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카니발리즘 (요한복음 8:3~11 )

분당소망교회 2018. 3. 23. 10:54

   

 

 

카니발리즘

 

 

 

요한복음 8:3~11 

 

 

카니발리즘(cannibalism)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카니발리즘은 사육제를 뜻하는 카니발이라는 말과는 우리글로는 같지만 내용은 다릅니다. 카니발리즘은 사람이 사람의 고기를 먹는 행동 혹은 습관, 종교의식을 말합니다. 사육제 카니발과는 다른 말이지만 카니발에서 여러 사람들이 한 사람에게 달려들어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죽을 만큼 희생자를 내는 경우가 있는데, 그 경우에 이 말이 쓰여 지기도 합니다.

이 카니발리즘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곳이 닭 사회입니다. 시골 닭장을 유심히 보면 닭 이지매가 가끔 일어납니다. 닭 한 마리를 여러 마리 닭이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공격받는 닭이 견딜 수 없어서 횃대 위로 도망치면 횃대 위까지 따라가서 계속해서 쪼아댑니다. 닭의 발가락, 벼슬 또는 항문, 목 같은데 상처가 있으면 다른 닭들이 그 상처를 그냥 두고 보지를 못하고 끝까지 그 상처를 물고 늘어집니다. 죽기까지 괴롭힙니다. 닭 사회에서 일어나는 카니발리즘은 주로 그 대상이 항문입니다. 닭은 알을 낳을 때 항문내부가 바깥으로 조금씩 삐어져 나오는데 닭 중에 삐어져 나온 항문의 내부가 제자리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붉은 선지색 항문 내부가 바깥으로 나오는데 그것을 다른 닭이 보고 거기를 집중해서 쪼아댑니다. 그러면 피가 나고 피가 나면 다른 닭들이 더 잘 보게 되면서 여기저기서 닭들이 달려와서 계속해서 쪼아대어 결국에는 그 닭이 죽도록 만듭니다.

 

닭 사회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도 카니발리즘이 자주 있습니다. 성경에도 몇 군데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바울이 세 번째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들어갔을 때였습니다. 평소에 바울을 심하게 미워하던 유대인들이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갔으니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 선동했습니다. 물론 바울은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간 적이 없었습니다. 이 선동에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이 집집마다 바깥으로 몰려나왔습니다. 단지 어떤 사람이 바울이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다고 한 말, 그 말을 또 다른 사람이 전한 말을 듣고 바울을 죽이려고 예루살렘 온 성의 사람들이 몰려 나와 아우성을 친 것입니다. 그야말로 카니발리즘입니다.

 

예루살렘 시민들은 모두가 바울이 죽일 사람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저런 사람은 살려둘 가치가 없다,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그 사람들 중에 혹시 율법에 정통한 바울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겠습니까? 율법을 그렇게 잘 아는 바울이 어떻게 율법에 금지하고 있는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갔을 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 혹은 혹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죽일 것까지야 없다고 생각한 사람, 그렇게 말한 사람은 없었겠는지 생각해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복음을 전할 때였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기독교의 복음 때문에 은으로 우상의 모형을 만들어 팔던 사람들의 사업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 은세공업자들이 일어나서 시민들을 선동했습니다. 선동할 때는 대체로 자기네들의 목적은 뒤로 숨깁니다. 저 사람 때문에 우리 사업이 안 된다는 것은 말하지 않고 바울이 우리의 신, 에베소의 신을 모독했다고 선동했습니다. 그러자 온 에베소 시민들이 몰려나왔습니다. 바울을 붙들려고 하다가 찾지 못하고 바울과 함께 다니던 사람을 붙들고 연극장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그때 모인 에베소 시민들의 반 이상이 자기네들이 왜 모였는지 몰랐다는 사실입니다. 왜 사람들이 몰려 들어갔는지 알지 못한 채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또 모이고 연극장으로 들어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 일의 당사자인 바울조차도 사람들이 왜 몰리는지 몰랐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늘 복음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연극장에 모이니 거기라면 복음전하기 좋겠다고 생각하고 자기도 연극장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사람이 깜짝 놀라 바울에게, 저 사람들이 찾는 사람이 당신이다, 당신이 거기 들어가면 죽는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여론, 민심 그리고 세상의 흐름이라는 것, 인기라는 것이 다 뜬구름입니다. 허황된 것입니다. 대단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별것 아닙니다. 여러분이 혹시 그런 일에 관련되는 사람이라도 휘둘리지 마십시오. 별것 아니라는 것을 아십시오. 올바른 여론, 올바른 민심이 별로 없습니다.

구약시대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북 이스라엘 왕 아합이 자기 땅이 많음에도 궁궐 근처에 있는 포도원 땅이 탐이 났습니다. 그래서 땅 주인 나봇을 불러서 돈을 줄 테니 땅을 팔라고 하였습니다. 나봇은 팔고 싶어도 하나님 법 때문에 팔지 못하니 양해해달라고 정중하게 사양했습니다. 아합은 그 땅을 사지 못해서 병이 났습니다. 그 사실을 안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음모를 꾸몄습니다. 나봇의 동네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동네 사람들을 다 모으고 나봇을 그 가운데 높이 세우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을 돈으로 사서 나봇이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고발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온 동네 사람들이 나봇을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죄로 끌고 가서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나봇이 사는 마을에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으므로 그 마을의 상당한 사람들은 나봇이 어떤 사람인지, 평소에 하나님 법을 얼마나 잘 지키며, 하나님을 얼마나 귀히 여기는 사람이며 인격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봇의 동네사람들은 자기네들이 아는 나봇은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나서든지, 아니면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까지 나봇을 죽이지 말자고 나섰어야했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일종의 카니발리즘의 희생자였습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새롭게 떠오르는 스타 예수라는 랍비 때문에 자기네들의 위상이 자꾸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네들에게서 계속 옮겨갔습니다. 이러다간 자기네들이 그동안 누리던 특권과 존경을 계속해서 누리지 못할 것 같아 어떻게 하든 예수를 처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처치할 거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로마제국에 반역했다는 거리를 찾아내서 그것으로 선동을 했습니다. 높은 사람들이 선동하여 고발하면 경찰이나 검찰은 수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신병이 로마총독에게 넘어갔습니다. 로마 총독이 조사해보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반역이 아니었습니다. 모함에 걸린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무혐의로 풀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처형해야한다고 서슬이 퍼런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문제였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국민을 정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정권을 갖고 지키는 것만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든 자기 이름 자기 얼굴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나라를 진정 사랑하는 정치인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당연히 그러했고 유대종교지도자들도 그러했습니다.

빌라도가 유대를 통치해나가려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협조를 받아야합니다. 한편 아무리 보아도 예수라는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 같았습니다. 둘을 같이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이었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정의도 실현하고 싶고 유대종교지도자들의 협조도 계속해서 받고 싶었습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의 밉상을 받지 않고 예수를 풀어주고 싶었습니다.

그 당시 명절에는 죄수 한 사람을 풀어주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 전통에 시민들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시민들이라면 예수를 풀어주자고 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밉상을 안 받고 그들의 협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것처럼 명절이라 한 사람을 풀어주려고 하는데 여러분이 존경하고 있는 예수님입니까? 아니면 강도짓을 한 바라바입니까?” 빌라도는 당연하게 예수를 선택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 유대지도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술수 부리는 사람들은 늘 술수를 부리게 되어있습니다. 사람들을 사주했습니다. 바라바를 살려달라고 소리치라고 했습니다. 사주 받은 사람들이 그렇게 소리쳤습니다. 예루살렘 시민들이 그들을 따라서 바라바를 살려달라고 소리쳤습니다. 로마총독 빌라도는 의아했습니다. ‘그렇게 좋다고 따라다니던 예수 추종자들은 왜 가만히 있을까?’ 총독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이 물음에 예루살렘 시민들은 모두 나서서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말에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을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세상 여론이 곧 하나님 뜻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맞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 여론은 세상 여론이고 하나님 뜻은 하나님 뜻입니다. 하나님 생각이, 하나님 뜻이 세상 생각과 세상 여론과 다를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도 자주 이해가 안 될 만큼 이성이 없습니다. 상식이 없습니다. 예의도 없습니다. 애정이 없습니다. 민심이 흘러갈 때는 다른 것 생각하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내가 여론의 흐름에, 세상의 흐름에 뒤처질까 하여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습니다. 앞으로의 세대는 점점 더 심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일에 있어서 알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것 같아도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 반드시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들이 이런 사람들이 되십시오. 기독교인이란 원래 그런 사람입니다.

 

북이스라엘이 이웃나라와 전쟁을 하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의 국가이지만 신앙공동체입니다. 따라서 나라의 중요한 일에 있어서는 종교지도자들의 동의, 공감이 중요합니다. 북이스라엘 왕이 선지자들 400명을 모셔서 전쟁을 하려고 하는데 해도 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초청받아 온 선지자 400명 중 하나도 빠짐없이 만장일치로 전쟁하면 틀림없이 이길 것이고 하나님께서 왕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자리에 동맹군으로 와있던 유다 왕이 그 광경을 보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한 두 사람, 몇 명은 의견이 다를 텐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똑같은지 의아했습니다.

이분들 말고 우리가 물어볼 다른 분이 안 계시는지 묻자 북이스라엘 왕이 대답했습니다. 오늘날 말로 풀어서 말하면 한 놈이 있기는 하지만 그 놈은 늘 좋은 말은 하지 않고 듣기 싫은 말만합니다. 그래서 미워서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다 왕이 깜작 놀라서 그런 소리를 할 것이 아니다, 얼른 가서 모시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동맹군 왕이 그렇게 말하니 할 수 없이 사람을 보냈습니다. 심부름 간 사람이 선지자를 만나서 선지자님, 다른 선지자 400명 모두 한결같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 선지자님도 왕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해주십시오.” 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그 선지자가 북이스라엘 왕을 만났을 때, ‘저 대단하신 분들 말이 오죽 맞겠습니까..저 분들 말 대로 전쟁 나가서 이기세요..’ 삐딱하게 대답했습니다. 바른 말을 해봐야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 왕이 눈치를 채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진심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선지자가 전쟁하면 당신은 죽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화가 나서 그를 감옥에 넣고 먹는 것도 제대로 먹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된 바울이 과거 이 과정을 거쳤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집사인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가 종교재판을 받게 되어 사형을 언도받았습니다. 그때 그 옆에 있던 바울은 스데반은 사형당하는 것이 천만번 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사형시키는 돌팔매질에 앞장섰습니다. 바울이 앞장선 돌팔매질 사형에 스데반은 결국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데 바울 마음속에 커다란 갈등이 생겼습니다. 바울은 유대교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만이 진짜라고 생각했고 다른 종교는 다 가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진짜를 믿는 자기 마음에는 평화가 없는데, ‘가짜를 믿는 스데반은 어찌 저렇게 행복하게 보이는지, 죽어가면서까지 얼굴이 저렇게 평화로울 수 있는지에 대한 고뇌, 갈등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옳다고 생각하고 나도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그것이 맞을까 생각하는 이 고뇌가 있어야합니다. 이 고뇌, 갈등이 바울을 위대한 하나님의 종 사도로 만들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죽여야한다고 말할 때에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되는 일에 있어서도 어쩌면 이것이 아닐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겸손이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야합니다.

여러분 앞에 그런 일이 있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이것은 아니다,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는 일이 있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런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람,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먼저 인식해야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거룩한사람입니다. 모양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뭔가 다른 사람이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과는 다르고 세상 흐름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때로는 세상 흐름과는 거꾸로 가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기독교인들도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자주 세상 사람들과 세상의 흐름과 거꾸로 가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행동도 예수님 따르는 것이 기독교인입니다. 물론 이런 일이 있을 때 조심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런 때 세상 사람들을 이성이 없고 상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이성도 있고 상식도 있는 사람 어쩌면 우리보다 더 이성적이고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겸손도 있어야합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들어가 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이런 일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도 확실한 기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것,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것에는 기준이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용서입니다. 용서이고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자비입니다. 긍휼을 베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는 긍휼이 없는 사람은 자기도 긍휼이 없는 심판을 받을 것이고 긍휼이 있는 사람은 그 긍휼이 심판을 이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아합이 너무 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다 못해서 심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당신의 종을 왕에게 보내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악한 북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심판 말씀을 듣고 회개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진짜 같지 않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 진짜 같지 않은 회개를 보시고도 당장 용서하셨습니다.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매인 자나 놓은 자를 다 멸할 것이요 또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아의 집처럼 되게 하고 하이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하리니 이는 네가 나를 노하게 하고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고 하셨느니라 하니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함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왕상21:21-26) 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뒤이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왕상21:27-29) 용서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아합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비를 베풀만한, 용서할만한, 긍휼을 베풀만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은 용서할만한 거리 봐줄만한 거리가 손톱만큼 만이라도 있으면 그 거리를 선택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가져야할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당시 법에 의하면 그 여자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 누구도 의심할 바 없이 돌에 맞아 죽을 사람입니다. 모두가 돌을 들고 죽일 태세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앞에 이 여자가 있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것은 여러분에게 시험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을 쓰셨습니다. 무슨 말씀을 쓰셨는지 모릅니다. 성경에는 일체의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여러분 중에 죄 없는 사람들이 먼저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뒤 땅에 또 무엇을 쓰셨습니다. 무슨 말씀을 쓰셨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그때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떠나갔습니다.

당시 그 여자는 도저히 살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살 수 없는 여자, 용서받을 수 없는 여자를 살리셨습니다. 주님은 이 방법도 동원하시고 저 방법도 동원하셨습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 여자를 살리셨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일, 배워야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그 여자는 혼이 날만큼 났습니다. 지금 살아있지만 산 사람이 아닙니다. 이렇게 이미 죽은 사람을 끝까지 죽도록 돌멩이를 던져야하겠습니까? 혹 다음에 또 다시 죄를 지으면 그때에는 사형에 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에는 어떻게 할지라도 그러나 이번에는 주님께서 용서하시고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8:1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 전에 서초동 법정에서 있었던 재판의 한 장면입니다. 오토바이를 훔친 혐의로 열여섯 살의 한 여자아이가 구속되었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이 아이가 지은 죄가 무려 16가지나 됩니다. 같은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이번에는 중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재판장이 예상을 뒤집고 전혀 다른 판결을 내렸습니다. 아주 준엄하게 선고할 것 같은 이 재판장이 다정한 목소리로 이 여자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나를 따라서 크게 외쳐라.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게 생겼다.’” 뜻밖의 판결에 이 여자아이가 당황했습니다. 시키니 들어가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따라했습니다. 재판장이 다시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더 큰 소리로 따라하라.’나는 이 세상에서 두려울 것이 없다.‘” 이 여자아이는 다시 따라했습니다. 다시 재판장이 말합니다. “이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여기까지 따라하던 그 여자아이가 참고 있다가 통곡했습니다.

재판장이 이런 판결을 내린 데에는 까닭이 있었습니다. 지난 해 초까지만 해도 이 여자아이는 어려운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학급에서 상위권 성적아이였습니다. 간호사가 꿈이었고 모범학생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해 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러 명의 남학생들로부터 몹쓸 짓을 당했습니다. 그것으로 이 아이의 인생은 다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후유증으로 한참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혼자인 홀어머니는 그 일 때문에 마비까지 왔습니다. 이 아이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 뒤부터 비행청소년들과 어울려 온갖 죄를 다 지었습니다.

재판장이 말합니다. “이 아이는 가해자로 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의 삶이 왜 이렇게 망가졌는지 안다면 우리 중에 누가 이 아이를 가해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아이에게 책임이 있고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고 잘못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 아이가 다시 제대로 살 수 있는 길은 이 아이에게 잃어버린 자존심을 찾아주는 것입니다.”

재판장의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아이를 불렀습니다. 앞으로 부른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를 꼭 안아주고 싶었는데 법대가 가로막고 있어서 안아주지 못한다. 대신 손이라도 잡아보자.” 아이는 손을 내밀었습니다. 재판장과 죄수 아이가 손을 잡았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 특히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사랑이고 이런 애정입니다. 이런 따뜻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9장에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9:13)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도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의 뜻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