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이심전심 (마가복음 8:27~35)

분당소망교회 2017. 9. 9. 13:32

이심전심

 

  

마가복음 8:27~35

 

 

백아절현(伯牙絶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 춘추시대였습니다. 백아라는 거문고의 명수가 있었습니다. 백아의 거문고 연주소리를 제대로 알아주는 친구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 이름이 종자기(鐘子期)입니다. 백아가 거문고로 높은 산을 연주하면 종자기는 하늘 높이 솟아오른 것이 마치 태산 같다.’ 라고 여지없이 읽어냈습니다. 백아가 거문고로 강물을 읊어도 종자기는 넘칠 듯 넘칠 듯 흘러가는 것이 황하 같다.’ 라고 읽어냈습니다. 두 사람은 통했습니다. 그러다가 종자기가 병으로 죽습니다.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어버립니다. 다시는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소리를 알아주는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백아절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그리워하십니다. 어쩌다가 하나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마음이 한없이 행복하다가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쓸쓸해하십니다. 당신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당신의 마음을 알아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복입니다. 마음이 알아지는 사람은 물론이고 남의 마음을 알아주는 그 사람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이 되십시오. 사람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그보다 더 하나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하나님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 그 사람은 어떤 사람보다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몇 명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나라인 두로와 시돈에 가셨을 때, 이방나라 가나안 여인이 찾아와서 자기 딸이 흉악한 정신병 결렸으니 치료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아주 냉정하게 대하시면서 대꾸도 안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소리 질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가나안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7:7)라고 상당히 심한 말을 하셨습니다.

그 정도면 예수님께 정이 떨어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가나안 여인은 그 말씀에 옳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라고 재치 있게 응답하였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 마음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절대 내 간절한 부탁을 외면하지 않을 분이시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신 것은 절대로 냉정하게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안 것입니다. 그 가나안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15:2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의 딸은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가나 지방에 혼인잔치가 열렸을 때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아들 예수님께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2:4) 라고 아주 퉁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신의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상당히 못마땅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어머니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퉁명하듯 하신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고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2:5)라고 지시했습니다.

불교의 염화시중의 미소가 그것입니다. 석가가 제자들을 모아 연꽃 한 송이를 손가락에 들고 말없이 제자들을 바라보면서 약간 비틀었습니다. 제자들 중 누구도 스승 석가의 그 마음, 그 뜻을 읽어내지 못합니다. 그때 제자 중 한 사람인 가섭이 스승을 보고 빙그레 웃었습니다. 스승 석가의 마음을 안 것입니다. 염화시중의 미소입니다. ‘염화는 꽃을 든다는 의미이고, ‘시중은 사람들에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제자들 중 예수님을 가장 잘 안다는 베드로가 그 일에 실패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는지 제자들에게 질문했습니다. 제자들이 이런 저런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나서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 라고 멋진 답을 했습니다. 대단한 답입니다. 일단은 베드로가 그래도 예수님을 아주 잘 아는 것 같았습니다.

베드로의 그 대답에 예수님께서 네가 복이 있도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16:17-18) 라고 칭찬하시면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6:18-19) 라는 말씀까지 덧붙이셨습니다. 대단한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칭찬을 받은 베드로가 바로 그 다음 순간 예수님으로부터 무서운 책망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그렇게 크게 칭찬하신 후 당신은 얼마 후면 고난당하고 죽게 될 것이라고 심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또 나섰습니다. 이번에는 그냥 나선 것이 아니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절대 안 됩니다.” 라고 강하게 항의 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붙들고 항변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베드로를 주님께서 책망하시는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실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실수한 것입니다. 그것도 스승인 예수님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붙들고 만류한 것인데 그것을 두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그렇게 무섭게 혹독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다시 생각할 것은 여러분 인생 살다가 그럴 리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왜 이렇게 하실까? 하나님께서는 왜 나를 이렇게 대접하실까...?’ 이런 일들이 있을 때 꼭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읽지 못하지만 하나님께는 아주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유 없이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정의의 하나님, 바른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데 합리에 어긋나도록, 정의에 어긋나고 논리에 어긋나도록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이때에도 틀림없이 이유가 있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베드로가 그런 야단을 맞을 만큼 큰 잘못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십자가의 일 하나만 준비하고 달려오셨습니다. 그런데 제자, 그것도 스스로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가 스승님의 큰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스승님께서 나는 이제 십자가에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을 돕지는 못할망정 앞을 가로막고 나섰습니다. 너무도 큰 실수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베드로 네가 그렇게 내 마음을 모르는가? 하나님 뜻을 그렇게 모르는가?’ 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함께 다니면서 그렇게 가르치고 지도하셨는데 베드로가 예수님 마음을 알지 못했으니 속이 많이 상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길, 가야할 길을 가고 있는데 길을 막고 있는 이런 사람들을 제자라고 그 중에서 스스로 수제자라고 하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겠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무섭게 말씀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런 이유만 가지고 사랑하는 제자에게 사탄아라고 까지 말씀하실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책망과 함께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 일을 기회로 제자들에게 제대로 가르치고 싶으신 것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도 베드로처럼 야단맞지 않고 예수님 그 마음 그 뜻을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라는 33절 말씀입니다. 베드로만 보시면 되는데 왜 제자들을 보셨을까요? 제자들을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참된 제자, 진짜 내 제자, 진짜 기독교인,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제자도의 중요한 것을 가르치십니다.

 

먼저는 참된 제자들은 가 없습니다. ‘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전부 내가 살려고합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나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달랐습니다. 기독교인은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라는 34절 말씀입니다.

세상은 거꾸로 가르칩니다. 어떻게 하든 자기를 부각시킵니다. 자기가 있어야합니다. 정신과에서는 자기가 있어야 건강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아십시오. 누가 무엇이라고 했든 간에 참된 기독교인 제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 없습니다. 내가 귀한 일을 했을 때, 대단한 것을 이루었을 때 내가 한 것이 아니다,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혹시 사업에 성공하셨다면 내가 성공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성공을 맡겨주셨다고 생각해야합니다. 영 주신 것도 아닙니다. 자식을 잘 키웠다면 내가 이렇게 키웠다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잘 키워주셨다, 하나님께서 잘 키워주신 우리 자식들이 어떻게 하든 잘못되지 않도록 잘 챙겨나가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참된 기독교인들입니다. 재산을 많이 모았다면 내가 모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재산을 주셨다, 하나님 뜻대로 잘 쓰고 잘 관리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고 기독교인들입니다.

사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전에 미리 가르치셨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멋지게 대답했을 때 칭찬과 함께 베드로에게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레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6:17)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가르침과 함께 일종의 경고입니다. “너 이번에 정말로 멋지게 대답했다. 너 참 잘했다. 사업 잘했다. 너 아이 잘 키웠다. 돈도 잘 모았다. 그러나 그것은 네가 한 것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가 그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네가 그렇게 멋지게 대답한 것은 네가 잘 대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대답할 말을 네 입에 주셨기 때문에 너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말씀을 뱉어냈을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절대로 명심하라. 그리고 앞으로 혹시라도 그런 일이 있을 때 여기에 실패하지 말라는 경고였습니다.

 

기독교신자들이 정말로 조심해야할 것이 이것입니다. 세상 누구든지 나를 드러내고 싶습니다. 내가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라는 말을 조심해야합니다. 내가 무엇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 내가 무엇이 좀 된다고 생각하는 것, 정말로 조심해야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경고하는 그 말씀을 듣고도 그 일에 실패했습니다. 바로 앞에 예수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으니 고조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한 번 고조되면 또 그 일을 하고 싶습니다. 또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한껏 고조된 마음에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으니 얼른 또 나선 것입니다. 또 잘난 일, 멋진 일을 하려고 그렇게 나선 것입니다. 그러다가 주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소리를 듣고 말았습니다.

실패하지 마십시오. 특별히 무언가 좀 했을 때 조심해야합니다. 다 날아갑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끝까지 여러분에게 있을 것 같지만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래 쥐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일에 완전히 실패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이 죽고 난 뒤 총사령관이 된 아브넬입니다. 아브넬은 틈만 있으면 자기를 내세웠습니다. 틈만 있으면 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사울의 아들에게 아브넬이 말합니다,

내가 오늘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와 그의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주지 아니하였거늘’(삼하3:8).. 내가 당신을 지켜주었다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이루게 하지 아니하면’(삼하3:9) 라고 말했습니다.

전부 나입니다. 하나님은 없습니다.

아브넬은 다윗에게도 내 손이 당신을 도와 온 이스라엘이 당신에게 돌아가게 하리이다’(삼하3:12)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이 나라를 주겠다는 말입니다. 내가 하겠다는 말입니다. 전부 다 ’,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이 아브넬이 칼에 찔려서 죽고 맙니다. 아브넬이 그렇게 자랑하던 그 가 올라가다가 제대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오늘 본문 35절에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제자들은 가 없습니다. 그럴 때 내가 정말로 오래갑니다. 내가 올라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올려 세우십니다.

그리고 참된 제자들은 잘난 체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낮춥니다. 틈만 있으면 낮춥니다.

어떻게 보면 좀 모자라는 사람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 사람이 지금까지 내가 알던 그 괜찮은 사람과 달리 저것밖에 안 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참된 제자들에게는 있습니다.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참된 제자들입니다

 

1960년대에 슈바이처 박사가 노벨 평화상을 받기 위해서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으로 향했습니다. 파리까지 비행기를 탔고 파리에서 덴마크까지 기차를 타고 갑니다. 슈바이처 박사가 기차를 타고 간다는 소식을 들은 언론기자들이 취재하기 위해서 슈바이처 박사가 탄 기차를 알아내어 그 기차를 탔습니다. 찾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기자들은 슈바이처 박사 정도 되면 당연히 특등실을 탔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칸칸이 뒤졌습니다. 한참 찾았지만 못 찾았습니다. 혹시 1등실 일까 하여 1등실을 뒤졌는데 거기도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겠지만 혹시나 하고 2등실도 찾았습니다. 찾지 못했습니다. 그만 둘까 하다가 설마 3등실은 아니겠지만 찾아보기나 하자고 찾았더니 그 3등실에서 슈바이처 박사가 가난한 시골사람들을 진료하고 있었습니다. 진짜 기독교인들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4장에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14:8-9)

스스로 잘난 체 하고 높은 자리에 앉았을 때 어느 날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 자리는 네 자리가 아니라고 말씀하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14:1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겸손할 때 어느 날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불러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잘 듣고 그대로 한 번 살아보십시오. 다른 사람 앞에 스스로 못난 사람이 되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여러분 스스로 나는 못난 사람이다, 나는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대신 다른 사람을 인정하십시오. 말로만이 아니라 진실로 인정하십시오. 못난 사람, 못 배운 사람 그런 사람들을 인정하고 귀하게 여기십시오. 여러분들이 그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시면 하나님도 여러분들을 귀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빌립보 2장에서는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2:3) 라고 말씀하십니다. 낫게 여길만한 사람을 낫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낫게 여기지 못할 사람을 낫게 여기는 이것이 낫게 여긴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참된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에게 칭찬받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인사 받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여름 성경학교가 한창 진행 중인데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참 수고가 많습니다. 참 힘듭니다. 그러나 이렇게 수고를 많이 하더라도 사람에게 칭찬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찬양대도 매주일 예배 전 미리 와서 연습해야하고 끝나고 나면 또 연습해야하니 힘듭니다. 때로는 책망 받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책망 받아도 좋습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여러분들이 십자가에 올라가서 못 박히겠습니까? 교회학교 선생님들도 특별히 춥고 더운 이런 때에 힘듭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역자들로부터 싫은 소리 듣고 또 간사들에게 소리를 들을 때 있어도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하십시오. 어떤 분들은 제가 그 분들을 칭찬해주면 좋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왜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칭찬받으면 하나님께 덜 칭찬 받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상이 적습니다. 참된 제자는 사람에게 칭찬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7장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17:7-10)

 

이렇게 사십시오. 수고를 많이 하시고 돈도 쓰면서 일하면서 하나님, 제가 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라고 생각하십시오. 칭찬을 받으려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으십시오. 하나님께 칭찬받는 것은 소원해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칭찬해달라고 기도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고 하지 말고 당신에게 와서 칭찬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 곳곳에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표적으로 느헤미야입니다. 평신도 최고지도자 느헤미야는 참 귀한 일을 했습니다. 바벨론의 장관 자리를 버려두고 이스라엘 총독으로 왔습니다. 총독 월급이 있었지만 받지 않았습니다. 개인 돈을 내서 나라 일을 하는 사람들을 챙겨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이렇게 했습니다. 제가 한 일을 기억해주십시오. 나를 기억해주시고 복을 주십시오.’

 

참된 제자들은 나서지 않습니다. 철저히 예수님 뒤에 섭니다. 앞으로 갈지라도 항상 자기 앞에 예수님을 모시고 갑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뒤로 물러나라라고 말씀하신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너 이름, 너 얼굴로 앞에 나서지 말라. 너는 항상 내 뒤를 따라오너라.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만약 네가 얼굴을 들고 너 이름을 드러내면서 잘난 체 하면 반드시 실패하고 만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또 앞에 나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큰 실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26:31) 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또 나서서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26:33) 라고 했다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였습니다. 그 실패를 하고 난 뒤 베드로는 한평생 죽는 날까지 그 실패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살아갔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주의하지 않고 나서다가 천추의 한을 남기는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제대로 죽지도 못했습니다. ‘내 스승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데 내가 어떻게 바로 십자가에 달릴 수 있겠는가?’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서 죽었다고 합니다.

나서지 마십시오. 몸은 나서더라도 주님, 하나님을 앞장세우고 뒤따라가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들도 의견을 가질 수 있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견해도 있습니다. 베드로라도, 다른 제자라도 그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의견 말할 수 있고 권할 수 있습니다. 만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조심할 것은 주장할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가정에서도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개와 고양이는 만나기만 하면 싸웁니다. 그런데 싸우는 이유에 대해서 그럴듯한 설명이 있는데 사실인지 우스갯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개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위로 올리고 기분이 좋지 않으면 꼬리를 밑으로 내리는데, 고양이는 반대로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밑으로 내리고 싸우려고 하면 꼬리를 바짝 세워 위로 올립니다. 그런데 만약 개가 나는 이제부터 고양이와 친하고 싶다고 하면서 자기가 하는 식으로 꼬리를 들고 고양이에게 다가가면 싸우겠다는 소리밖에 안됩니다. 정말로 개가 고양이와 친해보고 싶다면 고양이 식으로 꼬리를 밑으로 내리고 가야합니다. 그러면 고양이는 개가 사이좋게 지내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내 것을 내려놓아야합니다. 내 주장을 하지 말아야합니다. 남의 것이 조금 부족해보이더라도 존중하는 사람들이 참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참된 제자들은 자기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나를 생각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나를 중심축으로 생각하게 되어있습니다. ‘이 일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에게 손해인가? 이익인가?’ 그러나 아무리 많은 일을 했고 열심히 뛰어다닌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참된 예수님의 사람이라면 이것을 뛰어넘어야합니다. 그렇게 살았다고 할지라도 이것을 뛰어넘어야합니다. 가 아니라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 일을 생각해야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때마다 이것을 생각해야합니다. ‘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일까? 이것이 성경 전체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뜻에 맞는 것인지 생각해야합니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8:33) 라고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가끔 신자들 가운데 우리 교회, 우리 교회!’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도 조심해야합니다. 아무리 우리 교회라도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적으로 내가 교회를 생각하는 것인지 생각해보아야합니다. 또 간혹 목사를 생각한다고 우리 목사님, 우리 목사님하는데 목사는 한참 나중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지,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인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생각하고 그 다음에 교회를 생각하고 그 다음 혹시 틈이 나고 여유가 있으면 그때서야 목사를 생각해야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듯 교회를 생각하듯 목사를 생각하는 마음은 결코 옳은 일만은 아닙니다. 그러다 목사를 가짜 목사로 만들고 하나님 뜻을 저버리는 엉터리 목사를 만들려는 일들 생깁니다. 이것까지 생각해야합니다. 그저 하나님, 그저 예수님.... 참된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6:3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