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쁘기만 한 사람
창세기 18: 22~32
사람들 중에는 어떻게 보아도 이쁘기만 한 사람이 있습니다. 미운 짓을 해도 이쁘고 아무리 귀찮게 해도 이쁜 사람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손주들이 그렇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이쁩니다. 하나님께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먼저 이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바라는 바는 여러분이 이런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사람에게도 이쁜 사람, 하나님에게도 이쁜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께 대표적으로 이쁜 사람이 다윗입니다. 밧세바의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쁜 것은 그 남편 우리아에게 한 일입니다. 그 일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주시기는 했지만 약간 흉내만 내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전혀 다윗이 그런 죄를 지은 사람으로 여기지 아니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 전과 똑같은 사랑을 주셨습니다. 여러 군데서 그런 말씀을 많이 보이지만 특별히 열왕기상 15장에서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다윗이 죽고 그 아들 솔로몬이 왕을 이어받았고 그 뒤를 이어 그 아들 르호보암 또 그 다음에는 아비얌이라는 왕이 이스라엘 왕이 되었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아비얌은 다윗의 증손자가 되는데 15장 1절부터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왕 열 여덟째 해에 아비얌이 유다 왕이 되고 예루살렘에서 삼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아가요 아비살롬의 딸이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3절에는 ‘아비얌이 그의 아버지가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의 마음이 그의 조상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의 아들을 세워 뒤를 잇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셨으니’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죄를 지은’ 다윗 때문에 다윗의 증손자를 챙겨주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라는 열왕기상 15장 5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곰곰이 짚어보면 다윗의 죄를 하나님께서 짚으신 까닭은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다윗이 그런 지었는지 모르고 다윗을 좋아하신다고 생각하고 항의할 것 같아 미리 짚으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그런 죄를 지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는 데에는 거의 영향이 없을 정도로 그 만큼 사랑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무조건 좋다는 말씀입니다. 이전에 어떤 죄를 지었든 간에 이쁘기만 한 내 아들 다윗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한 사람은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에서 살라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흉년이 들었다고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이집트로 이주를 갔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급하게 조치하셔야할 상황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면 힘듭니다.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충분히 짐작하시게 해야 하는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급하게 손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서 하나님 마음을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을 제대로 믿지 않고 첩을 얻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 마음을 아주 불편하게 만들었고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여러 사람의 가슴이 아프고 눈물 흘리게 하는 일을 본 하나님도 가슴이 많이 아프셨고 힘드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런 일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는 이쁘기만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오늘 본문의 말씀 중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천사들과 함께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도 천사들도 사람 모습으로 왔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그 사람들을 잘 대접하고 전송하러 나갔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17절) 라고 말씀하신 후 아브라함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천기누설을 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 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20-21절)
하나님의 계획, 앞으로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는 일체 비밀에 붙였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천기누설을 하시면서 그 중에서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라는 17절 말씀은 모든 사람들이 정말로 탐낼만한 말씀입니다. 아! 이 사람에게만은 무엇이든지 이야기해야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복이 있는 사람입니까? 그야말로 최고의 영광입니다.
또 하나는, 이제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망시키려 가시는데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든지 간에 하나님을 붙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의인 쉰 명, 그 다음에 마흔 다섯 명, 마흔 명, 서른 명, 스무 명, 열 명까지 제안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이렇게 하지 못합니다. 아내가 남편한테, 남편이 아내한테도 자식이 부모에게도 이렇게 여러 번을 바꾸어가면서 부탁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렇게 몇 번씩이나 바꾸어가면서 부탁했는데도 하나님은 다 들어주셨습니다. 마치 하나님을 놀리는 것 같습니다. 장난치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말하는 것을 한 번 보십시오. 말하는 것이 곱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라는 23절 말씀입니다. 부탁을 해도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기분이 썩 좋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오십 명의 의인이 있으면 어떻게 하실지 물을 때 ‘주께서 이같이 하사’(25절) 라고 말했습니다. 아직 하나님은 대답도 안하셨는데 ‘이같이 하사..’ 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십 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을 멸망시키신다면 악인과 의인을 함께 멸망시키는 것이니 부당하다고 말하면서 “의인과 악인을 같이 멸망시키시는데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런 일을 합니까?” 라고 아주 공격적으로 한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조금도 나무라지 않고 조금도 싫어하는 내색이 없으셨습니다. 들어주시고 또 들어주십니다. 오히려 이 말씀을 여러 번 읽다보면 이런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그렇게 숫자를 줄이고 줄이면서 부탁하는 것을 더 좋아하시는 것 같고 더 줄여서 부탁하도록 기다리시는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일이라면 전부 다 받아주시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생 살려면, 하나님 앞에 살려면 이렇게 사십시오.
오늘 우리는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어떤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쁜 사람으로 보시는가? 입니다.
가장 큰 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대강 사랑이 아니라 지극하게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을 지극하게 사랑한 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절대적인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정말로 사랑하면 순종하게 됩니다. 사랑한다 하면서 순종하지 않으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들을만한 것만 듣고 나에게 좋은 것만 순종하는 이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5장에 결혼예배 드릴 때 자주 쓰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5:22) 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싫어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자세하게 보면 전혀 그럴 것이 아닙니다. 남편에게 복종할 정도로 정말로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에게 하신 말씀에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5:25)
교회를 위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에베소서 5장의 말씀은 복종하기까지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은 그런 아내를 위해서 죽기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득이고 누가 손해입니까? 복종하기까지 사랑하는 것이 손해입니까? 죽기까지 사랑하는 것이 손해입니까? 정말로 사랑하면 순종하도록, 복종하도로 되어있습니다.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고 싶어집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했기 때문에 순종하는데 절대적인 순종, 무조건적인 순종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순종을 했는지 히브리서 11장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을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11:8)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 당시에는 고향 친척 일가를 떠나는 것은 죽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런 시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죽는 길인지 사는 길인지 생각하지 않고 그저 그 말씀만 듣고 떠났습니다.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그 순종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이 이삭을 바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해도 그런 말씀에 어떻게 순종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과 관련된 성경의 모든 곳에서 아무리 보아도 아브라함이 멍청하고 몰라서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알아야 할 것은 다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데는 까닭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너무 믿었습니다. 확실하게 믿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아파트에 불이 났습니다. 3층을 타고 4층으로 올라가고 다시 5층까지 번지려고 합니다. 소방관들이 도착했습니다. 불길이 너무 세서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5층의 창문이 열리자 아이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예닐곱 살 쯤 된 아이였습니다. 소방관들이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밑에 매트리스를 깔아두고 아이에게 뛰어내리라고 부탁했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괜찮으니 뛰어내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이는 무서워서 뛰어내리지 못합니다. 그때 남자 하나가 그 사람들 틈을 뒤집고 나갑니다. 손을 벌리면서 “아빠다, 뛰어내리라” 라고 하니 “아빠” 하고 뛰어내립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믿으면, 신뢰하면 순종하도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감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너무도 크신 은혜를 주셨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너무 커서 내가 갚을 수가 없다. 내 평생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나의 있는 것 다 바쳐도 나는 갚을 수가 없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받지 않아도 된다. 지금까지 받은 사랑만 하면 되었다.’ 라는 감사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나에게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확실하게 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더라도 순종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직접 보여주시면서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시는데 한 여인이 찾아와서 대단히 값비싼 향유가 든 옥합 하나를 깨뜨려서 예수님을 섬깁니다. 다 붓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습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36-47)
감사가 없으면 순종도 하지 않고 사랑도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면 사랑하고 모든 것을 바치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그 차이입니다. 사람들이 그냥 감사한다고 하는 것과 정말로 감사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셔도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것이 있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한결같이 믿음이 좋고 한결같이 사랑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많은 경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도 믿음이 흔들립니다. 의심이 있습니다. 갈등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사랑, 진정한 믿음은 결국은 믿는 것, 결국은 사랑하는 것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런 믿음과 이런 사랑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쉽게 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믿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다 갈등과 요동과 흔들림과 의심이 있고 또 다른 여러 가지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넘어 사랑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사랑하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지적으로 결단적으로 믿고 사랑하려고 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믿으려고 작정했고 사랑하려고 작정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믿음, 사랑 이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저절로 되는 사랑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조금 있으면 흔들립니다. 내가 의지적으로 사랑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남편이기 때문에, 내 아내이기 때문에 주님이기 때문에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사랑이 오래갑니다. 이런 의지적인 믿음은 심지어 무언가 이상하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아 보여도 믿습니다. 그래도 사랑합니다. 이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톨스토이 단편소설에 ‘영감님 말씀은 언제나 옳습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 할머니가 영감님 말씀, 영감님 하시는 일은 언제나 옳다고 한다고 영감님이 정말로 다 옳았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말이 다 틀렸고 하는 일이 다 잘못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할머니가 영감님 말씀이 옳다고 한 것은 내 영감이기 때문에 저 분이 하는 말, 저 분이 하는 일은 다 옳다고 봐주고 믿는 것입니다.
찬송가 495장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천국이 천국인 것은 천국 같은 환경, 천국 같은 여건 때문이 아니라 그곳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에 천국이라는 말씀입니다.
참된 순종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따지지 않습니다. 논리적인지, 합리적인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인지 안 될 것인지, 더 좋을지 아닐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논리를 뛰어넘고 합리를 뛰어넘고 계산을 뛰어넘습니다. 그저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같이 사랑했습니다. 비록 죄악이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성이라도 아브라함은 그 성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최고의 계명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둘째도 그와 같으니’ 라는 말을 헬라어 원문으로는 ‘아우토스 호모이오스’ 라고 쓰고 있습니다. 직역하면 ‘그것도 같은 종류다.’ 라는 말입니다. 즉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말이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최후의 심판 장면을 보여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 때 심판주인 임금이 오른쪽에 있는 의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5-37)
이때 의인들이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마25:37-39) 라고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하자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하게 그 사랑은 곧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그렇게 조른 것은 어떻게 하든지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망시키지 않으려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거기다가 하나 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깊은 속마음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너무 좋아합니다. 아무것도 아끼지 않습니다. 때로는 한 사람 안에 있어서도 그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면 몸이 대신 말하기도 합니다. 자기 몸 전체가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면 몸이 제발 알아달라고 신호를 보내기도 합니다.
이처럼 마음 알아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도 사람들이 당신의 마음을 알아주기 바라십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 땅을 보시면서 내 마음 좀 알아주는 사람이 없나 쳐다보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멸망보다 구원을 원하십니다.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은 그 사람이 멸망하는 것보다 구원을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요한복음 3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7)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죄가 있으면 멸망시켜야합니다. 소돔 고모라성은 죄가 있었습니다. 멸망당해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죄가 많아도 멸망시키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속으로, 내가 지금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망시키러 나가는데 누가 나ㅣ를 말려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겁 없이 달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이 부탁하는 것이라고 무조건 들으실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크게 부탁한 것이 있습니다. 가나안 바로 앞에서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40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죽을 고생을 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보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지만 한 번만 살짝 들어가서 가나안 구경만 하고 오게 해 주십시오.” 라고 부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됐다. 그만 끝내라” 라고 아주 냉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신 그리고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고 충성했던 하나님의 종 사도바울이 다른 것도 아닌 자기 몸 때문에 부탁했습니다. 그냥 자기 몸을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서 병을 고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세 번이나 간절하게 부탁했는데 사도바울을 그렇게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됐다. 내가 너에게 준 은혜 그것만으로 말아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이렇게 한 번 두 번 이어 여러 차례 말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 받아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부탁드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열 명에서 다섯 명이면 어떻게 하시겠는지 물었다면 하나님은 또 받아주셨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나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마음을 알아준 아브라함은 하나님 눈에 이쁘기만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이 참 부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결코 부러워하기만 하고 말 것은 아닙니다. 얼마든지 그것이 여러분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깊은 속마음을 헤아려 아십시오. 그렇게 하면 어느 덧 여러분들이 아브라함처럼 다윗처럼 이쁘기만 한 사람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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