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산
마가복음 9:2~8
미국 로스캐롤라이나의 한 젊은이가 중대한 범죄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젊은이의 부모는 대단한 재력가였습니다. 좋은 변호사를 찾았습니다. 아무리 불리한 사건이라도 틀림없이 의뢰인에게 유리하게 결론을 끌어내는 대단한 변호사가 그 사건을 맡게 됩니다. 그 결과 중형을 받을 뻔 했던 젊은이는 소위 ‘유능한 변호사’의 소위 ‘능력 있는 변호’에 힘입어서 무죄로 풀려나오게 됩니다. 무죄가 확정되어서 젊은이와 함께 법정 밖으로 나오는 젊은이에게 사건을 맡은 변호사가 조용하게 물었습니다. “여보게, 자네가 그 죄를 짓지 않은 것이 분명하지.” 변호사의 그 질문에 젊은이가 아주 밝은 얼굴로 대답합니다. “변호사님, 사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변호사님이 법정에서 변론하시는 것을 듣고 나니 하도 잘 하셔서 저도 제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다고 확실하게 믿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변화산 변모라는 기독교의 유명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 중 세 제자만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산에서 믿기지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 모습이 변형되었습니다. 형체가 바뀌었습니다. 놀라운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구체적으로 표현하지는 않고 대신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3절) 라고 표현합니다.
또 놀라운 일은 아주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이스라엘의 가장 큰 어른 두 사람이 나타나서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선지자 즉 영적 지도자 중 가장 큰 어른입니다. 또, 모세는 이스라엘의 사회, 나라 지도자 중에서 최고의 어른입니다. 이런 큰 어른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 그리고 오고 오는 세대에 더 이상 위대한 어른이 올 수 없다할 정도의 큰 어른들이 예수님과 함께 대화하는 모습에 제자들이 정신을 잃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감격하게 됩니다. 그때 베드로가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5절) 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의 말은 “선생님, 우리가 여기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하나는 우리 선생님, 하나는 엘리야, 하나는 모세가 사십시오. 우리가 여기 있으면서 모시겠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그 말을 할 때 구름이 그곳을 덮었습니다.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7절) 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말이 들리더니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지고 예수님만 남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로 믿기 참 어려운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마가복음을 쓴 마가는 물론이고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도 이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 중에서 가장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눈을 가진 의사 누가까지도 이 이야기를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이 똑같은 기록을 했다는 것은 ‘변화산의 사건 그것은 정말로 믿기 어려운 일인 것은 사실이다. 심지어 믿기로 작정한 기독교 신자들이라도 믿기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세 제자들은 엘리아와 모세가 자기들의 스승인 예수님과 함께 대화하는 것이 너무도 영광스러웠습니다. 그렇게 세상 모든 사람들이 흠모하는 그런 이스라엘의 위대한 어른들이 우리 선생님과 같이 대화하다니.... 우리 선생님이 대단하신 분인 줄 알았지만 저 정도 대단한지 몰랐다는 것이 세 제자들의 소감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구름 속에서 들린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그 생각을 너무도 크게 뛰어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7절) 라는 말씀에는 너희들이 너희들의 스승 예수에 대해서 지금까지 나름대로 알아왔지만, 너희들이 예수에 대해서 안 것은 너무 크게 잘못 알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는 엘리야나 모세와 같은 인간 존재가 아니라 나와 같은 신의 존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기들의 스승 예수님이 대단한 분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우리 선생님, 예수님은 어쩌면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불치병을 저렇게 쉽게 고칠 수 있고 중풍 병자가 한 마디로 일어서고, 나병환자가 낫고 맹인들이 앞을 보고, 바다의 거센 풍랑을 한 마디로 잔잔하게 하신 분이라면 하나님이신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제가 30년 전에 미국 간 경험담입니다. 배를 타고 미국에 갔습니다. 보름 동안 가는데 태평양 한 가운데를 갈 때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저한테 배당된 침대에 베개가 여덟 개 있었습니다. 호텔에 가면 보통 침대에 베개 두 개 정도는 있는데 여덟 개가 있으니 그 까닭이 궁금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으니 오늘 밤 자보면 알 것이라고 말합니다. 배가 흔들리면 몸이 앞으로도 흔들리고 옆으로도 흔들린다, 밤새 데굴데굴 구르는 몸을, 왼쪽에 베개 두 개, 오른 쪽에도 두 개, 머리에도 두 개, 발에도 두 개 받쳐야 몸이 덜 구르고 겨우 잠을 잘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사실 그랬습니다. 며칠 간 배가 흔들렸고 특히 날짜 변경선에 가면 거의 정신이 없었습니다. 제가 타고 간 배가 24,000톤이라 추운 겨울에 조깅하면 몇 바퀴 돌기가 어려울 정도로 큰 배입니다. 그러나 침대에 누워있으면 창문으로 하늘이 보였다가 다시 바다가 보였다가 배가 금방 뒤집힐 것 같습니다. 그런 때는 누구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원들이 미신을 많이 믿는데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냥은 밥을 먹을 수 없어서 식탁을 고정시켜둡니다. 바닥에 고정시켜 두는데, 풍랑이 불 때면 그럼에도 밥그릇을 잡고 먹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쏟아지게 됩니다.
그런 바다가 예수님께서 한 마디 말씀하시자 잠잠해졌습니다. 이것도 믿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을 보았습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먹지 못하고 있을 그때에 빵 다섯 조각 그리고 생선 두 마리로 그 사람들을 모두 먹이고도 상당히 많이 남았습니다. 이런 정도의 능력은 사람으로서는 그럴 수 없다, 하나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을 때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그렇게는 믿지 않았습니다. 확신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럴 리가 없다고 더 많이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은 동화나 소설에서나 나올 수 있는 것이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같기도 한데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랍비여’ 라고 부르는 본문 5절의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랍비여, 즉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베드로가 엿새 만에 엘리야가 나타나고 모세가 나타나자 랍비 즉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어떨 때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가 또 어떨 때는 하나님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능력으로 보아 사실인 것 같기도 하고 잘못 본 것 같기도 했습니다. 우리 선생님이 대단히 위대하고 대단히 존경할만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하나님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엘리아나 모세처럼, 위대한 어른들 중 한 분인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혼란이 제자들에게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떨 때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내가 기도할 때마다 부르는 예수님은 이런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가 또 어떨 때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는 혼란이 현대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에게는 이런 능력이 있다고 수없이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수없이 많이 보여주고 하나님의 종들로부터 많이 듣는 기독교인들조차도 혼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당시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의 제자들에게 다시 확실하게 가르치고 싶습니다.
일주일 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막8:27)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에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막7:28) 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막7:29)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나서서 한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7:29) 라는 그 대답은 베드로만의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같이 그렇게 ‘우리 선생님이 아닌 것 같지만 하나님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분이라면 좋겠다. 우리가 그런 메시야와 함께 일하는 사람이었으면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을 했고 또 바랬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당신은 고난을 받을 것이고 곧 죽을 것이라는 앞날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베드로가 나서서 그럴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베드로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모시고 있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당하시면 어떻게 하시는가? 그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고 싶었고, 고난당하시고 죽으신다는 것은 절대로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 중 세 제자만 따로 불러서 산에 데리고 가신 까닭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문제가 워낙 어려운 문제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자들 중 그래도 조금 더 나을 것 같은 제자들을 따로 불러서 가르치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7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구름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항상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구름 속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밑에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다 건축하고 난 뒤 끝나고 봉헌할 때 구름이 성전을 덮었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 왕 솔로몬과 대화하신다는 것을 다 알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구름, 특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면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들의 스승 예수는 나의 아들이요, 곧 나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아니라 좀 위대한 인간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8절에서 ‘문득 돌아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라고 확인시켜줍니다. 구름 속에서 그 말씀이 들리고 난 뒤 엘리야도 사라지고 모세도 사라졌습니다. 이것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그렇게 위대한 엘리야와 모세와 같은 인물도 너희들의 스승 예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저 예수께 찾아와서 인사하고 얼른 사라져야하는 존재밖에 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스승 예수는 어떤 존재인 것 같은지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그런 위대한 엘리야, 모세보다 더 위대한 존재라면 딱 한 분 하나님밖에 없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 중에서 아주 특별하고 뛰어난 존재 정도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동양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하는 석가는 존경할 만합니다. 대단한 분입니다. 공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뛰어난 분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입니다. 훨씬 뛰어넘는 존재, 전혀 차원이 다른 존재 즉 절대 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성경은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인간으로 오셨지만 하나님이다, 인간이 어떻게 불치의 병을 그렇게 쉽게 고칠 수 있는가? 저 멀리 있는 환자들까지도 말 한 마디로 고칠 수 있는 존재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어떻게 가능한가?’ 성경은 이것을 많이 보여주십니다. ‘생선 두 마리, 빵 다섯 조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세상의 모든 풍파를 잠잠히 할 수 있는 분이 하나님 이외에는 어떤 인간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이것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일이라도 여러분들이 믿지 않는다면 여러분과 상관없습니다. 하나의 소설에 불과하고 동화에 불과합니다. 여러 종교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각자가 하나님께 대답하여야 하고, 이것으로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결정됩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신 것을 나는 믿는다는 것을 각각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필요하다면 지금이라도 또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 아니다 싶으면 얼마든지 뒤집어엎으실 하나님이신 것을 나는 믿는가? 이것이 오늘의 관건이고 실존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불가능한 문제를 얼마든지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인 것을 믿는가?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 있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만드실 수 있는 분인 것을 믿는가? 무너진 가정을 회복시키시고 얼마든지 화목한 가정으로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는가?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말하는 그 예수님의 이름이 과연 그런 능력이 있는 이름이라는 것을 나는 믿는가? 부모와 멀어지고 잘못된 자식이라도 얼마든지 부모와 가까이 할 수 있고 바르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하나님임을 믿는가?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에게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철학은 힘이 없습니다. 멋질 수는 있어도 철학은 능력이 없습니다. 권세가 없습니다. 무식한 것 같아도 이런 믿음만이 능력이 있고 권세가 있습니다. 이런 믿음만이 여러분의 인생을 참되고 의미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시 유대인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아름다운 믿음을 가진 네덜란드의 두 자매가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독일의 악명 높은 라벤스부룩 수용소에 수감됩니다. 두 자매가 수감된 수용소는 수용소라도 그런 수용소가 없었습니다. 수용소 막사 곳곳 유리창은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 깨진 유리 사이로 매서운 바람이 밀려왔습니다. 추워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옷은 다 빼앗겨 제대로 입을 옷이 별로 없었습니다. 역겨운 냄새가 나는 하수도관이 막사 가운데로 지나고 있었습니다. 막사 마루 위에는 이불 대신 짚더미가 깔려 있었고, 그 짚더미에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썩는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머리 위 천정은 너무 낮아서 앉아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400명을 수용하기 위해서 지어진 그 막사에 1,400명의 죄수가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은 온 사방에 우글거리는 벼룩이었습니다.
동생이 절망한 듯이 언니에게 말했습니다. “언니, 이런데서 어떻게 살아?” 언니가 동생의 그 말에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에게 좋은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의 짧은 머리, 짧은 경험, 짧은 지식으로 답을 할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모습 그 자체가 좋고, 기도하게 되면 인간의 그 어떤 머리로도 만들어낼 수 없는 답을 만들어 냅니다. 언니가 “하나님, 우리가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보여주십시오.” 라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던 언니가 흥분해서 동생에게 말합니다, “얘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을 주셨단다.” 언니는 그날 아침 읽은 성경을 찾았습니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5-18) 라는 데살로니가 전서 5장의 말씀입니다.
언니가 주변을 돌아봅니다. 언니의 눈이 달라졌습니다. 빛이 났습니다. 냄새 나고 너무도 더러운 주변을 보는 언니의 눈이 빛으로 가득 찹니다. 그러면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란다.” 라고 말했습니다. 언니는 다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그렇습니다. 여기 들어올 때 아무 검사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을 가지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것에 감사드립니다. 꽉 차고 질식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들어찬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꽉 끼어있었기 때문에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니의 기도 마지막은 “그리고 하나님 벼룩에 대해서도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같이 기도하는 동생은 언니의 다른 기도는 다 받아들였지만 벼룩에 대해서 감사하다는 이 말만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언니, 벼룩은 아니야, 벼룩은 감사할 일이 아니야.” 라고 항의했습니다. 그 말에 언니가 설명했습니다. “얘야, 벼룩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란다.” 어쩔 수 없이 동생도 언니와 함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여기 벼룩에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동생은 끝내 언니의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는 했지만 이것만큼은 언니가 옳지 않다고 확신했습니다.
죄수들의 싸움은 그칠 때가 없었습니다. 때리고 싸웠습니다. 여기저기서 흐느끼고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죄수들이 옆으로 누워 잤습니다. 화장실이 오물로 철철 넘쳤습니다. 독일정부는 화장실을 거의 1/10정도로 대폭 줄였습니다. 독일 병사들이 수감인들을 죽이지 못하자 독일 당국은 병사들이 수감인들을 사람으로 보기 때문에 죽이지 못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수감인들을 ‘사람이 아닌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고 해서 화장실을 줄였습니다. 수감인들은 용변은 어쩔 수 없이 봐야하니 여기저기 용변을 봅니다. 오물이 넘칩니다. 온 옷에 오물이 묻습니다. 냄새가 나니 사람 같지 않습니다. 같은 수감인들이라도 서로 다른 수감인들을 보니 사람 같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고 독일병들이 쉽게 수감인들을 죽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화장실을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오물이 넘쳤습니다. 그 화장실이라도 가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들을 밟고 지나가야했습니다. 발 디딜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의 욕설이 터져나갔습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지푸라기에서 나오는 먼지로 기침이 터져 나옵니다. 온몸은 벼룩으로 성한 곳이 한 곳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두 자매가 인도하는 예배에 모이는 사람들의 수가 날마다 불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죄수들의 싸움질도 줄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던 미안하다는 말도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괜찮다는 믿기 어려운 말도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성경 말씀은 각국어로 통역되어서 다른 막사 저 멀리까지 전달되었습니다.
너무도 이상한 것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 계속해서 수용소 간수들이 그 막사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는 사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숨어서 드리던 예배를 조금 더 대담하게 드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성경 한 권이 아니라 몇 쪽 밖에 안 되던 성경을 빼앗길까 노심초사하는 두 자매가 덜 걱정하게 됩니다. 담대하게 성경을 읽었습니다. 찬송도 크게 했습니다. 한참동안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야 비로소 그 까닭을 알게 됩니다. 그 이유는 벼룩이었습니다. 우글거리는 벼룩, 가까이 왔다가는 메뚜기 떼처럼 달려드는 벼룩이 무서워서 간수들이 그 죄수들이 수용된 감방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언니 말이 옳았습니다. 벼룩에 대해서도 감사해야한다는 언니 말이 옳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 말씀이 옳았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옳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옳습니다. 여러분에게 하셨던 성경의 모든 약속들은 분명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이 험한 세상에서 그 믿음으로 승리하고, 여러분뿐만 아니라 우리 아들딸들 그 아들딸이 살기 힘든 세상이지만 여러분의 사랑하는 아이들은 믿음으로 넉넉하게 승리할 수 있도록 그 믿음을 자녀들에게, 후배들에게 나누어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좋은 일 한 어떤 일보다 더 귀한 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환경 가운데서 행복할 수 있고, 여러분의 자녀들도 여러분이 나누어준 믿음 때문에 함께 행복할 수 있습니다. ♥
'소망 말씀(설교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엇을 위한 기회..? (사도행전 22:1~11) (0) | 2017.11.07 |
---|---|
발람의 저주 (민수기 22:2-12) (0) | 2017.09.09 |
이심전심 (마가복음 8:27~35) (0) | 2017.09.09 |
순진한 기독교 (마가복음 7:5~14 ) (0) | 2017.09.09 |
겸손의 종교 (사무엘상 8:1~9 ) (0) | 2017.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