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겸손의 종교 (사무엘상 8:1~9 )

분당소망교회 2017. 6. 29. 12:47

 

 

겸손의 종교

 

 

사무엘상 8:1~9

 

 

얼마 전에 변호사들의 모임인 변호사회가 대법원 판사 출신 변호사가 제출한 변호사 개업신고를 거부했습니다. 변호사를 위하는 변호사협회가 그 개업신고를 거부한 이유가 있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법원 판사 출신 변호사가 개업하면 다른 변호사들의 일감이 줄어듭니다. 대법원 판사 출신 변호사가 개업하면 다른 변호사들의 수입이 줄어드는 이유는 소송 의뢰인들이 대법원 판사 출신 변호사에게 몰리기 때문입니다. 대법원 판사 출신에게 사건을 의뢰하면 돈이 많이 듭니다. 조금 많이 드는 것이 아니라 아주 많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몰리는 까닭이 있습니다. 현직 판사, 검사들이 대법원 판사 출신 변호사들에게 전관예우를 하기 때문입니다. 전관예우란 무엇인지 짚어보아야 합니다. 현직 판사, 검사들이 이전에 판검사를 하다 퇴직하고 변호사를 하고 있는 선배들에게 예의를 갖추어서 대우하는 것입니다. 말 자체는 아주 좋은 것 같습니다. 후배들이 선배들을 잘 대우한다는 것인데 그러나 전관예우야말로 최악의 범죄입니다. 그것이 민사재판이라면 전관예우 때문에 이익을 받는 소송당사자가 있지만 한쪽에서 이익을 받게 되면 상대방 소송 당사자는 피해를 보게 됩니다. 전관예우 때문에 피해를 당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부당하게 말입니다. 그것이 형사재판이라면 돈 없는 사람은 처벌됩니다. 돈이 있든 없든 죄를 지었으면 처벌받아야합니다. 문제는 돈 있는 사람들이 많은 돈을 들여서 비싼 변호사를 사게 되면 그것 때문에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거나 형이 많이 줄어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소위 유전무죄 유전무죄의 범죄를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법학대학원의 한 교수는 전관예우는 그 행위의 주최가 판검사 출신 변호사가 아니라 현직 판사, 검사이다. 전관예우의 본질은 본질적으로 법원과 검찰의 문제이다.’ 더 직설적으로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 원로 변호사가 전관예우는 전직과 현직 판검사들의 합작에 의한 범죄행위이다.’ 또 아주 시원하게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 시민이 변호사와 브로커의 불법행위가 아니라 전관예우라는 미명아래 불법을 합법으로 봐준 현직 판사, 검사가 처벌받아야할 주범이다.’

국민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합니다. 사실 전문가들은 다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못합니다. 또 자기 자신의 문제 때문에 그런 말을 한다고 오해하기 때문에 이렇게 시원하게 말하지 못합니다. 전관예우 때문에 어떤 문제가 생긴다면 현직 판사 검사들이 처벌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변호사 탓을 하고 있습니다.

 

재판에 관해서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보겠습니다. 성경은 재판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것인 재판을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맡겨주셨는데 하나님 대신 재판을 하는 사람들은 정의로 재판해야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어느 정도 정의로 재판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이 돌보아주는 대상으로 삼고 아끼는 사람들이 바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의 재판에 대해서도 가난한 사람들의 재판이라고 봐주어서 안 된다고 할 정도로 정의롭게 재판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117절은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이라고 말씀하시고 레위기 1915절에서는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라고 말씀하십니다.

불공정하고 부당한 재판을 한 사람은 정의로우신 하나님을 악한 하나님으로 만드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죄악 중에서 최악의 죄를 짓는 사람입니다. 고위층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야하겠지만 특별히 재판에 관련된 사람들은 이 부분을 잘 알아야합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온 이스라엘의 사랑과 백성들의 존경을 받은 하나님의 위대한 종 사무엘의 자식들이 이 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사무엘이 나이가 많아 후임으로 자기 두 아들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웠습니다. 사사의 주역할은 재판입니다. 사사라는 말이 재판관이라는 뜻입니다. 사사들은 평시에는 주로 재판을 하다가 전쟁이라든지 비상사태가 생기면 국가의 최고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사무엘의 두 아들 사사가 재판을 할 때에 뇌물을 받고 부정하게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삼상8:3)

사무엘의 두 아들이 얼마의 뇌물을 받고 얼마나 부당한 재판으로 인해서 축재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어마어마하게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일에 있어서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생각할 때는 아주 공정하고 정당하게 잘 합니다. 그런데 막상 내 일이 되면 공정성을 잃어버리게 되고 내 일에 파묻히게 됩니다. 부디 여러분들은 그렇게 안 되기 바랍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내 생각 때문에 어떤 문제를 일으키고 어떤 파장을 일으키고 영향을 주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브렉시트에 대한 영국의 국민 투표가 그렇습니다. 이미 영국국민들 중 120만 명이 다시 국민투표를 하자고 서명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브렉시트 하자는데 표를 던졌지만 정작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투표했다고 합니다.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이 두 아들이 뇌물을 받고 축재를 했는데 그 문제가 얼마나 큰 문제를 일으켰는지 짚어봅니다. 첫 번째는 온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고 신망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어른이신 자기 아버지 사무엘의 명예를 땅에 추락시키고 말았습니다. 한 나라의 어른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지금 우리나라의 큰 문제는 어른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치계도 없고 종교계, 경제계도 어른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에 오랜만에 어른이 생겼는데 두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그 어른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말았습니다.

 

또 하나는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셨습니다. 이 나라를 하나님 대신 사람이 다스리는 나라로 만드는 불행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이 어떤 불행인지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가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삼상8:17)

이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사무엘 두 아들들이 뇌물을 받아서 결국 빌미를 만들어서 이렇게 만들고 만 것입니다.

 

최근 뉴스를 보았을 것입니다. 부실기업에 얼마나 많은 돈을 집어 넣었습니까? 여러분들의 세금입니다. 넣어야할 곳에는 넣어야합니다. 그러나 넣지 말아야할 곳에 높은 사람, 아는 사람이 있다고 넣어서 세금으로 살아야할 많은 사람들이 살지 못하고 일어서야 할 사람들이 일어서지 못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세금이 한쪽으로 몰리면 가지 못하는 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의 두 아들 당사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재판이나 잘하고 있었다면 먹고 살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치부하려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평생 일할 수 있는 자기 일자리가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십니다. 우선은 치부하는지 몰라도, 우선은 잘 되는지 몰라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꿈같은 이야기이지만 만약 사무엘의 두 아들이 여러분, 우리는 아버지 뒤를 이이서 이 나라의 사사를 할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아버지 덕에 많은 것을 누렸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아버지 뒤를 이어 이 나라 사사가 될 사람을 우리 대신 다른 사람으로 세워주십시오.’ 라고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지 생각해봅니다. 만약 사무엘의 두 아들이 이랬다면 혹시라도 그 두 아들이 아버지 사무엘보다 훨씬 더 큰 이스라엘의 어른이 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챙겨주지 않아도 클 사람은 자동적으로 크게 됩니다. 크지 못할 사람은 아무리 해도 크지 못합니다. 결국은 사회와 나라를 붕괴하는 일만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할 수 없었을까요? 꿈같은 이야기이지만 이 생각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딘가에는 그런 젊은이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찾아보십시오. 꼭 내 아들, 내 자식이 아니라 이 나라를, 이 기업을 잘 이끌어 나갈만한 사람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시고 힘써서 만드십시오. 특히 사회학교에서 교회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여러분들은 잘 가르치십시오. 여러분들에게 달려있습니다. 충분히 그런 젊은이들이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런 대들보들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정직하게 생각해보아야합니다. 존경하던 사람, 귀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하고 그 사람에 대해서 다른 어떤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지만 기독교 신자들은 이런 문제에까지 끝까지 정직해야합니다. 나뿐만 아니라 어른들에 대해서도 정직해야합니다.

그 두 아들 후임 사사들의 잘못에 대한 결정적인 책임이 누구에게 있었을까요? 두 아들이 아닙니다. 아버지 사무엘입니다. 큰 어른이 실수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자기 두 아들을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 사사로 세운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사무엘이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본문 1절에서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잘못입니다. 존경한다고 모든 일에 다 존경해서는 안 됩니다. 제대로 알아야합니다. 존경하면 존경하는 것만큼 존경하고 그것 때문에 엎어지면 안 됩니다. 설사 그것이 당연한 전통이었다고 할지라도 어른은 달라야합니다. 사무엘은 달랐어야 합니다. 사무엘이 자기 아들이 후임 사사로서 일을 잘 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하더라도 혹은 여러 사람들이 자기에게 와서 아들이 적임자니 사사로 세워달라고 강권했다 하더라도 사무엘만큼은 달랐어야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것은 참 고맙지만 내 아들은 그럴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라고 말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설사 자기 아들이 더 잘한다 생각했다 하더라도 이런 겸손을 보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런 요구를 하고 이런 기대를 하는 것이 지나친 것인지 생각해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렇다 치더라도 국민들의 신망과 존경 그리고 기대를 가지고 있는 어른이라면 이런 기대는 받아야합니다. 절대로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주님께서 누가복음 12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12:48)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와서 왕을 세워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부탁을 들었을 때에 사무엘은 마음이 많이 섭섭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국민들이,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자기를 버린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시고 사무엘아, 그건 이스라엘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린 것이다.’ 라고 위로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며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6-7)

그런데 이 말씀을 가만히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말씀이 정말 위로의 말씀인 것 같습니까? 위로의 말씀도 되겠지만 여러 가지를 종합해볼 때 그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서 섭섭한 마음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주신 이 위로의 말씀은 일종의 책망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 너무 잘해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하게 못하실 뿐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들어보십시오.

사무엘아, 너 아들 둘 잘못 키운 것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그렇습니다. 자식은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힘을 써도 안 되고 노력해도 안 되고, 기도해도 한참 동안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알고 계셔야합니다. 자식 못 키운 사람들은 아버지의 탓 그 문제만은 아닙니다. 물론 문제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식들을 어떻게 이 나라의 최고의 지도자들로 세울 수 있는가? 다른 것은 나에게 잘 묻던데 어떻게 너의 자식을 이 나라의 최고 지도자로 세습하는 그런 문제에 있어서 나에게 한 마디도 상의하지 않느냐? 혹시 내가 거절할까 싶어서 묻지 않은 것은 아니냐? 너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너를 버렸다고 하지만 실은 그것이 아니다. 너 사무엘이 나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잘 알지 아느냐? 힘들고 어려울 때는 나에게 의지하고, 문제가 있을 때는 나에게 묻기도 했는데, 살만하면 나를 버린 것 잘 알지? 너 또한 그렇지 않느냐? 너 또한 자리 잡고 어느 정도 되었다 싶으니 이스라엘이 나를 버린 것처럼 너 또한 나를 버린 것이 아닌가?’

섭섭해 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8)

이 말씀 뒤에 하나님의 그 말씀이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사무엘의 전임 사사 엘리가 그의 두 아들을 잘못 관리하고 최고지도자로서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엘리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어찌하여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삼상2:29-30)

하나님 말씀을 잘 들으십시오.

잘하면 내가 영원토록 너의 집을 세우려고 했는데 잘못하는데도 어떻게 내가 세우겠는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2:30)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

사사제도가 끝났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사사노릇 잘 했지만 너의 아들은 이제 사사노릇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버렸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어느 정도 일어섰다 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되짚을 하나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라는 말씀입니다.

조심해야합니다. 조심, 조심 또 조심해야합니다. 선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로 조심해야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의 두 아들 사사들의 문제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항명이고 불순종이라고 해석하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이스라엘 장로들이 절대 잘못한 것 아닙니다. 이의를 제기하고 문제를 들고 일어난 것이 이스라엘 장로들이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표들입니다. 대표라면 백성들이 바라는 바를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이런 문제를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제기해야 합니다.

이런 항변, 불순종에 대해서 흔히 사람들이 잘 생각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 말씀이 있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13:1-2)

상당히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위 사람들에게 무조건 복종하라, 나라의 지도자들,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에게 무조건 복종하라는 하나님 명령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씀에는 중요한 배경이 있습니다. 당시 특수한 시대상황입니다. 당시 기독교 신자들 중에는 우리는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에 세금을 못 바친다.’ 이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로마서 13장 그 뒤의 말씀입니다.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13:3)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13:4)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다스리는 사람을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13:6-7)

이 말씀의 의미는 세금 바치는 문제는 신앙 지키는 것과 관계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오히려 세금을 더 잘 내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지켜야할 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국방의 의무, 병역의 의무를 더 잘 지켜야하고 세금 바치는 것도 더 잘 해야 합니다. 이것을 신앙 운운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반대로 나라의 지도자라도, 교회의 최고의 지도자의 말이라도 복종할 것이 아니라면 복종해서 안 된다는 하나님 말씀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이 말했다고 전부 다 복종할 것이 아니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말했다고 전부 다 복종할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 이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을 찾아가서 문제를 제기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지도자라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도 중요한 것이 그 다음에 있습니다. 그런 일을 빌미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의 실패는 여기에 있습니다. 당연히 들고 일어나야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런데 진행이 잘못되었습니다. 사무엘의 두 아들이 재판을 잘못 했다면 그 문제를 두고 의논했어야했습니다. ‘어르신, 이 문제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두 아들이 재판을 잘못하고 있습니다. 해결방안을 생각해주십시오.’ 최악의 경우는 어르신의 두 아들로서는 가능이 없으니 다른 사사를 세워주십시오.’ 이렇게 했어야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장로들은 엉뚱하게도 우리나라에도 왕을 세우자고 진행시켰습니다. 문제의 본질을 한참 벗어났습니다.

 

이것이 말씀하는 바는 이스라엘 장로들 관심이 국민들의 억울한 문제 해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의 문제가 아니고, 바른 재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싫다, 사무엘의 지도를 받기 싫다는 말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정치제도를 바꾸어서 더 좋은 나라를 만들고 국민들을 행복하게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사무엘 대신, 하나님 대신 우리가, 내가 이 나라의 통치자가 되겠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문제입니다. 하나님 신앙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무서운 적은 자기 자신입니다. ‘혹은 라고 하는 것이 참 무섭습니다. 여러분은 혹은 라는 말을 할 때는 항상 두려워해야합니다. 항상 조심해야합니다.

 

성경에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자신들 위에 왕으로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9:8-9) 라는 사사기 9장 말씀입니다.

감람나무가 못한다고 하자 이번에는 무화과나무에게 가서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9:10) 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무화과나무가 나의 단 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9:11)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포도나무에게 가서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9:12) 라고 부탁했습니다. 포도나무도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9;130 라고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가시나무에게 가서 부탁했더니 가시나무가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9:15)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제라도 찾아와서 망정이지 찾아오지 않고 나 대신 다른 사람으로 왕을 세웠다면 내가 여러분들을 불살라 여러분을 망하게 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기가 왕이 되어야한다는 말입니다.

 

너무나 자주, 충분히 자격이 있고 할 만한 사람들이 나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것도 좋지 않습니다. 할 만한 사람은 해야 합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하지 말아야할 사람, 자격이 없는 사람이 나서서 내가 해야 하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겸손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인이 겸손을 잃어버리면 겸손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립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 어거스틴이 실수 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옆방에 사랑하는 레이나가 있는 것을 알고 불렀습니다. 옆방에 틀림없이 있는데 대답이 없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화가 나서 방문을 확 열었습니다. 그런데 레이나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이 레이나에게 진심으로 사과했습니다. 그러면서 자네에게 부탁이 있네, 내 목을 자네 발로 밟고 교만한 어거스틴이 말을 세 번 해주게나.’ 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어거스틴에게 어느 날 제자가 와서 기독교 신자의 최고의 덕목이 무엇인지 질문했습니다. 어거스틴이 겸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제자는 선생님에게 다른 말을 듣고 싶어 선생님, 하나 더 말씀해주십시오. 또 다른 하나의 덕목은 무엇입니까?” “그것도 겸손이다.” 제자가 또 다시 물었습니다. 이때 대답도 그것도 겸손이다.” 이었습니다.

최고의 명작인 <뿌리> 작가 알렉스 헤일리 사무실에 거북이 사진이 하나 걸려있었다고 합니다. 보통 거북이 사진이 아니라 높은 담 위에 올라가 있는 거북이 사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사진을 걸어둔 이유가 무엇인지 묻자 헬리가 대답했습니다. “사진은 나에게 중요한 교훈을 계속해서 기억나게 해줍니다. 거북이가 혼자서 담장에 올라갈 수 없지 않습니까? 누군가 도와주었기에 거북이가 담장 위에 올라간 것이지요. 간혹 제가 스스로 내가 이런 일을 이루었구나 생각할 때 저는 꼭 저 사진을 봅니다.”

 

잠언서 1812절에서 하나님께서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잠언서 29장에서는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29:23) 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147편은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147:6)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다시 전합니다. 겸손하십시오. 특히 여러분 가운데 내가 어느 정도 되었다,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더욱 겸손하십시오. 하나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