어떻게 형통합니까?

그런데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요셉을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단면만 보면 안 됩니다. 길게 보아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감옥 속에 있던 요셉을 일으켜서 나이 서른에 당시 세계 최강국 이집트의 총리로 세웠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먼저는 그렇게 귀한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높이 세우기 위해서 연출하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집트의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을 것 같기에 그 사람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구원하기 위해서 그 모든 일들을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 주위의 많은 나라들이 이집트 때문에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다시 하나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20년 동안 다른 곳에 있던 하나님의 법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왔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그렇게 수탈당하고 압제당했는가? 20년이 지난 이제와서야 해방되고 영토를 되찾게 되었는가? 사무엘이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법궤 위에 계신 하나님, 사무엘 뒤에 있는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잘 아십시오. 하나님의 법궤도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그런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만 그런 일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위대한 이 기적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분은 그 어느 누구도 아닌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형태이든지 간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의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이 하나님을 이스라엘이 진작 찾았다면 20년 블레셋 고통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더 빨리 찾으면 찾을수록 복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