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한 기독교
마가복음 7:5~14
무척이나 가난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도 제대로 살 수 없을 만큼 가난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느 날 아주 희한한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물건을 사면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 돈을 받는 나라였습니다. 신이 났습니다. 마음껏 물건을 샀습니다. 그동안 사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서 사지 못했던 물건을 다 샀습니다. 거기다 돈까지 받으니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물건을 살 때마다 받은 돈이 너무 많이 쌓인 것입니다. 처치가 곤란했습니다. 이제는 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먹을 음식도 살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길거리에서 거지를 만났습니다. 옳구나 싶어서 거지에게 돈을 주려고 했습니다. 거지가 깜짝 놀라서 펄쩍 뜁니다. 그렇지 않아도 돈이 너무 많아서 거지가 되었는데 자기 돈을 가지고 가달라고 오히려 부탁하는 것입니다. 큰 집을 사서 돈을 쌓아두면 되겠다 싶어 집을 보러 갔습니다. 큼직한 집이 하나 나왔습니다. 주인이 반갑게 맞이합니다. 집값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집 산 값으로 돈을 받으면 그 집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 집 사는 것을 포기합니다. 그래서 돈을 버리려고 했습니다. 버리려고 하자 가는 곳마다 버리지 못하게 합니다. 마지막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깜깜한 밤 아무도 보지 못하는 밤에 나가서 쌓인 돈을 버리겠다고 생각하고 밤중에 나갔습니다. 돈을 버리려고 하는데 경찰이 나타나서 도둑 현행법으로 체포한다고 수갑을 채웠습니다. 자기는 한평생 정직하게 살았고 도둑질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다고 발버둥 치다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오래전 이스라엘에 희한한 법이 있었습니다. 채권자가 자기에게 빚진 사람에게 자기 채권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기만 하면 채무자는 벌벌 떨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빚을 갚아야하는 법이었습니다. 이유는 그 선언으로 자기가 빚을 갚아야할 대상자가 채권자에서 하나님으로 바뀌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빚을 갚지 않는 것이 사람에게 빚을 갚지 않는 것보다 훨씬 형벌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에게 빚을 갚지 않으면 1년 동안 감옥에 갈 것을 하나님께 빚을 갚지 않으면 10년 동안 감옥살이 했어야했습니다. 심지어 사형을 당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 법의 원래 취지는 나름 의미가 있었습니다. 어느 법이나 법은 항상 선한 마음에서 만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법을 악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법을 악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채권자의 선언으로 이제는 하나님께 빚을 지게 된 채무자가 죽을 힘을 다해서 빚을 갚습니다. 그러면 채권자는 자기의 채권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한 그 서원을 취소해버리고 채무자가 갚은 돈을 찾아가버립니다. 그 경우 약간의 헌금을 벌금조로 바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 일로 성전에서는 의외의 돈이 생겼습니다. 그런 사기 같은 일로 말미암아 교회에 돈이 생기게 됩니다. 나중에는 채권자와 하나님의 집, 소위 교회가 그 좋은 법을 이제는 아예 악용하는 법으로만 사용했습니다. 그 좋았던 법이 하나님을 돈 받아내는 악덕 조폭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심지어는 이 법을 자기 부모에게 악용하는 일까지 생겨났습니다. 예를 들어 연로하신 부모님에게 돈이 필요합니다. 상당히 재력 있는 자식이 있었지만 그 자식이 부모에게 돈을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법을 이용하기로 작정합니다. 자기 전 재산에 대해서 ‘고르반’이라고 선언해버립니다. 내 재산은 전부 다 하나님께 바쳤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부모는 그 자식에게 돈을 요청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식이 상당한 재력이 있지만 그 모든 재산이 자기 자식의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재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그 부모님이 고생고생 하다가 돌아가십니다. 돌아가시면 그 못된 자식은 고르반을 취소해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약간의 벌금조의 헌금을 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이런 악한 일이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 비일비재했습니다. 돈 있는 사람에게 좋고 사원에 좋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에게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슬펐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돈 없는 사람과 함께 하나님 가슴은 쓰라렸을 것입니다. 이 일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을 종교지도자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부추기까지 했다는 사실입니다.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11-13절)..
종교지도자들이 그렇게 악한 일을 한 까닭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위 인사라고 말하는 사례비 때문입니다. 사원에 돈이 들어가는 것 말고도 그렇게 가르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재산이 날아가고 돈도 못 받을 뻔했는데, 또 돈을 부모님께 드릴 뻔했는데 이만큼 절약했다고 인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벌금이나 헌금이외에 그렇게 드렸습니다. 성경은 이런 것을 가리켜서 ‘더러운 이득’이라고 말씀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욕심에 사로잡히면 남아나는 것이 없습니다. 스님이 고기 맛을 알면 법당에 파리가 남아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기독교는 더합니다. 기독교의 탐욕은 무섭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더 기도해야합니다. 물론 목회자 당사자들이 이를 악물고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하지만 잘 아십시오. 목회자 한 사람의 결심, 결단 그리고 기도 그 가족들의 기도만으로는 역부족입니다. 어둠이 무척이나 강하게 종교지도자들을 유혹하고 무섭게 공격합니다. 그 하나만 넘어지면 많은 사람들이 따라서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눈을 뜨고 이 나라를 보면 그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괜찮았던 하나님의 종들이, 쓸 만했던 하나님의 종들이 이렇게 넘어지고 저렇게 무너지는 까닭이 그 사람이 악하고 못나서만은 아닙니다. 어둠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목회자를 위해서 특별히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죄와 악에 넘어가지 않고 이기도록 특히 욕심에 지지 않고 이기도록 기도해주십시오. 나이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한 살 한 살 들어가면서 자꾸 욕심에 사로잡힌다, 강하게 욕심이 밀려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교묘하게 다가옵니다.
10년 쯤 지났지만, 외국에 사는 신자 한 분이 저를 위한 기도문을 보내왔습니다.
「하나님, 김태근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드립니다. 목사님을 항상 행복한 목사님으로 만들어주세요.」 여기까지는 듣기 괜찮습니다.
「다소 몸이 고단하셔도 그것이 행복으로 바뀌게 해주시고, 머리 아픈 일들을 만나도 일할 수 있는 행복감으로 모든 힘든 일들을 처리하게 해주시고, 항상 어디나 있는 골치 아픈 교인들의 항의나 불평을 들어도 모든 것을 수용하는 자리에 있는 것을 행복으로 생각하게 해주십시오. 세상이 어지럽고 권세 있는 사람들이 다루지 못해도, 교회 안의 많은 사공들을 말리느라 진이 빠지도록 힘들어도, 교인들이 목사님을 슈퍼맨이나 기계처럼 생각하며 무리한 요구를 해도 혹은 너무 신격화를 하며 시험에 들 지경으로 공경해도, 어렵고 힘든 많은 사람들을 역부족으로 방치할 지경이 되어도, 아무리 바른 길을 가르쳐도 험한 길 위험한 길을 기웃거리다가 만신창이 되는 어리석을 사람들로 가슴이 까맣게 타버릴 때도 언제나 하나님께 무릎을 굻으면 행복한 마음을 주십시오. 행복한 한 방울의 사랑을 그 마음에 심어주시어 늘 행복한 목사님으로 그 얼굴이 항상 밝아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게 되도록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문이라기보다는 이런 목사가 되라는 강력한 주문이고 협박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시기를 이 시간에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고귀하고 고상했고 거룩했던 분들 가운데 그 욕심을 이기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적지 않게 보게 되는데, 그렇다면 저처럼 못난 사람은 더욱 그런 욕심에 넘어질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러분들에게 더 각별하게 부탁드립니다. 다만 여러분들이 저를 위해서 하려면 이렇게 복잡한 기도를 안 하셔도 됩니다. 간단하게 부탁드려야 기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부탁드립니다. 하나는 ‘욕심을 이기는 목사가 되게 해주십시오.’ 또 하나는 ‘겉과 속이 같은 목사가 되게 해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가장 실제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이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종교만 남았습니다. 돈 버는 수단으로서의 종교, 권세부리는 수단으로 종교, 사람들에게 인사 받는 수단으로서의 종교만 종교지도자들에게 남았습니다. 그들의 속에 있는 것이라고는 거짓뿐이었고 위선뿐이었고 탐욕뿐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내 속에 있는 거짓, 탐욕, 어둠을 숨기기 위해서 겉으로는 더 아닌 척 합니다. 더 거룩한 척 합니다. 더 밝은 것처럼 합니다. 욕심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합니다. 더 진실한 사람처럼 행동하고 그렇게 보입니다. 저 자신도 이렇다는 생각을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많이 느끼게 됩니다.
이런 위선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강하게 책망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 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23:27) 라고 한탄하시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무덤은 우리나라 무덤처럼 되어 있지 않고 평토장으로 돌로 되어 있고 페인트칠이 되어 있어서 아주 아름답게 꾸며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은 결국 시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유대종교지도자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는 유달리 엄격했습니다. 엄격해야 자기들은 사람들 눈에 그러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일도 그런 것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 종교지도자들이 왔습니다. 왔다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 씻지 않고 음식 먹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왔으면 좋은 말씀을 배우고 깨달을 것은 깨닫고 돌이킬 것을 돌이키면 좋으련만 악한 사람들은 그게 잘 안됩니다. 내 목적만 생각하고 악한 눈으로 지적할 일만 보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식사 전에 반드시 손을 씻어야했습니다. 율법이었습니다. 세상사는 법이 아니라 율법에 그렇게 정해져있습니다. 식사 전에도 손을 씻어야했고 음식이 바뀔 때마다 손을 씻어야합니다. 처음에 양 손가락을 위로 올립니다. 시중드는 사람이 물을 몇 방울 떨어뜨리면 그 물을 받아 손을 비비고 그 다음에 손을 뒤집어 팔목을 내밀면 거기다 물 몇 방울을 떨어뜨립니다. 그것이 끝입니다. 물은 그 용도로만 준비되어 있는 물이라야 합니다. 다른 용도의 물은 안 됩니다. 그릇, 물까지 다 따로 준비해야합니다. 이렇게 씻지 않을 때는 문제가 생깁니다. 율법을 범한 사람, 하나님을 거역했다, 하나님께 불순종했다는 무서운 죄를 지은 사람이 됩니다. 죄를 지은 사람, 부정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은 그런 물이 아니라 당장 먹을 것이 없습니다. 하루에 두 끼 먹기도 힘든 사람이 무엇으로 그런 물을 준비할 수 있습니까? 그 결과 가난한 사람들은 모두 율법 즉 하나님의 법을 어긴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죄인이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율법의 저주를 받을 사람이 되고 맙니다. 악령의 밥이 되고야 말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 사람들은 앞으로 병에 걸려야할 사람, 더 가난하게 되고야말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어느 곳에도, 성경의 어느 곳에도 하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끊임없이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반 서민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법을 만드신 줄 알고 다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자기네들은 당연하게 그렇게 율법의 저주를 받아 계속해서 가난하게 살아야할 사람들이고 병에 걸려도 마땅한 사람들이고 사람취급 받지 못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있는 사람들, 가진 사람들, 힘 있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유대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그 좋은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께 와서 흠잡을 것 없나 보다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 씻지 않는 것을 보고 항의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바리새인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막7:1-3)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막7:5)
그 항의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막7:6-7) 라고 시면서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8절)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막7: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당신네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전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이름을 빙자하고 하나님 이름을 이용할 뿐이라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기독교 실용주의입니다. 기독교 실용주의는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인가 아닌가는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이것이 나에게 어떤 이익이 있는가? 이것이 나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가?’ 입니다. 전부다 자기와 관계되는 것입니다. 너무 계산을 많이 합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은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실용주의에 점령되면 남는 것은 망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망하는 기독교가 되고, 망하는 교회가 됩니다. 덩치는 크고 사람들도 많고 재력도 많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하나님과 관계없는 이미 망한 교회입니다. 찬송도 잘하고 기도도 잘하지만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미 망한 기독교인입니다. 망한 신자입니다. 참된 행복이 없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망한 기독교, 망한 교회, 망한 신자가 되고 맙니다.
과거 이스라엘이 망한 까닭이 이 실용주의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 스스로는 확실하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들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다, 다만 꼭 필요할 때마다 잠시 하나님을 뒤로 제쳐두고 이것을 우선하고 저것을 우선하고 바알도 믿었고 아세라 이방신을 섬겼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잠시 제쳐두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여러분들이 나를 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들은 망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유대인들은 한 번도 지지 않고 하나님께 또박또박 대꾸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로 버리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라고 항변했습니다. 이런 일이 수없이 되풀이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선지자를 보내서 말씀하셨고 저 선지자를 보내서 또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끝까지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완전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3,000년 이상 나라 없는 민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역사상 그보다 더할 수 없는 끔찍한 학살을 당한 민족 유대민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순진합니다. 참된 기독교인들은 순진합니다. 바보처럼 순수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바벨론 신상에 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용광로에 던져질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 때 그 세 사람을 아끼던 바벨론 왕이 마지막으로 이제라도 한 번 절하기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때 세 사람이 “왕이시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절대적으로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고 하더라도 왕께서 말씀하시는 저 신상에 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럴 때 이 사람들은 행복했습니다.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행복이, 인생의 의미가 이 때 이 세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관계없었습니다. 살아도 이 행복이 있었고 죽어도 의미가 있었습니다.
기독교 큰 어른 폴리캅이 그러했습니다. 역사가 필립 쉐프(P. Sohaff)는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의 최후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처형자들은 그를 채찍으로 몹시 때렸으며 마침내 불태웠다. 신체의 극히 내부에 있는 내장까지 환하게 드러났다. 처형자들은 미처 타지 못했던 신체를 창끝에 걸어 놓고 야수의 밥으로 던져 버리고 말았다. 그 폴리캅이 화형에 처하기 직전에 있었던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로마 총독이 말했다 “네가 만약 로마 황제를 숭배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지금까지의 이 박해를 그만두고 특별히 대우하겠다.” 총독의 그 제안에 폴리캅은 이렇게 대답했다. “86년간 나를 해침이 없이 나에게 성실하셨던 나의 왕, 나의 주님, 그분을 지금 이 나에게 부인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나의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본래 기독교이고 이런 사람이 진짜 기독교인이고, 기독교의 행복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멋은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의 엔도 슈사코의 소설 <침묵>에 나가사키 영주인 이노우에가 등장합니다. 기독교인을 색출해서 처형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어떤 사람이 기독교인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이 영주는 ‘후미에’라는 사상조사법을 고안합니다. ‘후미’는 밟는다는 뜻이고 ‘에’는 그림입니다. 판자에 예수님의 얼굴을 새깁니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밟고 지나가게 합니다. 밝고 지나가면 그 사람은 처형되지 않고 삽니다. 그러나 밟지 않으면 처형됩니다. 그런데 사실 그 법은 영주가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들을 처형시키지 않고 살리기 위해서 고안한 것이었습니다. 판자 속에 있는 그림 밟는 것이 큰 대수가 아니니 까짓것 밟고 될 수 있으면 많이 살라는 심정으로 그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영주는 깜짝 놀라게 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을 줄 몰랐다고 합니다. 꾀도 요령도 부리지 못하는 바보 같은 순진함입니다.
물론 그렇게 살다보면 힘듭니다. 때로는 고통스러울 때도 있고 손해도 많이 봅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의 멋이고 행복입니다. 그 순진함에 권세도 있고 능력도 있습니다. 이것도 얻고 저것도 얻고 다 얻으려고 하다 보니 이것 저것 다 놓치는 것입니다.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은, 내가 지금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놓아버릴 때, 포기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이 순진함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의 최고의 가치 힘과 권세와 삶의 의미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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