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한 기회..?
사도행전 22:1~11
절대가치라는 것이 있습니다. 각 사람에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입니다. 이 절대가치는 성장과정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사람에 따라 다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유아기 아이들에게는 어머니가 절대가치입니다. 어머니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됩니다. 유년기의 어린이들에게 절대가치는 장난감이라고 합니다. 사춘기가 되면 이성 즉 사랑입니다. 청년기는 지식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것을 말합니다. 청년기 때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 지식을 추구합니다. 어른들은 청년들의 이러한 절대 가치, 성향, 경향을 이해해야합니다. 청년들에게는 그것이 절대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따라 절대가치는 다릅니다.
어떤 것을 절대가치로 삼고 살아가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이 결정됩니다. 참된 절대가치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참된 절대가치를 모르는 사람 그리고 상대가치에 매달려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나중에 다 살고 보면 헛된 인생을 산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이 참된 절대가치를 알고 그것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본래 독실한 유대교인이었습니다. 그냥 독실한 것이 아니라 지나칠 정도로 열성적인 유대교인이었습니다. 바울 스스로 고백한 정체성이 있습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히 있는지라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3-5절)
이렇게 기독교를 박해했던 바울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개종 정도가 아니라 기독교 전파에 앞장섰습니다. 거기다 유대인들의 특권이라고 탄탄히 믿고 있는 구원, 그것을 이방인들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로 인해 유대교인들은 바울을 아주 큰 배신자로 규정했습니다. 틈만 나면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거의 죽인 적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붙들어서 돌로 친 후, 죽었다고 생각하고 버리고 갔는데 살아났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든 간에 처단하려고 기회를 노렸습니다.
세계 각국을 다니면서 기독교를 선교하고 있던 바울이 어느 날 “나는 이제 예루살렘에 들어가겠습니다.” 라고 놀라운 선언을 했습니다.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교인들이 가장 많이 득실거리는 곳이 예루살렘인데 거기 가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아끼는 사람들이 강하게 만류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바울을 만류하는 사람들도 여러 사람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자라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행21:8-11)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아가보라는 사람이 예언한 빌립 집사의 집에는 예언하는 처녀가 넷이나 있는 집이다, 따라서 아가보가 헛된 예언을 할 수가 없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언이 참된 예언, 성령님께서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기어이 예루살렘에 들어갔습니다.
역시나 여러 사람들이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드러났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니까 유대교인들이 예루살렘 시민들을 선동했습니다. 바울이, 성전에는 들어갈 수 없는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다는 선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이방인들과 함께 예루살렘 시내를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거짓말로 그렇게 선동한 것입니다. 지금이나 예나 선동하면 꼼짝없이 넘어가고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알지 못하는 예루살렘 시민들은 순진하게 선동하는 말만 듣고 바울을 붙들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성전 안에서 사람을 죽일 수 없으므로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가서 사정없이 내리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꼼짝없이 죽을 판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몰매를 맞아 죽게 되었는데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로마군 총사령관 천부장이 소식을 듣고 병사들을 이끌고 현장에 출동했습니다. 시민들을 시끄럽지 않도록 하는 것,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자기 책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로마군인들 덕분에 바울이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의 커다란 아이러니입니다. 바울의 스승 예수님은 로마 군인들에게 잡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제자인 바울은 자기 스승을 처형한 로마군인들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께서 마치 ‘여러분, 나는 당해도 내 사람들은 살립니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셔도 여러분은 살기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하셔도 여러분은 부하게 살기 원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당하셔도 여러분은 당하지 않기 원하십니다. 그런 예수님이십니다.
바울의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로마 군인이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당했어도 내 사람들은 손 못 댄다.’ 라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기독교 신자가 그런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단, 여러분이 생각하실 것은 이런 사랑을 받는 자리에 여러분이 서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낳은 자식이라도 다 사랑하지만 똑같이 사랑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인 것을 성경에서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주 특별하게 사랑하는 사람, 이 사람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손 못 댄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십시오. 시시하게 예수 믿고, 부스러기나 얻어먹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챙겨주시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당하는 것을 절대로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당하든, 질병에 당하든, 사고에 당하든, 어떤 것이든지 간에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상황에 있으면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가만히 계십니다. 병에 걸려도, 어려움을 좀 겪어도, 대강 어려움을 당할 때는 가만히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일이 있을 때는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보지 않으시는 듯 하다가 이제는 내가 일어서야겠다고 생각하시면 벌떡 일어서십니다. 절대로 일어서시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챙기시는 것은 이때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일평생 위기의 순간에 그때그때마다 바울을 챙기셨습니다. 역대하 16장은 ‘하나님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16:9)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시편 139편은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8-10)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도 이런 고백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
출동한 천부장의 지시로 로마 군인들이 바울의 신병을 인도받아서 로마 군부대로 끌고 갔습니다. 바울을 빼앗긴 폭도들은 죽이라고 소리 지르면서 바울과 로마 군인들을 따라갔습니다. 그들의 기세가 워낙 강해서 그냥 데리고 가면 피의자를 죽일 것 같아 바울에게 손이 저들의 닿지 않도록 로마 군인들 여러 명이 높이 쳐들고 갔습니다. 그 광경의 그림이 멋집니다. 어떻게 보면 로마 군인들이 고귀한 어른, 상관, 장군을 모시고 가는 광경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그림입니다. ‘나는 내가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들을 겨우 목숨 정도만 지키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저 목숨만 건져주거나 겨우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하는 정도로 절대로 그치지 않고, 나는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워준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이런 대접을 해주고 싶어서 찾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찾아보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어떤 것을 보시고 이런 특별한 은혜를 내려주시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특별한 은혜, 특별한 사랑, 특별한 복을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해를 비춰주시는 것은 의인이나 악인이나 비추어주시고 비를 내려주시는 것은 이런 저런 사람에게 다 주십니다. 그런 정도는 다 주시지만 특별한 것은 그럴만한 사람에게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출애굽기 33장에서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이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33:19) 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아무나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그런 복을 받았는지 따질 것 없이 내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만 하면 지금 좀 어렵고 많이 힘들었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은혜를 받고야 맙니다. 복을 주시고야 맙니다. 여러분은 내가 그것을 받겠다, 무엇을 달라고 할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복 주실만한 사람, 특별한 사랑을 주실만한 사람, 그야말로 배타적으로 챙겨 주실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식들에게도 할 일이 그것입니다. 조금 더 잘해주고, 돈 몇 푼 더 주고, 재산 몇 푼 더 주고, 조금 더 좋은 곳에 과외 시켜주는 것, 이런 것 때문에 꼭 해야 할 것을 못합니다. 여러분의 자식을 복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야합니다. 하나님께 사랑받을만한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어머니 아버지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그저 다른 사람들이 자기 자식에게 해주는 것을 나는 내 자식에게 못해줄까 하여 전전긍긍합니다. 무언가 좀 다른 사람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바울의 삶 자체가 그러했습니다. 바울의 절대가치는 딱 하나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바울의 절대가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이것이 바울에게 절대가치였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바울이 그렇게 사랑했던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힙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무슨 일에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늘 그러했듯이 지금도 큰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나의 생활을 통틀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빌1:21-22)
그리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삶 자체가 그러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일과 관련된 모든 일에서 그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세계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가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말했을 때, 가면 죽는다고 다 말렸습니다. 바울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에베소 장로들을 만나서 “나는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에베소 장로들은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통곡까지 했습니다. 바울을 수족같이 따라다니면서 바울을 섬긴 의사 누가도 울면서 바울을 만류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이런 저런 일로 떨어질 수도 있지만 의사 누가는 한 번도 몸이 약했던 바울 곁을 떠난 적 없이 늘 바울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 누가였습니다. 이 일을 기록한 것이 사도행전 21장 12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선생님 들어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그런데 바울은 왜 그 많은 사람들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쳤을까요? 자칫하면 교만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고집을 피웠을까요? 그 까닭을 밝혔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2-024)
이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오로지 하나님입니다. 자기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중요했습니다. 복음 전파하는 것,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이것을 좋아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바울을 그토록 챙기시고 사랑하고 배타적인 사랑을 하신 까닭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모습은 오늘 본문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바울이 붙들렸습니다. 유대 시민들이 바울에 대해서 폭도가 되었습니다. 가까스로 로마 군인들 덕분에 죽음을 면한 바울이 로마 군부대로 끌려들어가기 전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 군사령관 천부장에게 로마시민들에게 해명할 기회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의 말을 듣고 허락했습니다. 이제 바울이 제대로 해명만 하면 되었습니다.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간 적이 없다고 밝혀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 율법은 내가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지킨다’ 고 말하고, 만약 안 되면 증인을 세우면 됩니다.
그러나 그 절호의 기회를 얻는 바울이 우리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을 했습니다. 누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살 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했습니다. 오로지 말하는 것은 예수님밖에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대제사장과 여러 사람들이 증인이 되는 것처럼 나는 유대교의 독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와서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구원을 받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행22:6-8)
그 예수님께서 자기를 찾아오셨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또 “그 예수님께서 나더러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라고 말씀하셨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들을 가만히 짚어보면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유대교인들 미움을 받지 않을 말이 없습니다. 전부 다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 죽이려고 하는 말을 골라서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말까지 들은 예루살렘 시민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행22:22-23)
바울을 생각해봅니다. 바울은 폭도들의 살해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랑하시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서 다시 확인됩니다. 이 정도 되니 내가 바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를 하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이것입니다. 자기 가치는 자기가 만듭니다. 사람에게서 사랑받을 가치도 자기가 만들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을 가치도 자기가 만듭니다. 잘 아십시다. 기독교 신자들이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하고, 나를 챙겨달라고 하면 복을 주시기도 하고 챙겨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최소의 정도만 챙겨주십니다. 큰 것은 아무에게나 주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될 때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오래 전에 상영되었던 영화이야기입니다. 18세기 말 무렵입니다. 목사님을 중심으로 아주 소수가 모여 사는 덴마크의 한적한 시골마을이 배경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행복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마을 사람들도 한 사람, 한 사람씩 세상을 떠나고 마을도 떠납니다. 이제 목사님의 두 딸과 몇 명의 마을 사람들만 남아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점점 더 거칠어지기 시작합니다. 불만이 많아지고 다툼이 늘어납니다. 서로를 헐뜯습니다. 서로에게 상처받았다고 이 상처, 저 상처를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미워합니다. 모두가 지쳐갑니다.
그 마을에, 오갈 데 없어서 목사님 두 딸과 함께 살고 있던 가난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어느 날 프랑스에서 편지 한 통이 날아옵니다. 이 여인의 친구가 이 여인을 위해서 산 복권이 당첨되었다고 합니다. 액수가 1만 프랑이었습니다. 18세기말 그 돈은 어마어마하게 큰돈이었습니다. 그 즈음에 오래 전에 돌아가셨던 마을의 큰 어른이었던 목사님의 100번째 생일이 돌아옵니다. 그 여인은 그날을 맞아 자기가 마을 주민들을 위해서 프랑스식 저녁 만찬을 준비하겠다고 합니다. 여인은 큰돈을 들여서 온갖 귀한 음식재료들을 사옵니다. 마을 사람들은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여인은 그 재료로 음식을 준비합니다.
드디어 돌아가신 목사님의 100번째 생일, 그날 만찬이 시작됩니다. 만찬이 베풀어지는 날 우연히 고귀한 한 장군이 그 만찬에 동참하게 됩니다. 장군은 그 여인이 요리한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극찬을 합니다. 한 요리가 나오면 먹어보고 극찬하고 또 극찬하고 감탄을 연발합니다. 자기가 프랑스에서 근무할 때 유명한 식당에 바베트라는 천재요리사가 있었는데, 지금 자기네들이 먹는 음식이 바로 그 맛이라고 한탄합니다. 요리라고는 빵과 생선 말고는 먹어본 적이 없는 마을 사람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만들어준 음식이 맛이 있는 것은 알았지만 그만큼 대단한 음식인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장군이 음식이 나올 때마다 칭찬하고 감탄하고 환호를 연발하자 조금씩 맛을 알아갑니다. 놀라운 것은 그 음식을 먹으면서 음식 맛만 알게 된 것이 아니라 그동안 단단하게 굳어있던 마음들이 조금씩 녹아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 두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동안 자기가 잘못한 것을 고백합니다. 용서합니다. 식사를 다 마치고 난 뒤, 전부 감격의 마음으로 바깥으로 나와서 손을 잡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장군이 오래전에 알았던 프랑스 식당의 천재요리사 바베트가 바로 그 여인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만찬을 위해서 그 여인은 기적같이 갖게 된 돈 1만 프랑을 다 써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사는 동안 여러 번의 기회를 만납니다. 한 두 번은 일평생 올까말까 한 큰 기회도 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찾아오는 작은 기회도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에게 그 기회가 온다면 여러분들은 그 기회를 무엇을 위해서 사용하시겠습니까? 여기에 여러분의 인생, 여러분의 인격이 결정됩니다. 그 기회가 오기 전에 미리 그 기회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준비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회가 왔을 때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날려버립니다. 아무리 좋은 기회도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날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자칫 잘못하면 복이 될 절호의 기회가 불행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2002년에 무려 3000억 원 복권에 당첨된 미국인이 있었습니다. 잭 휘테크라는 사람입니다. 휘테크는 복권당첨 이전에도 이미 1,700만 불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업가였습니다. 1,700만 불이란 약 200억 정도가 됩니다. 이런 사람이 복권에 당첨되었습니다. 복권 당첨 이후 휘테크의 삶은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습니다. 매일 술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도박을 했습니다. 좋지 않은 연애행각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무려 460건의 소송에 휘말리게 됩니다. 가장 안 좋은 일은 복권 횡재이후에 자기 손녀딸이 납치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싸인 것입니다. 이 손녀딸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공부시켰습니다. 이 손녀딸이 마약에 빠져들고 마침내 열일곱 살 나이에 마약 때문에 죽고 말았습니다. 휘테크가 눈물을 흘리면서 고백했습니다. “복권당첨은 나에게 있어서 행복이 아니고 불행이었습니다. 차라리 복권에 당첨되지 않았다면…”
우리 민족 최고의 명절 추석이 다가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가족들도 떨어져 있다가 만나기도 하고 집안사람들도 잘 만나지 못하다가 만나기도 하고 친구들도 만납니다. 이 명절은 여러분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매년 돌아오지만 이 기회를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여러분의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큰 기회, 인생에 있어서 한 번 혹은 두 번밖에 오지 않는 기회가 왔을 때 여러분들이 어떻게 할지 정해져있습니다. 매년 오고 또 일 년에 몇 번씩 오는 기회가 아니라 여러분의 인생에서 딱 한 번 오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이 명절의 기회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 준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기회, 생각 없이 그냥 지금까지 보내듯이 보내지 말고 정말로 최고의 기회로 삼으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에서 그 명절은 나에게 있어서 정말로 복된 기회였다, 그것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달라졌다고 나중에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있고 사람 앞에 고백할 수 있는 명절로 만드십시오. 어떻게 하든 간에 한 사람이라도 구원을 얻게 하는 기회로 만드십시오. 어떤 기회를 통하든지 간에 아직 주변에 복음 받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복음을 전하십시오. 여러분의 인생 말년에 그리고 ‘그 뒤’에 그보다 더 큰 자랑거리는 없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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