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창세기 43:8~14
부모님 계신 분들 가운데 혹시라도 어떤 까닭에서든지 부모님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어둡게 하고 아프게 하신 분들은 안 계시리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 언젠가 야곱이 외삼촌에게 쫓기고 있을 때 ‘선악 간에 야곱에게 아무 말하지 말라.’ 라고 외삼촌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연세 드셔서 생각이 좀 덜 미치고 모자라도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려야 합니다. 얼마나 더 계시겠습니까? 자식들이 조금만 더 부모님을 생각하면 부모의 마음이 아주 행복해집니다.
펄벅의 소설 <대지> 마지막 무렵 장면은 자식 가진 부모들의 마음을 씁쓸하게 합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던 왕룽이 많이 늙었습니다. 거의 모든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동안 살던 좋은 집도 자식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왕룽은 옛날 살던 작은 흙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만, 땅만은 절대 팔 수 없었습니다.
장남과 차남이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왕룽과 두 아들, 셋은 함께 집안 소유의 땅을 둘러봅니다. 두 아들의 뒤를 따라가던 왕룽이 둘째가 첫째에게 하는 말을 그만 듣고 맙니다. “형님, 이 땅을 팔아 둘이 공평하게 나눕시다.” 그 말을 들은 왕룽은 울면서 소리 지릅니다. “얘들아,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이 땅만큼은 절대로 팔아서는 안 된다.” 두 아들이 아버지에게 맹세하듯이 말합니다.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땅을 팔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왕룽의 절규가 이어집니다. “이놈들아, 땅을 팔기시작하면 집안이 망한다. 우리는 땅을 파먹고 살아왔다. 그리고 또다시 땅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너희들도 땅만 가지면 살 수 있다. 누구라도 내 땅만큼은 빼앗을 수 없다.” 노인 왕룽은 몸을 굽혀서 흙을 한 줌 손에 쥡니다. 그리고 그것을 쥔 채로 중얼거립니다. ‘만일 땅을 파는 날에는 그것이 마지막이다.’ 소설은 그 다음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안심하세요. 아버지 안심하세요. 땅을 팔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들은 노인의 머리 너머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소설 속의 왕룽의 모습이 너무 슬픕니다. 저는 대지를 여러 차례 읽으면서 특히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읽을 때마다 소설이지만 왕룽이 그때 차라리 이렇게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얘들아, 땅만은 꼭 안 팔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꼭 팔아야한다면 팔아라. 어차피 이제는 이 땅은 내 것이 아니고 너희들 것이니 팔아라.’
요셉이 이집트 총리였을 때 세계적인 대기근이 닥쳤습니다. 기근이 수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야곱의 집안은 자식들을 보내어서 지난 번 이집트에서 사온 곡식으로 겨우 살아왔지만 그때 사온 양식이 다 떨어졌습니다. 야곱이 자식들에게 다시 이집트에 한 번 다녀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야곱의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지난번 일을 다시 설명했습니다. “아버님, 일을 아버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곡식 사러 갔을 때 우리가 정탐꾼의 누명을 썼습니다. 온갖 해명을 다했지만 누명은 벗겨지지 않았습니다. 해명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가는 것뿐입니다. 안 데리고 가면 우리는 곡식을 사지 못합니다.”
굳게 버티던 야곱이 어쩔 수없이 항복합니다. 자기는 굶을 수 있어도 어린 손주들을 굶게 할 수 없었습니다.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가거라. 그리고 이집트 총리께 드릴 예물도 준비해라. 돈도 많이 가지고 가거라. 지난번에 곡식 값을 받지 않았으니 그것과 이번에 살 것까지 두 배로 가지고 가거라.” 라고 말하면서 야곱은 야곱의 전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말을 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야곱은 본래 항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도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얍복 강가에서 씨름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셨습니다. 새벽이 되어서 하나님의 사자가 돌아가셔야 하는데 야곱이 계속해서 붙들고 늘어졌습니다. 야곱이 이겼습니다. 가셔야하니 어쩔 수 없이 야곱의 엉덩이뼈를 쳐서 뼈가 부러졌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겨우 갈 수가 있었습니다. 뼈가 부러져도 야곱은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야곱이 이제 드디어 항복한 것입니다. 어떻게 항복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데리고 가신다면 할 수 없지..’ 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야곱 인생의 전환점입니다. 큰 일이 있을 때, 가슴 아픈 일이 있을 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놀랍고 두려운 일이 있을 때 여러분이 얼른 생각할 것은 ‘이것이 인간의 일이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냐?’ 여기에만 가면 인생이 어렵지 않습니다. ‘도대체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가? 과연 이것이 인간의 일이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냐?’ 얼른 보십시오. 그러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여러분은 어른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인생은 이렇게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지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주변에 인생은 이렇게 사는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인간의 일이라면 애를 쓸 필요가 있습니다. 한 번 해보는 것입니다. 용을 써봅니다. 발버둥 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아무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애쓰면 애쓰는 만큼 손해만 보고 힘들기만 합니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사람까지도 힘들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빨리 항복해야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제대로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야곱이 이제 항복했습니다. 고생고생하고 항복했는데, 마지막에 한 이 항복의 고백은 욥의 고백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많이 늦었습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많은 재산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자식도 열이었지만 그 열자식이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랬을 때 욥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멋진 고백을 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일이 아니라 인간이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인 줄 알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엎드렸습니다. 그때 욥의 그 모습을 욥기 1장은 기록합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0-21)
‘하나님, 다 하나님께서 하셨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언제나 옳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좋은 것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필경은 좋은 일일 것입니다.’ 라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라고 말합니다. ‘잘하셨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틀림없이 잘 될 것입니다. 틀림없이 좋을 것입니다.’ 라는 고백을 미리 드리고 있습니다. 즉각적으로 그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자가 인생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이제 우리는 야곱이 하나님께 항복하고 난 다음의 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이집트로 갔습니다. 이집트 총리를 만났습니다. 넘치는 환대를 받습니다. 큰 잔치 상을 받았습니다. 발 씻을 물을 대접받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대접입니다. 그리고 인질로 잡혀서 얼마동안 고생했던 시므온도 석방되어 함께 잔치자리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온 집안 식구들이 조마조마했던, 마음 고생했던 막내 베냐민, 혹시나 데리고 갔다가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맘 고생하게 했던 막내 베냐민은 다른 형제보다 다섯 배를 더 받았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다섯 배 더 받은 물질이 문제가 아닙니다. 걱정이 전부 다 기우였고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고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으로 주셨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거기다 드디어 이집트 총리가 정체를 밝힙니다. ‘형님들, 나는 요셉입니다.’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번에도 뵙고 이번에도 뵈었습니다. 그러나 뵐 때마다 눈을 들어서 이집트 총리 얼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발치만 쳐다보았습니다. 세계 최강국 이집트 제 2인자 총리입니다. 고개를 들어서 쳐다볼 수 없었던 그 총리가 자기들의 동생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을 들어 쳐다보니 과연 자기네들의 동생, 노예로 팔아먹었던 동생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형님들, 아직 흉년이 5년이 더 남았습니다. 아버님 모시고 오십시오. 이제 고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가족들 모시고 올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아버지를 위해서는 특별히 황금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이 좋은 소식이 야곱에게 전해집니다. 야곱이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귀를 의심합니다. 자식들의 말을 의심합니다. 그러다 요셉이 보낸 황금마차를 보고서야 정신 차리고 믿었습니다.
이십 수년 전에 그렇게 사랑했던 아들 요셉이 죽었습니다. 그 요셉을 야곱의 가슴에 묻고 살았습니다. 요셉의 무덤이 야곱의 가슴에 있었습니다. 이제 그 무덤이 없어졌습니다. 한이 다 풀렸습니다. 야곱이 말합니다.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다.” 그때 야곱이 틀림없이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베냐민을 보낼 걸…… 바보같이 내가 왜 그렇게 했나? 왜 몰랐던가? 그랬다면 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더 빨리 만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동안 수 날을 밤잠을 자지 못하고 고민 고민했던 일들, 그런 일들도 없었을 것이다. 시므온이 감옥 속에서 얼마나 고생했나? 시므온도 덜 고생했을 것이고 어린 손주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할아버지만 찾을 때 얼마나 못난 자기를 탓했던가? 내가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나?’ 이렇게 후회를 했을 것입니다.
야곱이 왜 베냐민을 못 보냈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세상의 주인이시고 하나님은 당신의 자식들을 절대로 죽을 어려움을 당하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바로 믿으십시오. 제대로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주인이시고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지극히 사랑하신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만 믿으면 세상에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겁날 것 없고 부러울 것도 없습니다.
신자에게는 이 하나님이 계십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이 믿음이 없어서 두렵고 때로는 욕심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욕심이 인간들을 한없이 괴롭힙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1장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식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말씀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참으로 밉상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너무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쁠 구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잘못해도 너무 잘못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하실 수밖에 없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서 떠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그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잘못한 것은 맞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의 아버지이고 너희들은 내 자식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종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사41:8).. ‘내 자식들아, 내 새끼들아’ 라고 몇 번이나 부르셨습니다.
‘내가 땅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노라’(사41:9).. ‘자식을 싫어해서 버리는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밉상 받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잘하지 못하고 대강의 믿음만 가지고 살아가는 여러분이라고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에 비하면 얼마나 예쁘겠습니까? 이것을 믿고 살아가야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 사랑하십니까? 나를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게 하실 만큼 사랑하십니다. 이것을 믿어야합니다. 이 정도라면 아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양복을 사주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와이셔츠 하나 더 안 붙이겠습니까? 양복입고 신을 신발 한 켤레 안 사주시겠습니까? 맨발로 가게 하시겠습니까? 양말 안 사주시겠습니까? 믿어야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할 정도로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인생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간에 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방법이고 그 결과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내 마음에 조금 안 든다고 하나님께서 나를 미워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고맙습니다. 어련히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맡기면서 그 결과가 만일 어려운 일을 당하고 속상한 일, 가슴 아픈 일을 당하고 때로는 실패를 했다고 할지라도 그것도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시는 과정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원통한 일까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럴 수 있을까? 그러실 수 있습니다.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원통한 일, 실패, 가슴 아픈 일을 당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무궁무진합니다.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잠시 힘들다고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하지 말고 끝까지 믿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또 실제적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런 믿음 안에 있으면 우리 인생은 절대로 힘들지 않습니다.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잘해주시려고 하시는데 내가 속상할 일이 어디 있습니까?
야곱이 베냐민을 안 보내려고 버티고 또 버티었습니다. 그러다가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자기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들까지 죽을 고생을 다 시켰습니다. 죽게 되었을 때 어쩔 수없이 포기했습니다. 참 미련한 모습입니다. 왜 이런 미련한 모습을 보입니까? 여러분은 그런 미련한 모습을 보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미 경험을 해주셨습니다. 외삼촌과 어려웠을 때 그 문제도 잘 해결해주셨고, 형님하고 어려웠을 때도 그랬습니다. 에서가 사람을 400명이나 보냈습니다. 마중하려고 400명이나 데리고 왔겠습니까? 오늘날로 말한다면 야곱이 수면제를 먹어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식구들은 다 자고 있는 밤중에 일어납니다. 그러다 보냅니다. 소유물을 전부 다 얍복강 건너로 보냅니다. 네 아내 다 보냅니다. 자식들 전부 다 보냅니다. 성경은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부터 야곱이 문제가 나아집니다. 야곱을 둘러싸고 있던 재산, 사람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강 너머로 다 보내고 나니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씨름합니다. 그러면서 그때부터 일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모든 소유, 재산, 사람들 다 보내고 나 홀로 있을 그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야곱은 그동안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잊어버리고 있다가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하나님과 제대로 만나기만 하면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문제가 없습니다. 가슴 아플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것, 특별히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 귀하게 여기는 것,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 그런 것과 떨어질 때, 세상 사람들이 이별이다, 상실이라는 말을 하는 것들이 여러분으로부터 떨어질 때 여러분은 하나님과 제대로 만날 수 있고 사람도 제대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야곱이 강 너머로 보낸 재산이 없어졌습니까? 하나님이 빼앗아가셨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주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 갔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강 너머 먼저 갈 뿐인데 이것을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끝까지 쥐고 있어야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강 너머로만 보내면 됩니다. 다음에 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빼앗아 가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주십니다. 다 보내고 나면, 떨어지고 나면, 결별하고 나면 그때부터 진정한 만남이 됩니다. 하나님과 만나게 되고 사람과 제대로 만나게 됩니다. 사람이 좋습니다. 세상이 좋습니다.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베냐민을 떠나보내는 것에는 또 하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야곱이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베냐민을 떠나보낸 것 그 정도가 아니라 야곱의 집착을 떠나보낸 것입니다. 야곱이 얼마나 집착이 강한 사람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베냐민을 떠나보낸 그 결단으로 야곱 일생에 있어서 모든 훈련이 종결 되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시험 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시험 치는 것 힘들지 않았습니까? 할아버지 할머니 될 때까지 시험 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통과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보시니 그만 테스트해도 되겠다는 판단을 내리신 것입니다. 야곱의 모든 문제가 다 끝났습니다.
이 결과를 놓고 볼 때 요셉을 잃고 난 십 수 년 동안 슬피 울며 고통하며 아들의 무덤을 가슴 속에 담고 살아왔던 야곱이 얼마나 어리석었습니까? 그렇게 잠 못 자고 그렇게 슬퍼하며 울면서 지옥에 가서 자식을 보겠다고 한 일들이 얼마나 바보 같은 일입니까? 발버둥 쳤지만 아무도 야곱의 슬픔을 위로해줄 수 없었습니다.
묻습니다. 혹시 이전에 그렇게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시던 그 무엇을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까? 잃어버려서 가슴 아프고 원통하고 속상한 것들이 있습니까? 얼른 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빼앗긴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상실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는 것으로 받으십시오. 이제는 이빨이 없는 독사가 되고 맹수가 됩니다. 아무런 고통을 줄 수 없습니다. 내가 그것 때문에 왜 그렇게 힘들어했는가? 쓴 웃음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아! 하나님께서 하셨구나..’ 생각하면서 웃음을 지을 수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앞으로 나는 이것만큼은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겠다, 이것만큼은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 이것만큼은 꼭 얻어야 되겠다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도 놓으십시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내 자식만큼은 누구보다 더 훌륭하게 키우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것도 놓으십시오. 여러분이 용을 써서 자식을 키우는 것이 자식을 버리는 것인지 잘 키우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노력은 하십시오. 할 만큼만 하고 얼른 던지십시오. 잃어버리기 전에 먼저 놓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은 기술자이십니다. 최고로 만들어주십니다. 여러분의 인생도 건강도 사업도 여러분의 자식도 최고로 하나님이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킨다고 하면서 망칠 수 있습니다. 다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잃어버릴 것은 잃어버리게 하시고 지킬 것은 다 지킵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자식이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이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더 잘 지켜주십니다. 놓으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의 행복입니다. 그냥 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 놓았습니다. 알아서 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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