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기독교인의 기도
마가복음 9:14~29
병원의 수간호사로 근무하는 한 분이 자정 무렵 교대근무를 시작하면서 낮의 근무일지를 훑어봅니다. 일지를 보던 수간호사는 명단을 보다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맙니다. C. Jackson.. 오래되었지만 단 한 시도 잊은 적이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지방 도시에 살 때 초등학교 2학년 딸의 담임선생이었습니다. 그 선생은 딸에게 더할 수 없는 폭군이었습니다. 딸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엄마 품에 안겨 그 선생의 모진 말에 울고 또 울었습니다. 죽도록 그 선생이 싫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이 지금 자기 환자가 되어서 입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간호사는 다른 환자들과 똑같이 대하겠다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렇지만 병실로 가는 동안 그 분노가 다시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습니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병실 문 앞에 서서 웃는 연습까지 해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병상에 누워있는 그 여자는 너무나 왜소하고 연약한 모습이었습니다. 기억속의 그 괴물선생과는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어린 딸을 그토록 무섭게 겁주었던 그 선생이 한없이 무력해보였습니다.
병상으로 다가갔습니다. 무언가 말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선생이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그런데 그 다음 기도가 나오지 않고 똑같은 기도를 또 하고 있었습니다. 잔뜩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같은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아마도 그 다음 기도가 생각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이 간호사는 간호사의 본능으로 환자의 손을 잡고 같이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주시고’ 주기도문을 끝까지 같이 기도했습니다. 그 순간 지금까지 그렇게 무섭게 쏟아 오르던 분노, 한순간도 떠나지 않던 분노가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한평생 짊어지고 살아왔던 그 무거운 분노의 짐이 짧은 기도 하나에 씻은 듯이 없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셋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다가 내려오셔서 보니 제자들이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말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로 그러는지 물으시자 한 사람이 나아와서 예수님께 “제가 간질병 걸린 우리 아이를 데리고 선생님께 고쳐달라고 왔는데 선생님이 안 계셔서 대신 제자들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무도 고치지 못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19절) 라고 누구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인지 모르는 장탄식을 하셨습니다. 그 아이를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치료해주셨습니다. 아이가 나았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조용하게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28절)
이 물음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29절)
오늘 본문에서 여러분들이 중요하게 생각해볼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장탄식, 한탄 그리고 책망의 이유입니다. 많이 속상하시고 화를 많이 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한탄하시고 책망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을 보면 제자들이 그 아이의 병을 고치지 못했다고 책망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아닙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서 아실 것은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지 않으시면 아무도 그런 일, 그것뿐만 아니라 별 것 아닌 일들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여러분들이 늘 하던 일, 가장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일까지도 주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더 이상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이를 못 고쳤다고 탄식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불쌍한 아이, 그 아이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그 아버지를 앞에 두고 제자들이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이 서로 다투고 말싸움한 것 때문입니다.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14절)
좋은 말로 변론이지 말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아이나 아버지의 고통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가 얼마나 불쌍한가? 만약 내 아이가 저렇다면 얼마나 딱하며 내가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저 아이의 아버지는 얼마나 더 힘들겠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도와줄 수 있을까? 병원에 가면 나을 수 있을까? 병원비가 얼마나 들까? 내가 그 병원비 중 얼마나 도와줄 수 있을지 이런 것들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저런 일을 할 수 없다면 위로라도 해야 합니다. 그 앞에서 어떻게 싸우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닌다고 하고, 예수님의 그 귀한 것을 배우고 있다는 제자들이나 소위 어른들이라고 하는 종교지도자들이 그런 것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고 상대방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아픈 아이를 자기들을 위해서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대단하다고 하더니 그것도 하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잘난 당신네들은 그 아이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지금 이런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늘 그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혹 지도자들은 잘못한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은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주면 좋겠습니다. 정치지도자들, 다른 어떤 지도자들이 잘못하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만 바로 서면 괜찮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한탄하시고 책망하시는 까닭, 첫 번째가 ‘어떻게 그렇게 사랑이 없는가?’ 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 그 한탄, 그 탄식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향해서 책망하고 있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들, 나를 따라온다고 하는 사람들까지도 어떻게 그렇게 사랑이 없는가? 불쌍한 사람, 가난한 사람, 약한 사람, 병든 사람, 나이 들어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그렇게 아끼는 마음, 불쌍하게 생각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지 예수님께서 탄식하고 계십니다.
바울이 개척한 고린도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다른 교회보다 고린도 교회는 부유했습니다. 교인들의 재산이 많았습니다. 신앙생활도 상당히 열심히 했습니다. 다른 영적인 은사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었습니다.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자기만 내세웠습니다. 무엇이 좀 있다 보면 그렇습니다. 서로 편을 만들어서 내 편이, 내 당이 더 크다, 많다, 더 유명하다, 더 잘났다는 자랑을 했습니다. 바울 파, 아볼로 파, 게바 파 이렇게 나뉘어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너희들이 그런 파라면 나는 그리스도 파이다.’ 그리스도 파까지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를 개척하고 다른 곳에 선교하기 위해서 멀리 떠나있던 바울이 이 소식을 듣고 “여러분,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졌고 아무리 잘났고 아무리 유명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탄식했습니다.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쓴 편지가 고린도서이고, 특히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서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썼습니다. 고린도 13장 사랑장 첫머리에서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
이어서 11절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너무 어려서, 너무 몰라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저 돈만 많으면 되는 줄 알고, 내 자식 잘 키워놓고 좋은 대학 보내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내 노후를 위해서 많은 재산을 모아두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내가 세상에서 유명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있는데,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린 아이와 같은 생각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숙한 신자들은 그런 것쯤은 뛰어넘는다는 말씀입니다. 또,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귀하고 잘 나고 대단한 것이 나중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틀림없이 알게 될 것인데, 지금은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정말로 귀한 것이고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는 사랑이 최고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 살면서 어떤 일을 하든지 항상 적용해야할 판단의 기준이 있습니다. 내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하는지, 이런 말을 할 것인지 저런 말을 할 것인가 판단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것이 사랑이냐 아니냐? 사랑하는 것이냐, 아니냐? 저 사람을 사랑하는가? 아닌가? 늘 이 기준을 가져야합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선생님 세상 살면서 첫 번째 잡아야할 삶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자 예수님은 한 마디로 “사랑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또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십시오. 이것보다 더 큰 계명이 없습니다. 이것이 최고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사랑으로 살아야합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예수님께서 그렇게 탄식하고 속상하신 것은 사람들에게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 하나 생각해야할 말씀은 28절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28절)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29절)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도 얼른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그 아이를 치료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도를 했기 때문이고, 제자들이 치료하지 못했던 것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까? 늘 선생님이 함께 계셨지만 지금 안 계십니다. 또 제자들 중 앞자리에 있는 세 사람이 함께 없고 열 두 제자 중 아홉 제자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간질병 걸린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환자를 데리고 와서 고쳐달라고 하는데 가만히 있었을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동안 선생님이 늘 앞장서서 문제를 해결했지만 선생님께서 하셨듯이 우리도 한 번 해보자고 생각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기도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하신 29절의 말씀은 제자들이 기도하기는 했는데 제자들의 기도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에게 있어서도 똑같은 문제입니다. 기도하기는 했는데 능력이 없습니다. 권세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여러 군데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십니다. 구약에서도 기도를 통해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마치 허황된 이야기인 것처럼, 동화인 것처럼 생각하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는 권세가 없습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결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경제문제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당하고 있는 사람은 정말로 힘듭니다. 나중에 믿음에 회의가 생길 정도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기는 하는가? 하나님은 능력이 있는가? 내 기도를 끝까지 들어주시지 않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남편의 이것만 바뀌어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일,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결혼하기 전부터 또 이 아이를 낳기 전부터 기도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시지 않는지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건강문제도 그렇습니다. 건강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귀한 일을 할 텐데 하나님께서는 왜 건강을 주시지 않는지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해도 주시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기도한다고 다 주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응답이 없는 것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본문을 통해서 한 번 찾아봅니다.
먼저 볼 것은 19절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라고 말씀하시면서 화를 내신 일입니다. 이때 ‘세대’라는 말씀은 헬라어 원어로 ‘게네아’ 라는 말로 인종, 족속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이 믿음이 없는 인간들아’ 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이 못난 사람들아, 그렇게 나와 오래 있으면서 이렇게 믿음이 없는가?’ 라는 책망입니다.
또 하나 볼 수 있는 것은 22절의 말씀입니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라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23절) 라고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그 아이 아버지에게 책망하시지만 아이 아버지에게는 연민의 마음이 있어서 ‘믿는 자에게는 능히 못할 일이 없느니라.’ 라고 문제의 핵심을 자상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두 곳에서 공히 하시는 말씀이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믿음을 요구하시는가요? 권세를 불러오는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요? 여기서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흔히 부흥강사들이 하듯 쌍시옷을 쓰면서 ‘믿씁니다.’라고 목이 쉬도록 기도하거나 혹은 산에 올라가서 나무덩이 붙들고 기도하는 것을 생각하는데 비슷하게 맞는 말 같지만 전혀 그것은 아닙니다. 이런 믿음의 결정적인 문제는 능력과 권세의 주체가 ‘나’ 자신입니다. ‘나의 믿음’으로 ‘내가’ 문제를 해결한다, 내 믿음으로 내가 소원을 이룬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믿음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아주 예민한 이 부분을 잘 아시기 바랍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며 내가, 우리가 바라는 것을 해주실지 안 해주실지 모르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 아주 구체적인 좋은 예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눅5:12)라는 말씀인데 이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들어보십시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눅5: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분을 보면 나병환자의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일체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곧바로 역사하셨습니다. 그냥 그대로 치료해주셨습니다. 최고의 믿음을 가졌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최고의 칭찬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백부장입니다.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백부장을 보니 어떤 사람인지 금방 보입니다. 참 좋은 인격, 참 선한 사람, 정말로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보셨습니다. 내가 가서 치료해주겠다고 하자 백부장이 집에까지 오실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말씀만 한 번 해주시면 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눅7:8)
예수님은 병이든지 무엇이든지 말씀 한 마디만 하면 병도 도망갈 수밖에 없고 문제도 해결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듣고 즉각 치료해주셨고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눅7:9) 라고 칭찬까지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당시의 제자들에게 필요했던 것이 무엇일까요? 서기관들과 서로 잘났다고 말다툼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그 아이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마음, 그 아들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힘든 아버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진실로 저들을 위해서 도와줄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당함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큰소리쳤어야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우리는 못나서 이런 일 하나 하지 못하지만 우리 선생님이 오고 계십니다. 우리 선생님 예수님이 오시기만 하면 간질병 정도야 단번에 해결됩니다.” 라고 큰소리쳤어야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에게는 무엇이 필요한가요?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은 어떻게 기도해야할까요? 마찬가지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너무 없습니다. 내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정말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다 그렇게 하니 그렇게 해주어야한다고 생각하는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보다 못난 엄마, 아버지가 되지 말자는 이것밖에 없습니다. 정말로 그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 정말로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병든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조국을 정말로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우리 나라가 그렇게 고통 받다가 단 얼마 만에 이처럼 좋은 나라가 되었는데,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5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당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겠습니까? 남의 일이 아니라 과거 고통당하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조국을 생각하는 것, 아이들을 진실로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 다음에는 믿음입니다. 북쪽에 있는 나라가 어떻게 하고, 그 위에 있는 나라가 어떻게 하고 남쪽에 있는 나라가 어떻게 하고 저 멀리 있는 나라가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 있으면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어떤 나라가 어떤 지도자들이 어떻게 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오시면 이 나라의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내 아들 딸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당당함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할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서십시오. 예수님이 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 가정에 오십시오. 우리 아들딸에게 오십시오. 예수님만 오시면 됩니다.’ 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서 주시는 승리, 멋진 것을 여러분도 누리고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나누어주십시오. 이런 사람이 참된 기독교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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