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빌립보서 1:12~21)

분당소망교회 2018. 8. 9. 10:31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빌립보서 1:12~21

 

 

나이 지긋하신 분이 길을 걷다가 고개 숙이고 휴대폰만 보면서 걸어오던 젊은이와 부딪힐 뻔했습니다. 이 분이 젊은이에게 앞을 보면서 걸으라고 점잖게 한 마디 했습니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대뜸 내가 왜 꼭 앞을 보면서 걸어야합니까?” 라고 대꾸했다고 합니다.

시대가 많이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시대가 변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훨씬 많이 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빨리 더 많이 변할 것 같습니다. 경제 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살면서 이런 저런 경제 상황을 보신 분들은 혹시라도 지금처럼 예측하다가는 큰 어려움을 당할 것 같습니다. 하나 더 아버지 존재성 문제도 있습니다. 상당히 큰 문제입니다. 앞으로는 아버지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지 심지어 아버지라는 존재가 우리 가정 속에 꼭 있어야 되는지 이런 문제까지 생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 자식들은 어떻게 키워야할 것인가? 젊은이들은 나이든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하는가? 이런 시대에 우리 자신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여러 가지 걱정스러운 일들이 많습니다.

결론부터 내립니다, 답은 성경이라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답이 다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을 축소하면 예수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최고의 답이 주님에게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또는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아직까지 그렇게 고리타분한 소리를 하는가?’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수많은 세계최고의 석학들이 똑같이, 세상의 이런 저런 것들이 다 변했지만 그리스도가 답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고 여전히 최고의 답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해입니다. 태양입니다. 요한복음 19절은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라는 해에게서 빛을 받아 반사하는 달입니다. 여러분은 달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 된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달로서 세상에 빛을 비추어야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이미 달이기 때문에 그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면 존재성이 상실됩니다. 나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자식은 이렇게 키워한다는 것을 자신 있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키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의가 상실되고 있는 시대에 여러분만큼은 다른 사람들을, 또 연세 드신 분들을 어떻게 대해야하는지 삶을 통해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존재성을 더욱 더 의미가 있게 해주실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는 존재는 이것을 알고 살아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5:14-15)

 

한 기독교 역사가가 시대를 사는 정신 그것은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 간에 최고의 정신은 프란시스코 정신이다. 프란시스코 정신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지혜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역사가는 이 말을 하면서 그 말에 붙이는 말이 있습니다. ‘프란시스코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 한 분을 제외하고는 예수님이라는 해를 가장 잘 보여주시는 분이다.’ 그렇다면 프란시스코보다 더 예수님을 잘 보여주는 달은 누구인가? 논란의 여지없이 바울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잘 보여주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빌립보서입니다. 바울은 그 편지 첫머리에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절묘한 한 수를 가르쳐줍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힙니다. 이 소식이 바울이 개척한 빌립보 교회에 전해집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다 바울을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 교인들 전부가 다 바울을 사랑하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중에서 몇 사람은 아주 소수이지만 바울을 미워하고 싫어했습니다. 항상 그렇지만 최고의 지도자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최고 지도자 가까이 있는 다른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이 최고 지도자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까닭은 시기와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그러했습니다. 모세보다 나이가 한참 많았습니다. 모세가 모세 되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도 미리암이었습니다. 그 미리암이 동생 모세를 책망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모세가 에티오피아 여자를 아내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책망 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미리암이 그 일을 두고 모세를 비난하면서 정작 그 문제는 그냥 말 꺼내는 데에만 썼고 다른 것을 비난한 것입니다. 미리암이 동생 모세에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시지 아니하셨느냐?” 라고 말했습니다. 모세가 에티오피아 여자를 아내로 삼은 것을 비난하는 것은 빌미일 뿐이었고 정작 말하고 싶은 것은 다른 일이었던 것입니다. ‘너만 지도자냐?’ 라는 말입니다. 미리암이 그동안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아름다운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다가 그만 거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미리암은 심한 나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모세에게 대항했던 이스라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세에게 대항했습니다. 당을 지어서 모세를 대항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 각 지파의 대표자로 이미 상당한 지위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지도자들이 현재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최고의 자리, 모세의 자리 그리고 대제사장 아론의 자리를 탐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네들이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느냐?’(16:3) 라고 공격했습니다.

모세가 말렸습니다. 그냥 말리는 정도가 아니라 엎드려서 말렸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있을 자리도 하나님께서 주셨고 아론이 있을 자리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자리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나의 이 자리가 여러분보다 높은 자리가 아닙니다. 나는 내 자리에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대로 일할 뿐입니다. 다 하나님께서 각각에게 맡겨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자리를 주셨는데 여러분이 대제사장 자리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미 맡겨주신 그 직분 만해도 얼마나 귀합니까? 어떻게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맡겨주신 대제사장 자리까지 요구하십니까?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지도자들은 끝까지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다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나 모세에게 대항했던 이스라엘 지도자들 모두에게 있는 공통점은 당신만 지도자냐 나도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모세의 자리 아론의 자리까지 탐냈습니다.

 

현재의 자리, 현재의 일만 해도 감사하고 만족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 번 하나씩 헤아려 보십시오. 얼마나 많습니까? 두 손 두 발 다해도 세지 못합니다. 그런 우리가 더 나은 것 더 좋은 것, 더 높은 것에 매이게 되면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리 귀하고 좋은 것이라도 누리지 못합니다. 만족하지 못합니다. 행복은 저 멀리에만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다 있는 것도 누리지 못하고 다 잃어버리고 맙니다.

 

빌립보 교회에서 바울을 반대하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도 당신만 지도자냐? 우리도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자리도 있었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다른 교인들이 자기들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들을 존경하지도 않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존경받으려고 인정받으려고 모든 노력을 다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못난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모르는 것 같아도 알 건 다 압니다. 바울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하다 안 되자 이들은 바울을 비난하는데 온갖 힘을 다 쏟게 됩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함께 다닌 적이 없다. 따라서 사도로서의 중요한 자격이 바울에게는 없다. 바울은 정식 사도가 아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말하자면 가짜 사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보아도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바울에게 저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바울에게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거의 틀림없이 간질병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얼마나 창피스러운 일입니까? 강단에서 설교하다 갑자기 뒤로 넘어지면 교인들이 얼마나 시험이 들겠습니까? 눈은 너무 못 생겨서 보기가 싫을 정도였습니다. 다른 외모도 큰 문제였습니다. 키는 작고 눈이 옆으로 쭉 찢어졌고 두 눈썹은 서로 붙었으며 코는 매부리코였고 다리는 안짱다리였습니다. 머리는 대머리 중에서도 아주 보기 흉한 대머리였습니다. 거기다 글은 그럭저럭 쓰지만 설교가 너무 시원치 않았습니다. 바울은 무엇 하나 자기네들보다 나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사람들은 자기네들은 따르지 않고 시원찮은 바울을 따르고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오게 됩니다. 이들은 이때다 싶어 교인들 앞에서 대놓고 바울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그동안 우리가 말했던 것이 다 맞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그동안 몰랐던 것입니다. 바울이 본래 그런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죄 없는 사람이 왜 감옥에 갑니까?”

공개적으로 비난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때를 자기들을 부각시킬 기회로 삼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바울이 다 시원찮은데 잘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선교하는 것은 참 잘했습니다. 그런 바울이 감옥에 들어갔으니 이들은 그렇다면 우리도 선교를 얼마나 잘하는지 보여주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만 선교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하기 시작하면 바울보다 훨씬 더 선교를 잘할 수 있다고 말하고 열심을 다했습니다.

 

반대로 빌립보 교회의 바울을 사랑하는 많은 교우들은 바울이 감옥에 들어갔다는 소식에 힘이 빠졌습니다. 슬펐습니다. 그러던 중 그들 중 한 사람에게 퍼뜩 생각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대로 힘이 빠져서 처져있을 것이 아닙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잘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것은 선교라는 것으로 마음이 공히 일치가 되었습니다. ‘선교야말로 감옥에 갇히신 바울에게 최고의 위로가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것이다. 우리가 하는 선교가 바울님이 하신 선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그러나 모든 힘을 다해서 선교에 나서자.’

이리하여 빌립보 교회의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바울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모두가 선교에 온 힘을 쏟게 됩니다.

 

빌립보 교회의 이 모든 소식들이 바울에게 전해집니다. 당연하게 바울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바울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도 인간인지라 한편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고 많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많이 괴로웠을 것입니다.

자기가 감옥에 갇힌 이유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마치 바울이 악한 죄를 지어서 감옥에 갇힌 것처럼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이런 저런 말을 하기 시작하고 그 말을 들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또 다시 그리고 또 다시 이야기하면 아닌 말도 나중에는 마치 사실인 것 같이 들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울을 심하게 고통스럽게 했을 것입니다. 바울에게 긍정적이었던 사람들도 급기야 우리가 바울을 잘못 알았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자기가 정식 사도가 아니라는 말, 오늘날로 말한다면 가짜 목사라는 말을 듣게 되면 그렇잖아도 열악한 감옥 속에서 고통스러웠을 덴데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으면 정말로 고통스럽습니다.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 역시 본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서 구원을 받게 하고 교회의 귀한 직분을 얻게 해준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런 복음의 자녀들이 바울에게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습니까? 더구나 지금 바울은 감옥 속에서 그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갖은 배신감, 분노 억울함 원통함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그런 것들이 바울을 전혀 괴롭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사는 방법입니다. 도리어 바울은 비로소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겠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바울의 입에 발린 말이 전혀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서 한 말도 아닙니다. 진실에서 우러나온 말이라는 것을 성경을 깊숙이 읽어보면 반드시 느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나쁜 것들은 일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좋고 예쁜 쪽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선교를 했지만 선교가 좋아서 또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반대하고 자기를 괴롭히고 힘들게 만들고 싶은 경쟁심에서 하는 것인데도 바울은 지금, 그들이 선교하는 그것만 생각하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기뻐할 수 있는 것은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여건 때문이 아닙니다. 환경 때문에 오는 기쁨, 여건으로부터 오는 행복은 잠시 끝나고 맙니다. 그것은 참된 기쁨과 행복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오래 기뻐하고 오래 행복할 수 있는 것은 기뻐하기로 작정된 사람, 행복하기로 작정된 사람들입니다.

행복은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그것이 그냥 나에게 행복으로 오지 않습니다. 행복하기로 작정한 사람, 행복하기로 애를 쓰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행복이 옵니다. 바울에게 전해진 소식이 어떤 것일지라도 바울 귀에는 바울을 힘들게 하는 것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만 바울의 귀에 그리고 가슴 속에 머릿속에 들어왔습니다.

 

꽈배기 공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무슨 말이든, 어떤 일이든 곡해해서 꽈배기처럼 비비 꼬아서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꽈배기 공장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이 괴롭습니다. 미운 사람이 많아집니다. 자꾸 미운 사람이 생깁니다. 원망할 일이 많고 불평할 일들만 많아집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 자주 속상하는 사람은 화낼만한 일, 속상할만한 일 때문이 아닙니다. 화내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속상하는 사람이 되려고 작정했기때문입니다.

인생을 바꾸어야합니다. ‘공장을 바꾸어야합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좀 모라자라는 바보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저 사람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눈치도 없이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 낫습니다.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해도, 나에 대해서 하는 말 속에 가시가 돋친 말일지라도 알아채지 못하고 좋게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 이런 인생이 차라리 훨씬 낫습니다.

어떤 사람이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친구 사무실에 찾아갔습니다. 친구 사무실은 멋진 최신식 건물이었습니다. 그 건물 주변 여기저기에 여자들이 둘러앉아 있는데 모두들 얼굴이 행복한 모습이었습니다.

건물에 들어갔습니다. 건물 안에 들어가서 친구 사무실을 찾아가는 중간 중간에 여러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전부 다 멋졌습니다. 그런데 만난 사람들이 하나같이 얼굴이 어두웠습니다. 친구 사무실에서 친구를 만났습니다. 오는 중간에 만난 사람들에 대해서 물어보았더니 수억의 연봉이 되지 않는 사람이 없고 다 잘난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친구 연봉도 수억이었습니다. 또 물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곳에서 근무하고 그렇게 멋진 외모를 가지고 있고 연봉도 그렇게 높은데 얼굴이 왜 어두운가..? 앞날이 불안해서.. 라고 답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친구 얼굴도 어두웠습니다. 그리고 건물밖에 있던 행복한 얼굴의 여자들에 대해서 물어보자 건물에서 청소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건물을 나가면서 그 여자들에게 여러분 얼굴이 참 행복해 보이는데 정말로 행복하십니까?” 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왜 행복한지 물었습니다. 오늘이 쉬는 날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일주일 내내 궂은 일, 힘든 일을 하고 아주 적은 봉급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면서 일주일에 한 번 쉬는 그것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절묘한 대조였습니다. 수억의 연봉을 받고 최신식 건물에서 근무하고 집에는 가정부, 청소부를 두면서 안락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집에서 단 돈 얼마에 허드렛일을 하면서 커피숍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길거리에 모여 앉아서 자리를 깔고 거기서 노는 사람들, 참 절묘한 대조입니다. 안락한 현재는 보지 못하고 약간의 가능성이 있는 앞날의 불안한 것만 생각하고 어두운 얼굴을 하는 사람들, 고달픈 환경 가운데서도 일주일에 한 번 쉬는 그날을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는 사람들, 얼마나 절묘한 대조입니까?

 

참된 기쁨, 행복이 어디서 옵니까? 외부에서 오지 않습니다. 주위 환경에서 오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에서 옵니다. 관점의 문제입니다. 똑같은 일도 똑같은 사람도 내 관점이 어두우면 어두운 사람으로, 좋지 않은 사람으로, 좋지 않은 일로 보게 됩니다. 그러나 밝은 관점으로 보게 되면 사람도 좋아지고 일도 괜찮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좋은 일이 있으면 좋은 일 그것으로 기뻐합니다.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그것을 그대로 보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돌려 행복한 꺼리’, 기쁜 꺼리로 만들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행복합니다. 그 사람의 공장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학자들이 공히 말하는 그리스도를 제일 잘 아는 바울이 말한 오늘 본문 14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된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그렇게 억울한 일로 감옥 속에 갇혀있으면서 바울은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고 또 기뻐하겠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7장에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17:20-21)

 

행복은,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 속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