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최고의 평신도 지도자 (느헤미야 1:1-11)

분당소망교회 2020. 8. 4. 09:03

최고의 평신도 지도자

 

 

 

느헤미야 1:1~11 ═══════════════════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하실 때 당신이 친히 하실 때도 있지만 대체로 사람을 통해서 하십니다. 때로는 여러 사람들을 불러서 그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시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한 나라를 일으키는데도, 한 기업을 일으키는데도, 한 집안을 일으키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자주 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있으면 좋을 수도 있고 좋을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많이 택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죄를 범해서 하나님께서 인류를 전멸시킬 수밖에 없었을 때, 하나는 남겨서 맥을 이어가야 되겠다고 생각하시고 택하신 사람이 노아였습니다. 노아 때문에 나머지 일곱 식구들이 살고 종족이 불어났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아담의 후손이기도 하지만 노아의 후손입니다.

한 나라를 지키고 살리시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나와서 광야를 지나고 가나안에서 수백 년 사는 동안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들은 살만하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때마다 어려움이 있고 나라가 멸망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또 한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기드온을 선택하셨고 또 어떤 때에는 여선지자 드보라를 선택하셨고 마지막 사사로는 사무엘을 선택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세상 역사도 그러합니다. 미국이 필두로 세계의 노예제도 철폐에 앞장섰는데, 그때 앞장선 사람을 우리는 한 사람 링컨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독립 여망 그리고 독립운동의 열기를 불러일으킨 것도 31절 유관순이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분은 온 인류를 구원하신 우리 주님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본문의 느헤미야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했습니다. 나라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주권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에 무언가 하나는 이어가야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민족성, 민족의 정체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것인 하나님 신앙의 줄기는 이어나가야하는데 그 구심점을 느헤미야로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망했습니다. 그 바벨론을 페르시아가 정복했습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 민족을 포로로 끌고 갔지만 바벨론을 정복한 페르시아는 다시 조국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3차에 걸쳐서 조국으로 돌아가는데 오늘 본문은 첫 번째, 두 번째 귀환이 끝나고 난 뒤 아직 세 번째 귀환이 있기 전의 일입니다.

두 번에 걸쳐서 이스라엘 민족은 조국으로 돌아갔지만 제대로 된 일이 없습니다. 소박한 성전 하나 겨우 만든 것 외에는 아무것도 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이 귀환했음에도 불구하고 큰 문제인 예루살렘 성벽 무너진 것을 재건하지 못했습니다. 부서진 성문도 다시 만들지 못했습니다. 외적이 자기 안방 드나들 듯이 드나들며 온갖 못된 짓을 다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라 잃은 민족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려고 작정하셨습니다. 이 일을 누가 할 것인지 보시다가 느헤미야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는 성경 인물 중 최고의 평신도 지도자입니다. 이 느헤미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주 귀한 것을 가르치십니다.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하실 때, 사람과 함께 하실 때 어떤 사람을 쓰시는가?’ 이것을 보여주십니다. 부디 여러분 아니면 여러분의 아들이나 딸 또 저들의 아들이나 딸 그리고 여러분의 후학들이 이 사회, 이 나라를 위해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많이 힘을 써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하실 때 어떤 사람을 쓰시는지 첫 번째는, 관심과 사랑이 있는 사람을 쓰십니다.

느헤미야는 늘 조국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첫 번째로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닥시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1-2)

느헤미야는 조국에서 사람이 온다하니 쫓아가서 그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느헤미야는 늘 조국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중요한 것은 진실로 조국을 사랑했습니다. 그냥 흥미로 관심을 가지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조국과 동포들을 사랑했습니다. 조국의 참담한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퍽 주저앉아서 자리에서 울었습니다. 그냥 운 것이 아니라 여러 날을 슬퍼합니다.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3-4)

하나님께서는 똑똑한 사람을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 있는 사람을 쓰시지 않습니다. 관심과 애정 사랑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을 쓰십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느헤미야는 이 중요한 일, 이 큰일을 할 때 먼저 기도로 시작했고, 기도로 진행시켜나갔고 계속해서 기도했고 금식기도까지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기도합니다. 내 가정의 모든 일, 내 사랑하는 딸, 아들의 모든 일, 내 건강,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결정하신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기도합니다. 그리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내가 내 건강을 챙겨야지, 내가 내 자식들을 가르쳐야지, 내가 내 사업을 하는 것이지라고 생각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고민하는 것이 있습니다. 기도를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어떤 방식으로 하는가? 어떤 모양으로 하는가? 이런 것들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매우 쉽습니다. 기도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그냥 하는 것입니다. 그냥 기도를 하다보면 차츰 내가 조금 더 잘 기도하는 수가 없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기도는 곧바로 지금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분이 여러분에게 기도를 부탁할 때 그 자리에서 기도하십시오. 그 분의 손을 잡고 기도하든지 아니면 그 사람이 지나가고 난 뒤 그 분을 위해서 기도하시고, 전화로 기도부탁을 받으면 전화 통화를 하면서 그 분을 위해서 기도하든지 아니면 전화를 끊고 난 뒤 바로 기도하십시오. 자동차 운전하면서도 기도하고 버스 타고 가면서도 기도하십시오. 생각나면 지금 당장 기도하는 것, 제일 귀하고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그 소식을 듣는 순간 그 자리에서 퍽 주저앉아서 기도했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4)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6) 느헤미야는 그렇게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기도할 때 잠깐 기도하고 만 것이 아닙니다. 넉 달 동안 아무 말 없이 기도했습니다. 꾸준하게 기도했습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기도할 때 잠깐 기도하고 응답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합니다. 많으면 일주일 정도 기도한 후 응답받으려고 합니다. 물론 응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넉 달을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그러했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어떤 싸인을 주시지 않았다면 그는 넉 달이 아니라 마흔 달도 기도했을 것입니다.

, 느헤미야는 제대로 기도할 줄 알았습니다. 보통 우리는 급한 기도가 있으면, 아주 중요한 기도가 있으면, 큰 일이 있으면 하나님, 이렇게 해주십시오.’ 라고 합니다. 그것도 좋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어떻게 기도했는지 잘 보십시오. 느헤미야는 조국의 무너진 성벽과 성문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이렇게 할 때 저를 도와주십시오. 내가 이렇게 하는 계획이 맞습니까? 제가 계획하는 것이 맞는지 지도해주시고 만약 맞는다면 잘 하게 저를 도와주십시오.’ 라고 기도했습니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술관원은 왕과 대작對酌도 하면서 나라의 일을 하는 비서 혹은 수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기도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을 바로 아는 사람, 제대로 아는 사람을 쓰십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님을 얼마나 제대로 아는 지에 대해서 성경 여러 곳에서 드러납니다. 먼저는 느헤미야가 하나님을 부를 때 호칭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 기도할 때 이렇게 하니까 좋더라는 등 이런 것을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상황에서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불러야하는지 또 어떤 하나님을 찾아야하는지 생각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만 이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라는 5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부르는 호칭만 듣고도 느헤미야가 지금 어떤 기도를 하려고 하는지 다 아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대답할지 준비하십니다.

느헤미야는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 민족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이 이것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양 이 꼴에서 제대로 되려면, 내 가정이 제대로 회복되려면, 내 건강이 회복되려면 제가, 우리가 이것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는 금방 알아채시고준비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합니다.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라는 7절 말씀에서는 이것 때문에 우리 민족이 크게 당했고 지금 이렇게 힘들고 있다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법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자연 계시도 주십니다. 자연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 삶의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시지만 때로는 여러분에게 직접 계시하십니다. 또 특별계시인 성경은 이렇게 살면 된다고 하시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그 말씀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또 하나님께 묻습니다. 기도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특별계시까지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안 보고 또 묻고 묻는 사람들에게는 대답을 잘 안 하십니다. 이미 하신 말씀은 듣지 않는 사람이 대답하신다고 해서 제대로 하겠습니까? 또 허튼 소리하고 딴 소리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어떻게 말씀하셨고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느헤미야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을 것이요’(8)

이 말씀을 기억한 느헤미야는 맞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듣지 않다가 이 모양 이 꼴을 당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9)라고 말했습니다.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꼼짝을 못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이제는 그렇게 하려고 한다, 그렇게 하면 지켜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의 큰 불행 중 하나가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모르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압니다. 머릿속에만 압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의 모습은 ET 모습과 똑같습니다. 머리는 큰데 몸통은 아주 적어서 이 머리에 있는 것이 가슴으로 안 내려오고 손으로 안 내려오고 발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온통 신경을 세상에 쏟다보니 하나님께 신경 쏟을 틈이 없습니다. 그럴 겨를이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조금 똑똑한지 몰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당하고, 그 당한 일을 또 당하고, 그 당한 일을 또 당합니다. 그럴 리가 있을까 생각하겠지만 천만의 말입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다른 일로는 잘 안 당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무엇 때문에 당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당하고 또 당하고 엎어지고 또 엎어지고 난 뒤에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이런 팔자다”. 나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몰라서 그렇습니다.

어둠은 여러분들을 공격할 때 다른 수단을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몇 가지 수단만 있으면 다 해내기 때문에 다른 것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똑같은 것을 하는데도 사람들은 늘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한두 번 정도야 당할 수도 있겠지만 더 이상 당하지 않습니다. 피할 길을 지도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지도를 받게 되면 더 당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를 정확하게 꿰뚫었던 호세아가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안타깝게 호소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입니다.

 

네 번째, 하나님은 책임적인 사람을 쓰십니다.

날카로운 진실이 있습니다. 들어보십시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아픈 곳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약점을 고백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혼자 강한 자일수록, 오만한 자일수록 자신을 더 강하게 포장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묘한 진리가 있다. 약점을 고백하면 힘이 생긴다.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약점을 고백할 수 있는 힘은 겸손에서 나온다.’ 정말로 날카롭게 꿰뚫어보는 말입니다

느헤미야는 조국의 멸망에 대해서 직접적인 자기의 책임이 없지만 조국에 대한 자기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하게 내 조국이 그렇게 망하고 오늘날 이렇게 된 것이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6)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느헤미야가 생각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진 것, 복구시키는 것, 성문이 깨뜨려졌는데 그것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을 내가 해야 하겠다

위대한 사람은 여기에서 다릅니다. 하나님은 책임적인 사람을 쓰십니다. 이런 사람이 가정에서도 책임적이고 회사에서도 책임적이고 조국과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책임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쓰십니다.

 

다섯 번째, 하나님은 받은 은혜를 알고 갚아야 할 은혜를 아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사람을 쓰시기 전에 먼저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선물을 주십니다. 그리고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는 저 사람이 은혜를 아는 사람인가? 자기의 그 모든 것이 나에게로부터 온 것임을 아는 사람인가?’ 유심히 보십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아니라고 해야 할 사람인가? 계속해도 좋은 사람인지, 더 줄 사람인지 하나님께서 판단하십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식민지 출신 느헤미야, 이 느헤미야를 당시 세계 최고국인 페르시아의 고위 관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왕의 술관원은 오늘날로 하면 수석입니다. 장관급입니다.

어느 사회나 여러 계층이 있습니다. 크게 세 계층만 나누어서 보면 하나는 서민입니다. 열심히 일해도 빚지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중산 계층입니다. 열심히 일하면 빚은 지지 않는 중산계층입니다. 그 다음은 상류층입니다. 일 안해도 잘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유, 안락을 확보한 사람들입니다.

당시 느헤미야는 상류층에 속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상류층 사람들의 관심은 더 많이 소유하는 것입니다. 희한합니다.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하는 욕심, 탐욕은 적은 사람이 더 소유하기 원하는 것보다 훨씬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체로 상류층 사람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이 가지는가? 어떻게 하면 더 즐기는가?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것을 가지는가? 어떻게 하면 내가 더 잘 살 수 있을까?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달랐습니다.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었던 느헤미야였습니다. 경제적으로 상당한 능력이 있었고 사회적인 명예로는 더 대단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오로지 관심을 가진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내 조국의 형편 그리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 민족, 유대민족 거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관심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진정한 관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은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정치인들은 다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다수의 정치인들은 어디를 보아도 국민을 사랑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후손들을 사랑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당장 다음에 재선되고 다음에 우리 당이 정권을 가지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불행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많이 기도해야합니다.

느헤미야는 조국을 사랑하는데 흔히 어떤 사람들이 하듯이 말로만 입만 가지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가득 담긴 진정한 관심이고 진정한 애정이었습니다. 얼마나 진정한 관심이고 애정이었는지는 조금 전에 보셨듯이 나라의 슬픈 소식을 듣고 주저앉아 통곡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왜 자기로 하여금 페르시아에 고위 관리가 되게 하셨는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결심하고 결단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기가 선택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 이것을 할 것인가 저것을 할 것인가는 적어도 각자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선택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인지 그것은 선택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평가는 자기가 선택하지 못합니다. 다 좋은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합니다. 이것은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내가 선택했고 지금 내가 선택하는 것의 결과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이 대한민국의 역사에 있어서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이 거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에 대해서 대단한 애정과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현재 대한민국의 삶입니다. 우리가 무어 그리 잘났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했습니까? 우리나라 국민들만큼 애 쓰지 않은 국민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세계 유래가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많은 것들을 우리나라에 허락하셨습니다. 먹을 것 하나 제대로 없었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그 짧은 시간에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대한민국을 사랑하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다른 나라에도 예수님 잘 믿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적어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기독교인들이 국민 전체의 25%를 넘어서 30%에 육박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나서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믿지 않는 이 나라이지만 어린 아이들이 12만 명이고 가축들도 있지 않는가? 그런데 이런 나라를 어떻게 멸망시키겠는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믿는 사람들이 요나서의 그 수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 나라를 붙들어주시기 위해서 사람을 찾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느헤미야 같은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지금 계속해서 찾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의 웃시아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께서 혼자 탄식하듯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6:8)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실 때, 성전 안에 이사야가 있었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그 탄식 소리를 듣고 저 탄식은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즉각적으로 하나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라고 대답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여러분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이 나라 대한민국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 교회를 위하여 누가 일어설 것인지, 복음을 받지 못해서 어둠 속에서 복음을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누가 갈 것인지 찾고 계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