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람 되라!
마태복음 15:1~4
고대 중국 송나라 사상가 장자에게 아주 좋은 입씨름 상대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혜시였습니다.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저서가 무려 수레로 다섯이나 되는 박학다식한 사람이었습니다. 혜시는 언변에도 뛰어났습니다. 당시 그를 당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혜시도 장자에게는 번번이 이기지 못하고 당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 혜시가 양나라의 재상이라는 높은 벼슬에 앉게 됩니다. 장자가 어느 날 양나라를 지나다가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양나라의 수도로 들어갔습니다. 못된 사람 하나가 재상 혜시를 찾아가서 “재상님, 장자가 재상님을 찾아온다고 하는데 왜 오겠습니까? 필시 그 세치 혀를 놀려 재상 어른 내쫓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혜시가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덜컹했습니다. 사흘 밤을 잠자지 못하고 전전긍긍했습니다. 자기로서는 도무지 장자를 이겨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장자가 전갈을 보냈는데도 사흘 동안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장자가 낌새를 알아챘습니다. 사흘 째 되는 날 불쑥 혜시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네, 남쪽 나라에 봉황이라는 새가 살고 있다고 하는데 들어본 적이 있는가? 들어본 적이 있지?” 장자가 다시 말합니다. “이 새는 어찌나 도도한 지 벽오동 아니면 앉지도 않고, 대나무 열매 아니면 먹지도 않고, 하늘이 내린다는 감로의 샘물이 아니면 마시지도 않는다고 하지.” “그 참 대단한 새로구먼.” “그런데 말일세, 까마귀 한 마리가 썩은 쥐 한 마리를 주워 먹으려고 하다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그 도도한 봉황새를 보았다네. 까마귀는 봉황이 자기가 먹으려고 하는 썩은 쥐를 빼앗으려고 오는 줄 알고 놀라서 ‘까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네.”
아직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혜시에게 장자가 마지막 말을 던졌습니다. “자네 지금 그 까마귀처럼 ‘까악’ 소리 지르고 싶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일까 온갖 궁리를 다했습니다. 자기네들이 죽을 맛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지금까지 자기네들이 누려오던 권위가 땅에 다 떨어졌습니다. 이러다가는 그동안 한껏 누리던 기득권도 다 날아갈 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네들 기득권을 다 빼앗아 갈 것 같았습니다. 무슨 수를 써야 꼼짝 달싹 하지 못할 올무에 걸리게 할 수 있을지 연구, 궁리 의논을 했는데, 오늘 본문은 그 일들 중 하나입니다.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라는 1절에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 보여줍니다.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에 계십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갈릴리까지 종교지도자들이 찾아왔습니다. 직선거리가 100Km 정도나 됩니다. 당시 교통수단으로는 최소 이틀 아니면 사흘이 걸리는 먼 거리입니다. 그 바쁜 종교지도자들이 그 먼 길을 찾아왔다면 무언가 중요하고 무언가 심각한 현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현안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식사 전에 손 씻지 않는다는 것을 고발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제가 일부러 중대한 문제라고 말씀드리는 까닭은 중대한 문제인지 아닌지는 종교지도자들이 마음대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도 종교지도자들이 다 판단했습니다. 무엇이든지 그들이 중대하다고 하면 중대하고, 중대하지 않다고 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고, 그것은 죄라고 하면 죄이고, 아무리 다른 사람이 보아서 죄라고 생각을 해도 자기네들이 아니라고 하면 죄가 아니었습니다. 이 정도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식사 때 손 씻는 것은 위생상 중요합니다. 특히 메르스나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의 위험이 있는 곳이라면 손 씻는 것은 더더욱 중요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일상적인 손 씻기 문제를 두고 종교지도자들이 그 먼 곳인 예루살렘에서 며칠이나 걸려서 갈릴리까지 찾아와서 따지고 있습니다. 사실 그 당시 식사 전에 손 씻는 사람들도 진짜 손 씻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하는 사람이 주전자 그릇에서 물을 떨어뜨리면 손끝에 물이 몇 방울 떨어집니다. 그 다음에 손을 뒤집어서 손 등에 물방을 몇 방을 떨어뜨리는데 그것이 손 씻는 전부입니다. 그리고 당시에 전염병 같은 병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자기네들이 왜 그 멀리서 찾아왔는지 이유를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라고 2절에서 밝힙니다.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따지러 왔다고 합니다. 여기서 장로들이란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전통이라는 것은 쭉 내려오는 관습이 아니라 종교지도자들이 정한 규정, 규칙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본래의 율법만큼은 손을 대지 못하기 때문에 율법은 아니지만 자기네들이 하고 싶은 것들을 규칙으로 정했습니다. 물론 괜찮은 것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가면서 규칙, 규정으로 정한 것들이 전부 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것들이었습니다. 법이나 명령이나 규범이라는 것은 건전한 상식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수의 동의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어야 시민들이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에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한다는 규정은 과연 건전한 상식이고 다수의 동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가? 전혀 아닙니다. 지킬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는 규정들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중동이나 아프리카에 물이 귀한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역을 하고 있는 에티오피아에는 여자들이 물통을 머리에 이거나 손에 들고 다니고, 나귀들이 주인이 없어도 혼자서 양쪽에 노란 물통을 걸치고 다닙니다. 이렇게 물이 귀한데 2천 년 전에는 어떠했겠습니까? 정말로 귀했습니다. 물이 없었습니다. 손을 씻는다는 것은 상당한 재력이 있는 사람들이나 가능했고 일반 시민들에게 있어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사치였습니다. 밥 먹기 전에 손을 씻는 문제는 소위 요즘 젊은이들이 말하는 ‘그들만의 리그’였습니다. 자기네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 규정이 참으로 좋지 않은 것은 그것이 가진 자, 힘 있는 자들의 우월적 지위를 확인시켜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정도 된다는 것입니다. 손을 씻지도 않고 흉내를 내면서 우리는 이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네들은 이렇게 하지 못한다고 비하하는 것입니다. 당신네들과 우리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규정이 못 가진 사람, 힘없는 사람, 못 배운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체념의 이유를 확인시켜주는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저런 일을 감히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저 사람들은 하늘의 사람들이고 우리는 땅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더욱 악한 것은 그 규정을 악용하는 것입니다. 세상 지도자들도 악용하고 종교지도자들도 악용했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방편으로 사용했습니다. 일반 시민들 가운데서 제대로 못 배웠어도 저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반발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고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소시민들은 힘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얼마나 더했겠습니까? 항의나 반발하는 수단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인터넷 등을 통해서 이런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수단이 있지만 그 당시는 전혀 없었습니다. 힘없는 사람들, 소시민들이 항의하거나 반발했다가는 당연하게 돌아오는 것이 있습니다. 불순종의 죄입니다. 사실은 사람들에게 대한 불순종인데 하나님께 불순종한다는 죄를 덮어씌웁니다. 이러면 꼼짝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하나님께 불순종했다고 하면 큰일 날 일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아야’ 소리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 예수님이 몇 마디 하자 제자들이 겁이 나서 예수님께 하는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라는 12절 말씀은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큰일 났습니다. 저들이 걸고넘어지면 골치 아플 텐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걱정하는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오늘날에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교회에서 교회방침이나 교회가 무엇을 하겠다는 사업 그리고 가끔씩 목사가 무슨 말을 했을 때, 다른 의견을 제기하는 것을 아예 불순종으로 취급하거나 믿음 없는 사람으로 정죄를 합니다. 때로는 그렇게 하다가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기도 합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할 것 같지 않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상당히 이성적이고 자기 신념이 있는 사람이라도 같은 소리를 계속해서 듣게 되면 세뇌를 받게 됩니다. 그렇다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오늘날 이런 일들이 실제로 있는 것들을 여러분들이 뉴스를 통해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저런 일이 교회에서 있을 수 있는가?’ 실제로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직설적으로 저주를 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언젠가 시골에 내려갔다가 새벽예배를 드리려고 교회를 찾던 중 빨간 십자가가 보여 그 교회에서 새벽 예배를 드리는데, 앞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가 졸았던 모앙입니다. 한 열대엿 명 새벽 예배를 드리는데 저보다 젊어 보이는 목사님이 그 할머니에게 야단을 치는데 얼마나 큰소리를 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한 번만 더 졸면 내가 저주하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목사인 제가 그 말을 듣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끝까지 앉아서 예배를 끝낼 수가 없었습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회에 항상 지적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는 이유는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든지 하지 말아야할 말을 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나라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지적하십니다. ‘당신네들은 지킬 법은 안 지키고 하지 말아야할 것은 참으로 잘도 한다.’ 아마 예수님의 심정은 ‘당신네들은 지켜야할 법은 안 지키면서, 하지 말아야할 짓은 정말로 잘 한다.’ 라고 말씀하시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한 예를 들어서 말씀하신 것이 고르반입니다.
고르반의 예를 들면, 부모님들이 살면서 재산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생계가 막막했습니다. 여럿 자식 중 제법 살만해서 부모를 충분히 공양할 수 있는 자식이 있었지만, 무슨 까닭인지 그 자식이 부모를 싫어해서 도와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자식이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도와주지 않아도 될지 생각하다 생각 난 것이 고르반입니다. 성전에 가서 제사장에게 내 재산을 전부 다 하나님께 바친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르반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4-6절)
그리고는 그 못된 자식은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립니다. 고생고생하시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다시 성전으로 가서 제사장 앞에서 고르반을 취소합니다. 벌금을 조금만 내면 됩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때로는 종교지도자들이 자식과 공모를 하여 하나님께 정말로 바치지 않고 거짓 명세, 거짓 선언한 것을 대가로 뇌물을 주고 끝이 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요즘도 양로원 같은 곳에 기부하는 일에 그런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큰 기업에서 10억을 기부한다면, 10억에 대한 기부금 영수증을 발행받습니다. 그 중 한 천만 원은 실제로 기부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돌려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기업은 그로 인해서 세금을 덜 내고 양로원은 얼마의 기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식사 전에 손 씻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아주 재미있는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11절) 라고 말씀하시면서 화장실 비유를 하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17절) 입으로 들어가면 어차피 뒤로 나오니 좋고 안 좋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18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미있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책망은 무섭기 짝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아, 어디 말 같지도 않는 말을 함부로 하느냐? 그것이 교회에서 할 짓이냐?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할 짓이냐? 목회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할 짓이냐?’ 라고 야단을 치십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멀쩡하게 자네들이 성하지만 그것이 끝까지 갈 것 같은가? 내가 반드시 손을 보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때가 되면 내가 반드시 뽑아버리고 말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렸다. 모든 사람들이 잠든 밤에 그 사람의 원수가 그 밭에 와서 잡초 씨를 뿌려버렸다. 싹이 제법 자라자 밭에 벼이삭뿐만 아니라 잡초도 보였다. 종들이 그것을 보고 주인에게 잡초를 뽑을지 물었다. 그러자 주인이 하지 말라, 잡초를 뽑으려다 벼이삭까지 뽑힐 수 있으니 나중 추수 때 내가 추수전문가들을 불러서 다 뽑아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주인은 그 뽑힌 잡초들은 불에 던져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13:24-30)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강조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13장 24절 맨 처음의 ‘천국은’ 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진짜 천국에 가라지도 있고 잡초도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완전한 천국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으로 가는 도상에 있는 천국 비슷한 곳이 어디입니까? 교회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교회에 이런 일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알곡도 있지만 가라지도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상당 기간 동안은 가라지와 알곡이 함께 자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확실하게 말하건대 가라지가 생명이 붙어 있는 것은 추수 때까지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가 되면 절대로 속지 않는 전문가들이 골라서 다 불태워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마13:47-50)
그러면서 여러분들에게 예수님께서 간절한 심정으로 부탁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사람이 되십시오.’ 라는 말씀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이어서 또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13:45-46) 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여러분들에게 좋은 밭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보통 사람들은 좋은 밭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동원해서 좋은 밭을 사십니다. 그런 여러분이 되시라는 말씀입니다. 진주도 전문가들은 알지만 대개는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주 같은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전 우리 시조에 ‘옥에 흙이 묻어 길가에 버렸으니, 오는 이 가는 이 다 흙이라 하는고야, 두어라 알 이 있을지니 흙인 듯이 있거라’ 라는 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그런 좋은 밭이신 분이 계시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런 밭으로 그냥 사십시오. 계속 가꾸면서 사십시오. 혹시 진주 같으신 분이 계시면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너무 속상해하지 마시고 그냥 사십시오. 하나님은 아십니다. 틀림없이 아십니다. 이것은 좋은 밭이라고 점찍어두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런 사람을 사십니다. 절대로 손대지 못하게 하시고 당신을 사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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