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닭이 먼저? 달걀이 먼저? (사무엘상 18:1-16)

분당소망교회 2018. 9. 7. 08:34

  

 

  

닭이 먼저? 달걀이 먼저?

 

 

 

사무엘상 18:1~16

 

 

우리말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와 비슷한 질문을 하나님과 사람 관계에 있어서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은혜 받는 것이 먼저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냐?’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 사랑받았기 때문에 사랑받을만한 사람으로 사느냐?’ 아니면 사랑받을 만한 사람으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느냐?’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복을 받았기 때문에 복 받은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사는 것 같습니까? 아니면 복 받을 만한 사람으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의 경우입니다. 특별한 이유 없이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왕은 되었지만 아직 입지가 든든하지 못했는데, 그 입지마저도 희한한 방법으로 든든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런 사울이 하나님의 법을 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리셨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순종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또다시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떠나셨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라는 사무엘상 1614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떠나셨고, 그 후 사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 오늘 본문 10절에서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안에서 정신없이 떠들어대므로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미쳤다는 말이고 미친 데에는 다 그런 까닭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다윗의 경우입니다. 블레셋 장군 골리앗 때문에 나라가 위기에 처했습니다. 골리앗이 하나님을 그렇게 모독하고 계속해서 시비를 거는데도 이스라엘의 장군, 장수, 병사 아무도 나서지 못했습니다. 나라가 휘청거렸습니다. 그런 위기를 참다못한 다윗이 나섰습니다. 그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셨습니다. 기적과 같이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이스라엘에 승리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의 일이 오늘 본문의 일들입니다.

왕 사울의 아들 요나단 왕자가 다윗을 너무도 사랑하였습니다.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다는 말씀을 성경은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1)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3)에서 두 번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한 것이 그냥 말로만 생명같이 사랑한 것이 아니라 진실로 사랑했다는 증거가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라는 4절 말씀입니다. 것은 왕자 요나단이 자기의 왕자 자리, 나중에는 왕의 자리까지도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을 정도로 다윗을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요나단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 왕 사울에게도 사랑받았습니다.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고라는 2절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귀한 일을 한 다윗이 너무 좋아서 함께 살자고 붙든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까지도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6-7)

조금은 지나칠 정도로 사랑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안에서 다윗이 지혜롭게 행했다는 말씀을 세 번이나 합니다.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5),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14) ‘사울은 다윗이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15)

지혜라는 말을 히브리 원어로 보면 조금 더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 원전에서는 지혜를 샤칼이라는 말로 쓰고 있는데 이 말은 총명하다, 분별력이 있다, 통찰력이 있다, 사례 깊게 생각하다, 이것저것을 골고루 함께 생각한다는 것 의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대단히 지혜 있는 사람이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산을 옮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풀지 못하는 것, 다른 사람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산을 옮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했는데,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을 향해서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17:20)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만 있어도 얼마든지 산을 옮길만한 대단한 지혜가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인데 그 지혜가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그 결과 다윗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맨 처음 요나단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요나단은, 저 사람이라면 내가 아버지 뒤를 이어서 왕이 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저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다, 이 나라를 저 사람에게 맡겨도 되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왕 사울까지도 인정했습니다.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더니라는 5절 말씀을 보면 아직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 아직까지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정받고 공인받지 못한 사람을 사울은 저 사람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군대의 장을 맡겼다고 말씀하고 있고, 모든 백성들까지도 다윗을 인정했다고 합니다.

16절에서는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가 자기들 앞에 출입하기 때문이었더라..라고 그 까닭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말씀은 사람들 앞에 들어왔다 나가는 그런 출입을 했다는 말씀의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다윗이 자기들 앞에 나섰다는 말입니다. 곤란한 일이 있을 때 다윗이 먼저 앞장서고 해결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는 일마다 이렇게 인정받았습니다. 지혜로웠습니다. 나서야할 때 제대로 나서고 그리고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제대로 일하는 지혜가 다윗에게 있었다는 말입니다.

거기다가 아주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다윗은 여러 사람에게 인정받았는데 사울의 신하들에게까지 인정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5)

사울 왕이 등장하지 얼마 되지 않은 다윗에게 군대의 장을 맡겼는데, 그것을 신하들이 보고 충분히 그럴만하다고 인정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과 가장 경쟁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사울의 신하들입니다. 왕자 요나단은 그야말로 금수저이고 로열패밀리입니다. 그 자리까지는 다윗이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기와 가장 경쟁적인 자리에 있는 다윗이 자기 자리를 충분히 넘볼 수 있는 그런 입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인정한 것입니다. 저런 사람이라면 군대의 장을 맡겨도 좋다는 그 정도였습니다.

 

이제 5월이 가까워집니다. 5월은 가정의 달이고 어린이주일도 있습니다. 이런 때에는 특별히 자녀들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어떤 자녀가 되기 원하십니까? 자녀들에 대해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평소에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어떤 소원을 하십니까? 인정받는 것,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다윗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맨 처음 사랑받습니다. 하나님께 사랑받고 사람에게도 사랑받습니다. 이 사람에게도 사랑받고 저 사람에게도 사랑받고 경쟁 상대에게도 사랑받고 인정받습니다. 또 지혜로웠습니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없습니다. 다윗은 모든 일들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자식들에게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아들딸이 이렇게 된다면 이것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은 아무리 잘 되어야 결국 자식입니다. 자식이 잘되는 것보다 행복한 것이 없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복은 어떤 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들, 만에 하나 그가 부모를 공경까지는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부모를 모시고 살기만 해도 복이 있습니다. 잘 모시면 더 좋겠지만 혹시 아주 극진하게 모시지 못해도 어른들을 모시고 살기만 하면 복이 있습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어떤 복을 주실까요? 혹 다른 복은 시원찮을 수가 있어도 자식이 잘되는 복은 꼭 주십니다. 이것보다 더 큰 복이 없습니다. 주변을 잘 보십시오. 지금 어른들 모시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런 복을 주심을 기억하십시오. 어른들을 잘 모시고 난 뒤 사람에게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십시오. ‘하나님, 어른들 모시고 사는 것이 쉽지 않은 것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우리 아버님, 어머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제가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라고 하나님께 말해도 좋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하라고 되어있습니다. 귀한 일을 하고 난 뒤에는 하나님께 하나님, 내가 내 민족을 위해서, 내 사비(私費)를 들여서 이런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 그런 저를 기억해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에 비해서 사울의 모습은 안쓰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여자들이 사울을 환영할 때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 라고 다윗을 높이는 노래를 했습니다. 이것은 노래일 뿐입니다. 그래도 올라가는 것은 자기입니다. 다윗을 올리면 더 올라가는 사람은 다윗 위에 있는 사울 자신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견디지 못했습니다.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8-9)

지금 사울의 이 마음속에는 온갖 추한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가장 지저분한 것이 들어있습니다. 오해가 들어있고 질투심이 들어있고 경쟁심이 들어있습니다. 또 모든 사람을 경계하는 경계심이 들어있습니다. 이렇게 살면 인생이 피곤해서 살지 못합니다. 인생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들을 가리켜서 영적인 표현으로 어둠이라고 말합니다. 사울에게 어둠이 가득했습니다.

어둠이 사람 속에 들어오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처음에 손톱만큼 들어온 어둠이 점점 커지게 되고 더 커져서 그 사람을 삼켜버립니다. 자기 자신이 없습니다. 자기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왜 그렇게 사람들을 미워하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사랑했고 저 여자만 있으면 내 평생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결혼했는데 어느새 아내를 미워하고 아내를 버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어둠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보는 사람마다 경쟁적인 사람이 되고 원수가 되고, 처음에는 좋았는데 조금 있다 까닭 없이 싫어지는 일이 있으면 어둠이 들어가서 그렇게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사울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둠이 오래 있게 되면 모든 사람을 죽입니다. 다른 사람을 죽이고 가족을 죽입니다. 살아있지만 생명이 아닙니다. 몸만 살아있고 숨만 쉴 뿐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 가정은 가정이 아닙니다. 죽은 가정이 됩니다. 자기도 죽습니다. 그런 사람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면 국민들이 다 죽습니다.

 

사람 속에 어두움이 있으면 제일 무서운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오시지 않는 것입니다. 어둠이 그냥 들어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받아들여야 어둠이 오게 되어있는데, 어둠을 받아들이게 되면 하나님께서 오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하나님은 당신의 빛을 훼손시키지 않습니다. 요한 11장은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1:5)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분이시기 때문에 어둠이 오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하나님께서 계셨던 사람이었을지라도 그 사람이 어두움을 받아들이게 되면 하나님은 떠나십니다.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떠나시면 생기는 현상 중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옛날에는 그 정도로는 두렵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두려움이 생깁니다. 두려움이 생기는 까닭은 그것을 따라서 어두움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무것도 아닌데 두렵습니다. 두려움이 생깁니다.

똑같은 다윗을 두고 다른 사람들은 다 좋아하고 행복해하고 다 즐거워합니다. 다윗 때문에 행복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사울은 반대로 똑같은 다윗 때문에 두려움에 쌓이게 됩니다. 어두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은 사울은 다윗이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15-16) 라고 말씀하십니다. 똑같은 다윗을 두고 백성들은 좋아하고 행복해하는데 왕 사울은 두려워한 것입니다. 어두움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일인데 다른 사람들은 기뻐하고 같이 즐거워하는데 내 마음이 무겁고 힘들고 이상하게 다른 마음이 생기는 까닭은 어두움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요한일서 2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요일2:9-11)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이것을 알면 힘들지 않습니다. 모르면 힘듭니다. 내가 왜 내 아내를 미워하는지, 내가 왜 내 남편을 존경하지 않는지, 인정하지 않은지 알지 못합니다. 마음은 사랑하고 싶고 인정하고 싶습니다. 마음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를 위해 생명을 바치고 싶습니다. 그런데 안 됩니다. 어둠은 모든 것을 다 죽입니다. 가정을 죽이고 사회를 죽이고 나라를 죽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죽습니다.

 

사울은 질투심에 불이 나서 다윗을 죽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게 됩니다.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10-11)

창을 던졌습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던졌습니다. 완전히 미치게 되었습니다. 무섭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은 알지 못합니다. 그냥 미움이 생기니 미워할 뿐 내가 왜 저 사람을 미워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왜 이렇게 평화 없이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두움이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사사기 시대에 아비멜렉이라는 못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왕이 되고 싶어 못된 짓을 했습니다. 돈으로 악한 사람들을 삽니다. 자기 형제 70명을 죽입니다. 아비멜렉을 사람을 왕으로 삼아야한다고 여기저기서 선동하게 합니다. 시민들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순진합니다. 그 말을 듣고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아비멜렉이 형제들을 모두 죽일 때, 이복형제 요담 하나만 용케 살아남았습니다. 요담이 아비멜렉으로 왕을 삼은 것을 보니 기가 막혔습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을 왕으로 세운지 너무 딱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요담은 세겜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아비멜렉을 왕으로 모신 것이 잘 한 것이라면 참 좋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도 행복할 것이고 왕 아비멜렉도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것이 잘못한 것이라면 아베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여러분들을 다 태울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서 불이 나와서 아비멜렉을 태우게 될 것입니다.”

3년이 지났습니다. 그렇게 사이가 좋아 왕으로 삼고 신하로 삼던 그들 사이에 불화가 생겨 전쟁이 일어납니다. 천 명이나 죽었습니다. 이 아비멜렉에게 높은 곳에서 여자 한 사람이 맷돌을 던집니다. 아비멜렉이 그 맷돌에 맞아 두개골이 깨어져서 죽습니다.

 

어둠은 그렇게 만듭니다. 어둠은 모든 사람을 다 죽입니다. 생명만 살아있지 죽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둠이 그렇습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 걱정 많으실 것입니다. 무엇이 이런 일을 만들어 가는지 잘 알아야합니다. 제대로 알아야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사랑하는 아들딸들의 가정들, 또 저들의 아들딸들의 가정들을 여러분들이 지키고 챙길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도 이것을 알고 기도해야합니다.

 

사람에게는 소원이 많습니다. 바르게 살고 싶고 사랑하면서 살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지혜롭게 살기 원합니다. 인생 살면서 미워하지 않고 이 사람 저 사람 다 사랑하고 싶고 어떤 일이 있을 때 겁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고 싶은 소원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마음대로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고 특히 아내를 정말로 사랑하고 남편을 인정하고 존경하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제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이 가만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 하나님이 도우시면 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방법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누구든 어둡게 살고 싶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서 살고 싶겠습니까? 원수까지도 사랑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안 되는 까닭은 어둠을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오셔야하는데 어둠을 자기가 붙들고 있기 때문에 오시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기 원하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다 받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군데서 그 말씀을 하십니다.

 

먼저 이사야서 55장에서는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55:1) 라고 말씀하십니다. 와서 풍요롭게 행복하게 살라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초청하십니다. 로마서 10장은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10:11-12) 라고 말씀하십니다. 넉넉하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5:4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도 옳지 못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하나님이라고 맛보기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데 아무렇게나 무조건 주시고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지만 억지로 먹일 수는 없습니다.

구원의 은혜부터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 원하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십니다. 누구든지 내가 내미는 손을 잡고 구원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억지로 구원을 주시지 않습니다. 받지 않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지 못하십니다.

로마서 1장은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1:1) 라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원 자체가 그렇습니다. 하물며 놀라운 복,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은 더 그렇습니다. 받을만한 사람에게만 주십니다. 대표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라는 출애굽기 3319절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복을, 그런 놀라우신 은총을 받지 못할 사람에게는 안 주십니다. 주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안타까운 일들까지 있습니다. 히브리서 6장은 말씀합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6:7-8) 주시는 복을 받지 못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결말은 이렇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초대 왕 사울도 그 다음 왕 다윗도 두 사람 다 하나님 은혜를 받았습니다. 굳이 따진다면 당초에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더 받은 것은 사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어마어마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나귀나 찾으러 다니던 사람이 졸지에 왕이 되었고 왕이 되어서 왕 노릇 제대로 하지 못할까 하여 입지까지 든든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런 사람이 이제 조금 이루었다 싶으니 그만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마치 자기가 만든 것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불순종했습니다.

결과는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하나님도 사울을 떠났습니다. 그 사람이 떠나자 하나님도 떠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떠나시자 사람들의 사랑과 인정과 존경도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어두움으로 가득했습니다. 불안 초조가 있고 두려움만 가득한 아주 추하고 초라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에 비해서 받은 은혜가 작았습니다. 그러나 작은 은혜를 받은 다윗이 마치 큰 은혜를 받은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한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지혜가 찾아왔고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이 찾아왔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순간순간 필요한 것마다 넘치도록 주셨고, 권세와 능력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이런 은혜가 있습니다. 본문 12절에서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14절에서도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로마서 2장에서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2:9-1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한 일을 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반드시 궁지에 몰리고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영광과 명예와 평화를 반드시 누리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