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이 되어
지중해 연안 케일이라는 마을에 진실한 한 기독교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로마의 기독교 박해 때 체포되어서 곤욕을 치르고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참으로 다행히도 사형직전에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해방선언으로 석방되었습니다. 이 분은 고아와 과부, 전과자, 창녀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의 친구로 한평생 살았습니다. 성탄절이 가까워오면 한밤중에 커다란 자루를 들고 마을을 돌았습니다. 다른 때와 달리 성탄절에는 병든 아이, 가난한 아이가 사는 집을 미리 봐두었다가 그 집을 찾아다니면서 남몰래 특별한 선물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 사람 이름이 니콜라스입니다. 사람들은 나중에 그 일을 알고 그 분의 선행을 기리기 위하여 니콜라스 이름 앞에 세인트(saint) 즉 성(聖)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세인트 니콜라스, 이 말이 발음이 바뀌어 산타크로스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꿈은 산타로부터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성탄이 가까워지면 아이들은 산타할아버지 선물을 기다립니다. 믿는 아이이건 믿지 않는 아이이건 모두가 산타할아버지 선물을 기다립니다. 아주 어릴 때는 산타할아버지가 진짜 있는 줄 알고 기다립니다. 나중에는 진짜 있을지 의심하면서도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립니다. 커서는 아닌 줄 알고서 아름다웠던 꿈으로 간직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탄,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에서 천사가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0-11) 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고 특별한 말씀을 하십니다. 성경은 이어서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 맨 처음에 말씀도 계시고 하나님도 계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또 이어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3) 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그렇게 믿고 지금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은 조금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하십니다. 그 말씀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거기다 그 말씀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 1절 뒷부분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약시대 때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난 후 33년간 이 땅에 계신 것뿐만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도 사람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고 계셨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키려고 하실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셨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야곱이 쫓겨서 외삼촌 집에서 생활하다 돈을 버는데 본래 부자였던 외삼촌은 재산이 많이 줄고 아무것도 없었던 야곱은 재산을 많이 모았습니다. 이 야곱이 외삼촌으로부터 미움을 받아서 쫓겨나서 ‘야반도주’를 하게 됩니다. 1주일간이나 도망갔지만 뛰어봐야 벼룩이라 이제 내일이면 잡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외삼촌이 내일이면 혼내주겠다고 단단히 작정하고 있던 그 밤에 하나님께서 외삼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이 잘했든 잘못했든 간에 아무소리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모세가 죽고 난 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됩니다. 이 백성들을 제대로 이끌 수 있을까 겁이 많이 났습니다. 더구나 가나안에는 강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지라 걱정이 많았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으로 진격을 합니다. 진격을 시작할 때 이스라엘 군대 앞에 어마어마한 군대를 이끌고 있는 장군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오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수5:13-14) 그 군대대장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참으로 불행하게도 미련한 사람들은 자기들 눈에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었다면 예수님을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보기만 했다면 이스라엘은 멸망당하거나 참혹한 고통을 당하는 비극은 없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 하나님의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알지 못한 것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똑똑하게 예수님을 볼 수 있도록, 눈으로 보고 믿을 수 있도록 예수님을 이 땅으로 내려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을 이 땅으로 보내는 것은 하나님으로서는 어마어마한 큰 고통이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계신 곳, 예수님과 함께 계신 그곳은 모든 영광과 존귀로 가득한 정말로 영광의 나라였습니다. 그 하늘나라를 떠나서 예수님께서 가실 곳,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실 곳은 시기가 가득하고 분쟁이 가득하고 미움이 가득하고 배신이 가득하고 온갖 추악한 것이 가득한 세상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서는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그렇게 하기만 하면 세상 사람들이 틀림없이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영접하고 다시는 불행의 나락에 떨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미련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끝까지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기어이 거부하고 끝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살아계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마21:33-39)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울타리도 두르고 거기 포도주 짜는 틀도 만들고 망대도 짓고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갔다. 세를 받을 때가 가까워서 자기 종들을 보내셨다. 그러자 그 농부들이 주인이 보낸 종들을 잡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다. 주인은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더 많이 보냈다. 그랬는데도 마찬가지로 농부들이 또 그렇게 했다. 후에 주인은 내 아들만은 저 농부들이 존대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들을 보냈는데,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보고 저 아들은 우리 주인의 상속자니 죽이고 이 재산 포도원을 우리가 빼앗자고 하여 주인의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내쫓아 죽이고 말았다.’ 당신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신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하늘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고 올라가셨다고 해서 이 땅에 계시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에 이 땅에 계셨던 것처럼,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하나님’으로 이 땅에 계셨던 것처럼, 여호수아에게 군대대장에게 이 땅에 계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계십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여러분 가정에서 함께 계시고, 여러분 자녀들 학교에서, 여러분 직장에서 예수님께서 성령님으로 함께 하십니다.
성경은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라는 이 말씀은 대단히 놀랄 말씀입니다. 어마어마하게 놀랄 대단한 말씀입니다. 어떤 의미가 있는지 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 천국을 자기의 집으로 주셨다는 이것이 자녀의 권세입니다. 남의 집에 들어갈 때처럼 눈치 보면서 들어가는 천국이 아닙니다. 비굴하게 눈치 보면서 끼어서 들어가려고 하는 집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은 마치 내 집 문을 열고 들어가듯이 당당하게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천국이 믿는 사람들에게 그런 집이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오늘날처럼 디지털 열쇠의 번호가 있다면 번호를 누르고 문 열고 들어가는 집, 그 천국을 자기의 소유로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입니다. 당당하게 천국으로 들어갑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세는 하나님과 같은 권세, 권한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잘 설명하기 위해서는 성탄절마다 재방송되는 영화 <벤허>의 예를 들겠습니다.
벤허가 여동생의 실수로 사형수가 되어서 노예선으로 끌려갑니다.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감옥에 갇힙니다. 벤허의 여동생이 고의가 전혀 없이 실수한 것을 알면서도 벤허의 가족에게 그렇게 중형을 내린 사람은 벤허의 친구, 당시의 주둔군 사령관 메살라였습니다. 사형수로 노예선에 끌려간 벤허가 기적과 같은 기회로 기적과 같은 일을 만나게 됩니다. 사형수 노예인 벤허가 일약 로마 최고 지도자 집정관의 양아들이 됩니다. 벤허가 메살라를 찾아가서 자기 어머니와 여동생을 찾아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메살라는 콧방귀도 뀌지 않습니다. 그러자 벤허는 양아버지가 자기에게 준 집정관의 반지를 꺼내 서판에 찍으면서 “내 아버지 집정관 아리우스의 이름으로 너에게 명령한다. 내 어머니와 여동생을 찾아오라.” 라고 말합니다. 벤허의 그 말에 기세가 등등하던 메살라는 꼼짝도 못하고 벤허의 지시를 따르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12절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권세, 같은 권한을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었다면 여러분은 이 권세를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에 대해서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요한복음 14장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요14:12)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도 하실 것이고,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것은 약속입니다. 내가 이것을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셨던 그 일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겠다, 그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약속은 절대로 변치 않습니다. 허투루 하는 약속은 없습니다. 약속은 다 지켜주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다시 우리에게 오십니다. 작년에도 오셨고 내년에도 오실 것입니다. 해마다 오시고 또 오십니다.
예수님께서 해마다 오시는 까닭이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이 세상에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영접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생각하신 주님께서 해마다 오심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 땅에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는 옛날 이스라엘이 당했던 불행한 일들을 당하지 않도록 예수님께서 해마다 오시고 또 오십니다.
그러면서 다시 성탄절을 맞이하는 사람들로 깊이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도록 보도록 믿도록 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 사람들에게 곧 구원입니다. 이 땅에서 구원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얻습니다. 이런 일들을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애를 썼나 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까닭이 믿고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그 일을 해야 하는데, 혹시 우리는 그동안 우리만 즐거워하고 우리만 선물을 받고 기뻐하고 우리만 꾸미는데 끝나지 않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두 아이 엄마가 크리스마스 장식을 꾸밉니다. 여덟 살 딸, 네 살 아들이 엄마를 돕고 있습니다. 거실 탁자 위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구유 세트를 배치합니다. 엄마가 아이들에게 마리아와 요셉, 동물들, 목자들을 이렇게 저렇게 배치하라고 부탁을 합니다. 한참 후에 와서 보니 엄마의 말과 전혀 달랐습니다. 엄마가 다시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른 일을 하고 와서 돌아보니 똑같았습니다. 엄마는 자기가 직접 해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내보내고 자기가 했습니다. 사람들이 등장인물들을 잘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마리아와 요셉, 동물들, 목자들 동방박사들의 피곤한 모습을 진열했습니다. 보니 훨씬 좋았습니다. 그림 전체가 배열이 좋고 예뻤습니다.
저녁이 되어 엄마가 다시 한 번 보려고 나갔는데 자기가 조금 전에 그렇게 힘들게 했던 배열과 전혀 다르게 배열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또 손을 댄 것입니다. 모든 인물들이 작은 원을 그리면서 안쪽으로 얼굴을 향해서 촘촘히 배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제대로 그림이 나오지 않습니다. 화가 난 엄마는 어린 아이들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큰 아이가 “엄마가 해놓은 것은 아무도 예수님을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렇게 바꾸었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 아이의 말을 듣는 순간 엄마는 ‘아차’ 했습니다. 아이들 말이 옳았습니다. 자기가 한 배열은 보기에는 좋았지만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예수님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한 배열은 촘촘했고 보기 싫었지만 모두 다 가운데 있는 작은 아기, 구유에 있는 아기를 제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도 요셉도 목자들도 동방박사들도 다 볼 수가 있었습니다. 아이들 말이 맞았습니다. 배열은 그렇게 되어야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른들은 우리 눈에 보이도록, 내가 보기 좋도록 하지만 아이들은 ‘참’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할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를 드러내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모양을 좋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예수님을 보도록, 예수님을 믿도록 그래서 구원을 얻도록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한 사람이라도 구원을 받고 여러분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참된 평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 우리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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