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아는가?
마태복음 14:22~33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부근을 지나가실 때, 예수님께서 거기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그 소문을 듣고 부근 여러 마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모여 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만난 예수님은 말씀도 전해주시고 그 중에 있는 환자들도 고쳐주셨습니다. 날이 저물었을 때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배를 곯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능력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약 2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넉넉하게 먹고 상당히 많이 남았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런 기적을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셨습니다. 그 기적을 본 사람들은 정말로 대단하신 분이라고 환호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빨리 떠나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재촉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 말씀대로 배를 타고 호수를 가로질러 건너편으로 갔습니다. 호수가 워낙 큰지라 한참 시간이 걸렸습니다. 저녁 무렵에 떠났지만 새벽 서너 시가 되어도 아직 건너편에 닿지 못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 광풍이 불었습니다. 아주 강력한 폭풍이었습니다. 갈릴리 호수의 모든 상황에 익숙한 어부 출신 제자들이 여러 명 있었지만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정말로 큽니다. 폭이 13킬로미터가 되고 길이가 21킬로미터가 됩니다. 유대인들은 갈릴리 호수를 호수라 부르지 않고 바다라고 부르고, 다른 사람들이 호수라고 하면 아주 싫어합니다. 갈릴리 호수는 광풍이 불기로 유명합니다. 그런 광풍이 부는 까닭이 있습니다. 호수 그리고 호수를 둘러쌓고 있는 산들의 고도차이 때문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표면이 해발 마이너스 212미터로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민물호수입니다. 그리고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그 높이가 600미터, 최고가 610미터입니다. 호수 면과 주변 산들의 고도 차이가 약 820미터 정도 됩니다. 특히 밤에 공기가 차가워지면 산은 차가워지고 호수 면은 따뜻하기 때문에 찬바람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게 되는 냉장고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아래의 더운 공기가 위로 올라가면서 광풍을 만들게 됩니다. 안데스 산맥에 이런 호수가 여러 개 있습니다. 그 안데스 산맥에 있는 호수 가운데는 시속 120킬로미터의 광풍이 불 정도로 광풍이 매우 심합니다. 그 누구도 견디지 못할 정도입니다. 심지어 거기 사는 새들도 견디지 못합니다. 당연히 아주 능숙한 뱃사람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오래 전에 실화를 영화로 만든 <퍼펙트 스톰>이라는 영화가 상영되었습니다. 고기를 잡다가 제대로 못 잡자 버뮤다 지역으로 고기를 잡으러 나가는데 거기서 풍랑을 만납니다. 아주 능숙한 뱃사공과 유명한 영화배우가 역할을 한 선장은 그 광풍을 뚫고 나오려고 합니다. 헤쳐 나올 것도 같습니다. 그러다 결국 구조 신호를 보냅니다. 헬리콥터가 뜹니다. 관객들은 결국 구조되든지 그 파도를 헤치고 나올 것으로 기대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나지 않습니다. 영화는 끝이 납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입니다. 그 지역 바다에 아무것도 떠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 죽고 만 것입니다. 바다에 나와 보면 실제로 이런 일이 많습니다. 이것만은 도저히 헤쳐 나가지 못한다고 생각되는 폭풍이 있습니다.
본문 22절에 유심히 볼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22절)
첫 번째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볼 것은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내신다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 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은 제자들은 먼저 가고 스승인 예수님은 남아서 뒷정리를 하신다는 말입니다. 무언가 이상합니다. 스승과 제자의 역할이 뒤바뀌었습니다. 당연하게 선생님이 먼저 가시고 제자들이 남아서 뒷설거지를 해야 하는데 반대였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라고 지시를 하셨는데 그것도 재촉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호수 주변에서 한참 사셨기 때문에 갈릴리 호수의 상황에 대해서 잘 아십니다. 그 시간이라면 배를 타고 건너편까지 가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이라는 것을 아실 것이고, 어느 때쯤에 건너편에 도착하는지도 대강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에 배를 타고 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가까운 곳도 아니고 멀리 건너편까지 가라고 말씀하셨고, 거기다 재촉까지 하셨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광풍 속으로 제자들을 밀어 넣는 것 같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의도적으로 폭풍 속으로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주 의도적으로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고난 속으로 보내십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요셉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하신 일들을 보면 하나님께 죄송한 말씀이지만 너무 잔인하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맨 처음 노예로 팔려갈 때의 장면을 생각해봅니다. 당시 요셉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습니다. 형들이 대상(隊商)들에게 동생을 팔았습니다. 요셉은 끌려갔습니다. 요셉은 아마 장난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팔려갔습니다. 끌려가는 요셉이 어떤 모습을 보였을지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생각만 해도 애처롭고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잔인할 수 없고 그렇게 애처로울 수 없습니다. 요셉은 끌려가면서 수도 없이 ‘제발’이라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애걸복걸도 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다복한 가정의 최고로 사랑받던 귀여운 아들이었습니다. 열 두 형제 중 제일 사랑받는 열한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랑받던 귀여운 아들이 노예가 되었습니다. 노예로 팔리는 것도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보고 뒤에서 보고 벗겨서도 보고 다 뒤져본 후 가치를 매긴 후 노예로 팔려갑니다.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 노예로 팔려갔지만 요셉은 주인에게 인정받아 살만했습니다. 노예라도 그 정도로 계속 지낼 수만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죄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려고 하다 그것 때문에 도리어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안 풀려도 그렇게 안 풀릴 수 없고 안 되어도 그렇게 안 될 수가 없습니다.
감옥에서 같이 갇혀있던 나라의 최고위직 관리들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힌 것이 억울한 누명이라는 것까지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장관급 되는 한 사람이 출감하면서 단단히 약속했습니다. 자기가 나가기만 하면 요셉이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에 갇혔다는 것을 확인해주고 누명을 벗겨주겠다고 단단하게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철석같았던 그 약속이 2년이 지나도 감감 무소식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안 풀려도 이렇게 안 풀릴 수 있습니까? 해도 해도 너무한 인생입니다.
우리가 인생 살다보면 이럴 때가 있습니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이것도 안 풀리고 저것도 꼬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요셉의 지질이도 안 풀리고 꼬이기만 하는 인생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연출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노예로 팔린 것, 괜찮게 보이던 여주인이 참으로 못되게 요셉을 유혹한 것, 그 유혹을 뿌리친 것 때문에 누명을 씌워 감옥에 집어넣은 것, 나가기만 하면 누명을 풀어주겠다고 철석같이 수없이 단단히 한 장관의 그 약속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임을 요셉도 알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형들을 만났을 때 창세기 45장에서 요셉은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 속으로 요셉을 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과 달리 때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고난당할 것을 뻔히 아시면서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일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습니다. 가나안에 흉년이 들어 먹고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온 집안사람들을 데리고 짐을 싸서 이집트로 이주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인생 최악의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아내를 동생이라고 속였다가 아내를 바로에게 빼앗길 뻔했습니다. 나중에 아내가 무사히 돌아오기는 했지만 아브라함은 한동안 지옥을 헤맸을 것입니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희한한 것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 아브라함과 똑같은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가나안에 흉년이 들어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이 했던 것과 똑같이 이집트로 이주하려고 모든 준비를 다하고 출발했습니다. 한참 갔습니다. 한참 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삭을 불러 이집트로 내려가지 말라, 내가 너를 챙기고 지켜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그 말씀을 듣고 이집트로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난번에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내려가려고 할 그때에도 하나님께서 충분히 말릴 수 있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내버려두셨습니다. 그러나 아들 이삭은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미리 챙겨주셨고, 아브라함은 그대로 내버려두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고난당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는 항상 이유가 있습니다. 그냥 하시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세가 수행을 합니다. 수행하는 길에 천사를 만나 그 천사와 동행합니다. 모세와 동행하던 천사가 모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하게 됩니다. 하나는 아주 가난한 어촌의 고깃배를 천사가 바다에 가라앉혀버린 것입니다. 이제 그 마을 사람들은 제대로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또 하나, 길을 가다가 미남 청년을 만났는데, 천사가 까닭 없이 그 미남 청년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모세의 화가 점점 더 올라옵니다. 또 하나 더 있었습니다. 무너져가고 있는 이교도의 성벽이 있었습니다. 천사가 이교도의 성벽을 수리하고 제대로 세워주었습니다. 모세가 참다못해 천사에게 크게 화를 냅니다. 화를 내는 모세에게 천사가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 번째, 그 가난한 어촌에 극악무도한 해적들이 고깃배를 빼앗으려고 오고 있었다. 만일 그 어촌에 고깃배가 그대로 있었다면 잔인무도한 해적들은 그 고깃배를 빼앗기 위해서 어촌의 온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말았을 것이다. 내가 한 일이 잘못인 일인가? 그리고 미남 청년의 일은, 지금 보면 멀쩡하고 괜찮은 젊은이지만 얼마 있으면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나는 확실히 알았다. 저 사람은 얼마 있지 않아서 수많은 다른 젊은이들을 죽일 사람이 될 것이었다. 모세, 내가 그 젊은이 한 사람을 죽이고 많은 다른 젊은이들이 살리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내가 한 사람 젊은이를 죽인 것이 정말 잘못인가? 또 무너져 가고 있던 이교도 성벽 안에는 수많은 보물들이 숨겨져 있었다. 그 성벽이 무너지게 되면 성벽 안에 있는 보물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그 이교도들은 그 보물로 악한 일을 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내가 그 보물이 드러나지 않도록 성벽을 세워주고 일으켰다. 내가 잘못한 것인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고난당하게 하신 것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말씀하시는 것이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라는 33절 말씀의 고백입니다. 이 갈릴리 풍랑을 겪기 바로 전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었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은 우리가 귀로만 듣고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믿음 있는 사람만 볼 수 있는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어른이든지, 아이든지, 젊은이든지 나이가 든 사람이든지 누구든지 눈이 있는 사람들은 다 볼 수 있는 기적이었습니다. 그런 기적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고 오로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적을 만드신 예수님은 누구신가요? 하나님입니다. 이것을 제일 잘 본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대단하시다는 정도까지는 생각하고 더 이상 나가지 못했습니다. ‘우리 선생님은 대단하시다, 저런 선생님을 모시고 있는 우리 또한 대단하다.’ 이것만 생각했지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런 놀라우신 주님의 능력과 권세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공포가 다가오자 무서워하기만 했습니다. 그 주님을 찾을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주님을 찾기만 하면 그 주님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오셔서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는 주님이셨는데, 그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기적, 기적 같은 일 그리고 기적 같은 선물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잘 주시지 못하십니다. 그런 선물을 주셔서 결과가 잘 되는 일들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선물이라도 기적이라는 선물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 그런 것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능력을 베풀어주셔서 이런 기적, 저런 기적적인 일, 놀라운 선물을 주셨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렇게 많은 귀한 것을 받고서도 주님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고난을 당한 후입니다. 그때서야 알게 됩니다. 고난을 당하고 많은 돈을 쓰고 많은 고통을 받고 난 뒤에서야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인생의 주인, 역사의 주인,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 고통을 주신 것은, 고통 속으로 밀어 넣으신 것은 제자들에게 이것을 알게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이라고 부르는 내가 누구인가? 나는 세상의 주인 하나님이다.’ 제자들만은 이것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요셉은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정말로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일들, 큰일뿐만 아니라 작은 일들까지 모든 일들에 있어서 전적으로 주관자이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잔인하게 자기를 노예로 팔아버린 것이 형들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고통을 통해서 고난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여주인 역시 혹 좋은 사람은 아니었는지 모르지만 어떻게 그렇게 악하게 할 수 있는가 생각했습니다. 그것도 알고 보니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절대로 자기를 잊어버릴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감감무소식으로 잊어버릴 수 있는가..?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께서 하셨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잊을 사람이 아니었는데 잊은 것은 하나님께서 잊도록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나중에 형들에게 “형님들 나를 이리로 보낸 분은 형님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다시 설명했습니다. 요셉은 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 ‘하나님 앎’을 얻었습니다. 이런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 ‘이집트의 지존자’ 바로가 한 고백을 눈으로 다시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회사의 위 사람들로부터, 경영자로부터 혹은 사업을 할 때에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이런 사람이 되고, 이런 복을 받으시고, 이런 인정을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선물을 받기 원합니다.
창세기 41장의 말씀입니다,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바로라 온 땅에서 네 허락이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창41:38-44)
여러분, 바로 전에 요셉이 어떤 위치였습니까? 장관도 아니었고 일반 시민도 아닌 노예였습니다. 노예 중에서도 죄를 지어 감옥에 갇힌 노예였습니다. 인생 최하위에 있던 요셉이 한순간 그 나라 최상위로 올라갔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주십니까? 그리고 고생은 했지만 그 고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심을 확실하게 알았던 요셉에게 하나님께서는 80년간 세계 최강국 이집트의 2인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살렸습니다. 나라가 부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자기 집안을 살렸습니다. 여러분, 이런 분들이 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이런 사람이 되도록 여러분이 키우시고 가르치십시오. 보여주십시오. 길을 지도해주십시오. 그냥 대강 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가르치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을 봅니다. 이집트에서의 고난은 결단코 인생에서 또다시 있어서는 안 될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아내, 산산이 부서질 수밖에 없었던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하나님 한 분,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절체절명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일로 하나님을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말로만 알았습니다. 머릿속에만 있었습니다. 관념 속에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일로 말미암아 삶의 가장 구체적인 한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큰 일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일도 하시는 하나님, 이 일, 저 일 모든 일도 다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알았고 요셉도 알았습니다. 나의 하나님은 세상의 주인이시고 모든 것의 주관자이시다, 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만 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겁낼 것, 두려울 것이 없고 못할 것이 없다는 믿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대단한 것을 주셨습니다. 담대함을 주셨고 능력을 주셨고 최고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2장에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창12: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3장에서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창13:14-1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창세기 22장에서는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니’(창22:17-18) 라고 약속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풍랑으로 예수님을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14:1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제자들에게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방언 한 번 하고 그치는 정도가 아닙니다. 별 볼일 없던 제자들이 이제는 놀라운 권세를 가진 사도가 됩니다. 평생 한 번 일어서지 못하던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 중풍 병자를 쉽게 치료하는 사람들, 심지어는 죽은 사람도 다시 살게 하는 권세 있는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고난이 오면 은혜가 함께 옵니다. 그러나 고난이 왔다고 모든 사람들이 다 은혜 받는 것도 아니고 다 똑같은 은혜를 받는 것도 아닙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적게 받는 사람도 있고 큰 은혜를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얼마나 알게 되었는지 여기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걸 맞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혹시 지금 고난을 당하는 분들이 계신다면, 또 혹시 이후에 고난을 당하는 일이 있다면 ‘이제는 끝이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 더 이상 길이 없다, 나는 갈 곳이 없다.’ 라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하나님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여러분의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한 길은 항상 있습니다. 끝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 31절에서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어떤 고난이든지 고난을 통해서 우리 주님을 조금이 아니라 제대로 아십시오. 여러분의 고난이 복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정말 좋은 것이 있습니다. 고난이 오기 전에 주님을,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지 않고도 내가 믿는 예수님 그 예수님이 바로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제대로 아십시오. 고난이 아예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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