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횡재
사무엘상 11:1~11
중국 청나라 초기의 학자 김성탄이 만약 자기에게 백만금의 횡재가 생긴다면 이렇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100만금 중에 99만 9천 999금으로 이 마을 사람들의 집문서를 모두 사들여서 불태우겠다. 나머지 1금으로 탁주를 사서 지나가는 초라한 선비 하나 붙들어놓고 주거니 받거니 나누면서 집문서 타는 연기를 바라보겠다.’ 멋진 말입니다. 그리고 멋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횡재의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초기에 뜻밖의 횡재를 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울이라는 젊은이입니다. 사울은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서 집을 나섰습니다. 사흘 동안 돌아다녔지만 나귀를 못 찾았습니다. 혹시나 도움을 받을까 하여 선지자를 찾아갔는데 그 선지자로부터 “하나님이 당신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라는 뜻밖의 말을 들었습니다. 아마 사울은 그 소리를 듣고 별 생각을 다했을 것입니다. 꿈같은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을 것이고, 어쩌면 나에게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이런 저런 생각을 다 하게 됩니다.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얼마 뒤 선지가가 ‘열 두 부족 모두 각 부족마다 천 명씩 후보자를 선발하기 바랍니다. 모월 모시에 모이게 되면 그 중에서 나라의 왕을 제비뽑겠습니다.’ 라는 왕을 선출하겠다는 공고를 했습니다. 왕으로 이미 내정 받은 사울로서는 온갖 생각을 다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왕이 될 확률이 1/12,000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기름 부은 것이 바로 얼마 전입니다. 만약 자기를 왕으로 정말 세우려고 한다면 그냥 발표해야 하는데 이제 와서 제비를 뽑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선지자를 어른이지만 믿지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 모였습니다. 12,000명이 모였습니다. 제비를 뽑았습니다.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났습니다. 선지자가 말한 대로 사울이 뽑혔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초대왕이 되었습니다.
사울이 왕이 된 것은 본인도 그렇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대통령 후보로 나섰지만 여론조사에 의하면 전혀 게임이 안 되었는데 하루 밤 사이에 혹은 한 며칠 만에 이제는 다 밝혀졌지만 별로 좋지 않은 일로 뒤집어지고 말았습니다. 꼭 그런 일이 사울에게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울이 나라의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울을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고, 사울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사울이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낼 수 있을지 걱정스러운 일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도 지금 나라에 이런 저런 일들이 있는데, 잘잘못은 차치하더라도 또 누구에게 책임이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많은 일들이 해결되지 않은 것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 것 같습니까? 누가 잘했다, 잘못했다 문제가 아닙니다. 최종적인 궁극적인 책임은 최고책임자에게 있습니다. 누가 무어라 하든지, 나라를 뒤집은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책임질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로 혹시 아내가 좀 실수를 했다 하더라도, 자식들이 실수했다 하더라도 마지막 책임은 아버지가 져야합니다.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하직원이 횡령했다 하더라도, 법을 어겼다고 하더라도 혹은 못된 짓을 했다하더라도 최종책임자는 회사의 대표가 져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울이 쉽지 않은 환경 가운데서 제대로 왕 노릇 할 수 있을지 의심했습니다. 사울이 과연 잘 감당할 수 있을지 의아한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으로 뽑힌 사울을 능력을 검증할 일이 생겼습니다. 이웃나라 암몬이 이스라엘에 전쟁을 선포한 것입니다. 사울이 이 일을 어떻게 잘 감당하는가는 사울에게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날처럼 임기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한 평생 하게 될 텐데 그 왕 노릇을 제대로 잘할 것인가는 어쩌면 첫 단추를 얼마나 잘 꿰는가에 따라서 다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는 너무도 간단하게 끝났습니다.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 한 겨리의 소를 잡아 각을 뜨고 전령들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역에 두루 보내어 이르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하였더니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 사울이 베섹에서 그들의 수를 세어 보니 이스라엘 자손이 삼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삼만 명이더라’ 라는 본문 6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군사 만 명도 모으지 못할 것 같았는데 33만 명이 모였습니다. 전혀 가망 없을 것 같은 전쟁에 가망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11절입니다,
‘이튿날 사울이 백성을 삼 대로 나누고 새벽에 적진 한 가운데로 들어가서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 사람들을 치매 남은 자가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11절)
완벽하게 이스라엘이 승리했습니다. 이 승리는 사울의 승리였습니다. 이 일로 사울의 입지가 완벽하게 구축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동안 사울에게 일어난 일들을 돌아보겠습니다. 사울 집에 나귀를 잃어버린 것, 사흘이 지나도 나귀를 못 찾은 것, 선지자를 찾아간 것,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것, 제비뽑기에서 뽑힌 것, 이웃나라 암몬이 느닷없이 전쟁을 선포한 것 등입니다.
전쟁을 선포한 암몬에게 이스라엘은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1절) 라는 굴욕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전쟁만 하지 말고 쳐들어오지만 말아들라, 그러면 뭐든 원하는 대로 다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현금의 이 나라의 일들도 비슷한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면 평화가 올 것 같습니까? 그렇게까지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암몬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야 너희와 언약하리라’(2절) 라고 치욕적으로 거부했습니다. 눈을 다 빼고 오면 평화조약을 맺겠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또 굽실거립니다.
‘우리에게 이레동안 말미를 주어 우리가 이스라엘 온 지역에 전령들을 보내게 하라 만일 우리를 구원할 자가 없으면 네게 나아가리라 하니라 이에 전령들이 사울이 사는 기브아에 이르러 이 말을 백성에게 전하매 모든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울더니..’
이 정도였는데 이스라엘이 대승을 거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을 가만히 보면 짜인 각본에 따라서 이루어진 연출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가만히 있던 암몬이라는 나라는 괜히 전쟁을 일으키다가 죽도록 얻어터지고 몇 명만 겨우 살아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의도를 세워두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하신 연출 같습니다.
연출인지 짐작만 할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그에 대해서 그렇다, ‘맞다! 나 하나님, 내가 연출했다!’ 말씀하십니다. 두 곳에서나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라는 6절 말씀입니다. 치욕, 굴욕이 통쾌한 승리로 바뀐 첫 출발이 하나님이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 사울에게 용기를 부어줘서 평소와 전혀 다른 분노가 크게 일어났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에게 감동된 사울이 큰 소리쳤습니다.
‘한 겨리의 소를 잡아 각을 뜨고 전령들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역에 두루 보내어 이르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하였더니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
첫출발도 하나님께서 하셨고, 도무지 불가능할 것 같은 3십3만 명이나 되는 군사들을 모으는데 결정적인 역할도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합하면 사울의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나귀나 찾으러 다니던 사람을 왕으로 만들어주신 것, 왕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지지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연약한 입지를 튼튼하게 해준 것,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이긴 것 전부 다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가져야할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왜 그렇게 챙겨주셨는가?’ 입니다. 흔히 이런 일이 있으면 우리는 당장 무언가 사울이 잘한 것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때는 하나님은 그런 것을 숨기십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 있을법할 때에는 반드시 성경에 그것을 기록해 두시지만 성경은 그에 대해서 일체의 기록이 없습니다. 그것은 사울이 그럴만해서 하나님께서 챙겨주셨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챙겨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사울이 앞으로 이스라엘 왕의 일을 잘 하려고 하면 필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이 하신다, 사울이 오늘의 왕이 된 모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한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울도 알고 사울 이후에 오고 오는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야하지만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축복, 특별한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잘 알아야할 것이 바로 이런 일, 저런 일 모두 다가 하나님께 뜻이 있어서 하신 것이다, 좋은 일도 좋지 않은 일도 다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울이 나귀를 잃어버린 것도 야곱의 아들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간 그 비참한 일도 우리가 인생 살면서 억울한 일 당하는 것도 배신당하는 것도 일이 꼬이는 것도 전쟁이 일어나는 것도 커다란 사고가 일어나는 것도 전부 다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반대로 사업에 크게 성공한 것도 잃어버린 건강을 되찾은 것도 자식이 멋지게 잘 커나가는 것도 전부 다 하나님께서 하셨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복, 특별한 선물을 주실 때, 과거에 잘했기 때문에 주시는 경우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잘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구원은 누구든지 믿는 사람에게 다 주시지만 복은 아무에게나 주시지 않습니다. 받을만한 사람,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사람, 복을 받을만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사랑하는 딸이나 아들들도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가는 것을 여러분이 본으로 보여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지금까지 잘한 것보다는 앞으로 잘하라고 미리 복을 주시고 선물을 주십니다.
이와 함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미리 주신 복, 선물은 맛보기에 불과하다는 것, 이것도 알아야합니다. 내가 이것을 줄 테니 앞으로 잘해라, 네가 잘하면 지금까지 네가 받은 것은 앞으로 받을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놀라운 것을 받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십일조입니다. 요즘은 목사님들이 교인들에게 부담을 덜 주기 위해서 십일조에 대해서 잘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할 말은 해야 하고 들을 말씀은 듣고 알 것은 알아야합니다. 십일조는 인간적으로 보면 쉽지 않습니다. 큰 금액의 십일조는 십일조 금액 자체가 크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아깝습니다. 그것도 인정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라 그렇습니다. 작은 금액의 십일조는 그렇지 않아도 모자라는데 거기다 1/10을 떼면 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큰 소득이든지 작은 소득이든지 전부 다 본래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면 달라집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깝고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열을 주시면서 그 중 하나는 당신한테 주고 나머지 아홉은 우리에게 쓰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하나를 하나님께서 드려도 아홉은 그저 받는 것이기 때문에 십일조가 부담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알면 부담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즐거운 마음, 행복한 마음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 없을 때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기만 하면 얼마든지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아직 받지 않았으니 하나를 빼도 아홉은 내 것이 될 테니 얼마든지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받고 나면 달라집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어렵게 번 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십일조의 유례, 십일조의 의미를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말라기 3장 8절과 9절에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곳 십일조의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 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어렵고 힘들게 하지 마시고 아예 열 주실 것에서 하나를 떼고 아홉만 주시면 될 텐데 왜 그렇게 열을 주시고 난 뒤 하나 안 드린다고 속상해하시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확실한 뜻이 있습니다. 만약 열 줄 것에서 하나를 떼고 아홉만 주면 그것을 받은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과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관계있는 것,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열을 줄 테니 받고 그 중에서 하나를 떼어 당신에게 돌려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고 하나님께 드리고,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예배가 그렇습니다. 예배드릴 때 그냥 찬송하고 찬양하고 성경봉독하고 헌금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배는 하나님과 같이 ‘노는 것’입니다. 말씀을 주시고 헌금을 드리고, 축복을 하시고 하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열에 하나를 못 받아서 병이 나서 그러시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모라자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어서 다시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럴 바에야 아예 주시지 않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함께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고받는 것’ 이것입니다. 전부 다 하나님 것인 줄 알고 ‘하나님, 어떻게 저 같은 사람에게 이렇게 주셨습니까? 고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돌려드리겠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재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받으십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날 것 같습니까? 열에 하나를 받으시고 이제 되었다고 그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 또 있습니다. 이것을 볼 줄 알아야합니다.
이유가 또 하나 더 있습니다. 열을 주신 후 하나는 받으시고 아홉을 쓰라고 하셨는데, 그 아홉이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맛보기일 뿐 진짜 큰 것이 있습니다. 커다란 선물, 커다란 보물이 있는데 이것은 받을만한 사람에게만 주실 수 있습니다. 받을만한 사람이 누군가 확인하시고 이 세상사는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과연 이 큰 것, 이 좋은 것을 받을 수 있겠는지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말라기 3장 10절과 11절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여러분 주변에 열심히 많이 모았지만 어느 틈에 어떻게 없어졌는지 모르게 다 없어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병으로, 사기 당함으로, 사업을 잘 못해서 다 날아갔습니다. 그 반대의 사람도 있습니다. 별로 벌지 못한 것 같은데 노후를 알차게 준비해서 편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3장 11절의 하나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참 잘 될 것 같다가 안 되는 사업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3:12)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정말로 대단한 복을 받았다고 부러워하고 어떻게 그런 복을 받았는지 감탄합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열 중 하나를 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는 형편이 처음과 나중이 크게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잘되다가 나중에는 잘못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처음에는 형편없는 사람이었는데 나중에는 우뚝 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멋지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업도 아주 잘되다가 나중에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기업들도 있고, 반대로 처음에는 손바닥만 하게 아내와 둘이 시작했는데 점점 더 커지는 기업이 있습니다. 집안도 마찬가지로 아주 별 볼일 없는 집안에서 세월이 지나가면서 멋지게 우뚝 선 집안이 있습니다. 인생이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엇이 그것을 좌우하는가? 그것을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주인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아는 사람, 그것을 알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가르침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인생에 있어서도 성공하고 집안에서도 성공하고 사업에서도 성공한다는 말씀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여기에 실패했습니다. 이 부부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넉넉하게 살았습니다. 상당한 여유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부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믿는다고 교회도 다녔지만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살아서 눈뜨고 쳐다보시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필요하면 얼마든지 일으키시고 아니다 싶으면 허무하게 없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그만 그 모든 재산을 쓰지도 못하고 둘 다 죽고 말았습니다. 세 시간 간격으로 남편이 먼저 죽고 아내도 죽었습니다.
여기에 확실하게 성공한 사람이 욥입니다. 욥은 당대 그 시대 제일 부자였습니다. 아들과 딸 열 명이나 있었습니다. 어느 하나 모자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 욥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양 칠천 마리, 낙타 삼천 마리, 소 일천 마리, 암나귀 오백 마리 다 잃었습니다. 거기다 아들딸 열 자식 모두를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웬만큼 믿음이 좋은 사람도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나로서는 모든 것을 다 바쳤습니다. 그런 나를 이렇게 만드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시라면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욥은 그냥 믿음 좋다고 고백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알몸으로 돌아가는 것이 맞습니다.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거두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본래 다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재산도 잠시 잘 누렸지만 본래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자식도 잘 키워보았습니다. 자식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서 다 가지고 가셨는데 제가 무엇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라고 고백했습니다.
욥은 또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신지 저는 잘 알지 못하겠지만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어떤 일이든지 간에 가장 잘 아시는 분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그런 분임을 믿습니다. 이 일도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잘하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 잘 하셨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이런 욥에게 하나님께서 드디어 역사하셨습니다. 이것을 욥기 마지막에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욥4:12)라고 말씀하시면서 어떤 복을 주셨는지에 대해서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욥4:12)라고 상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양은 칠천이었고 낙타가 삼천이었고, 소는 오백 겨리였고, 암나귀는 본래 오백 마리였습니다. 곱빼기로 주셨습니다. 부자에게 곱빼기로 주어야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여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냥 생각하는 복 정도만 준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13절은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곱빼기가 아닙니다. 본래 일곱이고 셋이었습니다. 곱빼기로 주시지 않은 것은 이미 간 자식들은 하늘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 열은 하늘에서 살고 또 열 명은 땅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곱빼기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그 후에 욥에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욥42:15)
그냥 읽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다 하나하나 짚어보면 의미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욥기 8장에서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하실 것이라’(욥8:5-6) 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어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7) 라고 말씀하십니다. 믿기만 한다고 미약하던 시작이 창대한 나중이 되지 않습니다. 그럴만한 사람에게만 주십니다. 욥은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 사울이 졸지에 왕이 되었습니다. 제대로 왕 노릇하기에는 너무나 연약하던 입지였습니다. 그 연약하던 입지까지 뜻하지 않은 일로 굳게 세워졌습니다. 사울이야말로 뜻밖의 횡재를 했습니다. 그러나 뜻밖의 횡재가 당연히 축복이 되지는 않습니다. 제대로 해야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제대로 하지 못하면 횡재가 화가 되고 독이 됩니다.
다시 확인하십시다. 어떻게 하면 여러분들이 받은 선물, 여러분들이 받은 복이 진짜 축복 진짜 횡재로 바꿀 수 있습니까? 단 하나, 여러분이 하나님의 주권만 제대로 알면 됩니다. 그렇게 살기만 하면 됩니다.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잠시만이 아니라 얼마동안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시는 그날까지 알고 살면 분명하게 하나님의 이 말씀이 그대로 여러분들에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이것 때문에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십니다. 이것 때문에 오늘도 말씀하시고 내일도 말씀하시고 성경도 주시고 하나님의 종들을 세우셨습니다.
여러분이 복을 받으시고 여러분이 행복하시고 그 행복을 수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지는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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