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이 있는 믿음
예레미야 32:1~15
바벨론이 이스라엘,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 유다를 계속 공격했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완전히 함락시키기 위해서 이스라엘 수도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둔 것은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이라는 하나님 말씀을 전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하나는 바벨론과 이스라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패배하고 망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스라엘 왕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 앞에 끌려가서 항복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그 이스라엘 왕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는 이것 때문에 감옥에 갇혔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있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또다시 찾아오셔서 네 사촌이 너를 찾아와서 아나돗에 있는 땅을 사라고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나돗은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지역입니다. 그곳은 이미 바벨론에게 점령된 곳이기 때문에 그 땅을 사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고 한 푼의 가치도 없는 땅이었습니다. 남북통일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북한 함경도에 있는 땅을 사라는 말과 같습니다. 또 다른 표현을 하면 부도가 나서 곧 망하는 회사의 주식을 사라고 권하는 것과 같습니다.
과연 하나님 말씀대로 예레미야의 사촌이 찾아와서 그 말을 했습니다.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예레미야는 사기로 했습니다. 매매 계약서를 작성하고 증인을 세웠습니다. 땅값도 지불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공표했습니다. 감옥의 간수들 그리고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땅을 샀다는 공표였습니다.
이 일에 있어서 모든 기독교인들이 큰 관심을 가지고 볼 것이 있습니다. 그 다음의 일입니다. 이제까지의 상황을 보면 이미 남의 나라에게 빼앗긴 땅, 그것도 세월이 흘러도 다시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땅, 그 땅을 증인을 세워서 매매 계약서를 작성하고 땅값을 지불하고 여러 사람 앞에서 ‘잘 들으십시오. 제가 그 땅을 샀습니다.’ 라고 공표를 했습니다. 거기다 지금은 바벨론에게 빼앗긴 남의 나라 땅이지만 머지않아 반드시 그 땅을 돌려줄 것이고 많이 오를 것이라고 큰소리쳤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라는 15절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이랬던 예레미야가 뒤로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이 여러분이 보아야할 내용입니다.
‘내가 매매 증서를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넘겨 준 뒤에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슬프도소이다’(16-17) 라고 딴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또
‘주께서 표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펴신 팔과 큰 두려움으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에게 주시기로 그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에게 주셨으므로 그들이 들어가서 이를 차지하였거늘 주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주의 율법에서 행하지 아니하며 무릇 주께서 행하라 명령하신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주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셨나이다 보옵소서 이 성을 빼앗으려고 만든 참호가 이 성에 이르렀고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이 성이 이를 치는 갈대아인의 손에 넘긴 바 되었으니 주의 말씀대로 되었음을 주께서 보시나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내게 은으로 밭을 사며 증인을 세우라 하셨으나 이 성은 갈대아인의 손에 넘기신 바 되었나이다’(21-25절) 라고 하나님 앞에 하소연했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그 땅을 자신 있게 사고 큰소리까지 쳤지만 사실은 자기도 그 땅을 다시 이스라엘에게 돌려주시겠다는 하나님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하나님 말씀대로 사기는 했지만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이렇게 빼앗겼는데 그 땅을 언제 찾습니까? 아무런 소용도 없는데 어떻게 저보고 이렇게 하라고 하십니까?’ 라는 하소연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자기도 믿지 않으면서 여러 사람에게 내가 산 땅이 곧 우리에게로 돌아올 것이고 그 땅으로 큰돈을 벌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 이것은 알면서 거짓말 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사실 그러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도 믿어지지 않는 말을 행하고 큰소리쳤습니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런 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믿겨지는 말만 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믿습니다. 믿겨지지 않는 것을 믿을 때 그 사람이 세상 사람과 다른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창세기 노아가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배를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입니다. 배를 지을 까닭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것도 바닷가에 배를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마른 맨 땅에 배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규모 또한 한 집안 식구들이 탈 정도가 아니라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큰 배를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가 그 배를 짓는데 걸린 시간이 무려 120년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가족들까지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미쳤다는 말이 조금도 지나치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생각할 것은 ‘그렇다면 노아 자신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큰 배를 그런 곳에 지으라고 하신 말씀의 뜻을 완전히 이해했을까?’ 라는 것입니다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자기도 믿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너무도 터무니없고 조금도 근거가 없는 말씀을 하시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하나님 말씀대로 배를 지었습니다. 그것도 120년 동안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온갖 소리를 다 했을 것입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정상적인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고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 노아에게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이름이 있습니다. 창세기 6장 9절은 노아에 대해서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말씀하십니다. 당대 완전한 사람 노아,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 노아, 이것이 노아의 이름입니다.
창세기의 아브라함 또한 노아 못지않았습니다. 지금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외국에 나가는 것은 두렵고 겁이 납니다. 특히 사랑하는 아들이나 딸이 낯선 외국에 갈 때 부모들은 걱정이 많습니다. 두렵기도 합니다. 아브라함 당시에는 낯선 사람들은 다 적이었고 원수였습니다. 저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였고, 저 사람이 없어야지 내가 살기에 편한 것이 그 당시 시절이었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 다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는 가족이나 일가친척만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아브라함은 전혀 경험 없고 정보 없는 낯선 나라를 향해서 가야했습니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것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일가친척을 떠나서 가라고 하나님께서 하신 그 말씀 하나만 듣고 떠났습니다.
이 아브라함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아브라함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셨으니 편안하게 갔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두렵습니다. 겁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냥 고향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일은 그보다 더 큰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말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고민 끝에 순종하기로 결론을 내렸지만 밤새 수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나에게 말씀하신 그 분이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하나님 목소리라고 하더라도 그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내가 미친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미친 것 같은 일을 했던 것은 아브라함이 들었던 목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이 분명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하나만 가지고 순종했습니다. 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조상대대로 섬겨온 유대교를 버리고 원수같이 생각하던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그것도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에 대해서 상당히 못되고 악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 스데반을 처형할 때 크게 한 몫을 담당했고, 기독교인들을 색출해서 처벌하기 위해 다마스크스로 공문을 가지고 떠났던 사람입니다. 그 바울이 다마스크스로 가던 도중 한 순간의 일로 기독교로 전향했습니다. 그 한 순간의 일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는 바울에게 있어서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다마스크스로 가던 도중 자기가 그렇게 미워하고 싫어하던 예수를 만나보고 나니 그 예수가 바로 자기가 지금까지 그렇게 사랑하고 사모하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기독교로 전향했습니다.
예수님 만나고 난 다음에 바울이 바뀌었습니다. 그동안 기독교의 가르침은 자기에게 하나같이 엉터리였습니다. 엉터리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기독교 진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하나도 빠짐없이 진리 중의 진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엉터리이던 말씀이 한 순간에 어떻게 그렇게 진리의 말씀이 되었습니까? 바울이 그동안 몰랐던 진리를 그 순간에 깨달았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아는 것은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엉터리 중의 엉터리였던 그 말씀들이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던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진리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일에 실패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 아합 왕 때 일입니다. 선지자 한 사람이 자기를 잘 아는 친구 한 사람에게 “이보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자네는 나를 많이 때려주게.” 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 선지자의 친구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아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친구라고 할지라도 저 친구는 하나님의 종이다. 하나님을 종을 아무리 본인이 부탁한다고 해도 어떻게 때릴 수 있는가? 그것은 못할 일이다.’ 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지자의 그 친구가 크게 잘못한 것이 있습니다. 자기 친구 선지자가 자기에게 부탁한 것이 그 친구의 부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였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친구가 자기에게 한 말이 분명 잘못된 것이고 나쁜 일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절대로 내가 보는 것처럼,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쁜 것, 잘못된 것이 아니라 선한 것이고 바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순종해야한다, 이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선지자의 그 친구는 끝내 선지자를 치지 않고 그냥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길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자에게 물려 죽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 분명하기만 하다면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 우리 기독교인에게 선택할 길은 하나 순종뿐입니다.
오늘은 부끄럽지만 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제 인생에서 잘 한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를 목사로 부르셨을 때 즉각 순종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잘했다고 말하는 것이나 제가 다른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선택했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선택하고 보니 이 결과가 다른 것보다 좋다는 말도 아닙니다. 제가 잘 한 선택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지시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그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속된 말로 하면 저는 ‘미친 순종’을 했습니다. 그때 저는 힘들게 살고 힘들게 공부를 하고 거기까지 온 짧은 인생 중에 가장 좋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더 좋은 것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한 때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순종한 것은 저 자신이 생각해보아도 그렇고 제 가까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미쳤다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를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이 저에게는 너무도 확실했기 때문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밤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사표를 냈습니다. 안타깝게 만류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의 마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목사의 길을 가는데 끈질기게 달려드는 세상의 유혹들이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제가 뿌리칠 수 있었던 것은 저를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셨다는 것이 너무도 확실했고 그 빛이 너무도 환했기 때문에 다른 것은 결코 저를 끌고 갈 수 없었습니다. 바로 한 것이 제대로 없는 제 인생이 나중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할 최고의 ‘꺼리’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것도 제대로 못하고 저것도 제대로 못했지만 도저히 순종하지 못할 그때 순종한 저 좀 봐주십시오.’ 라는 말을 하려고 합니다.
야고보 2장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네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2:15-18)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이 떨어졌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으라는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젊은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영생 즉 구원을 얻고 싶었습니다. 그 물음에 예수님께서 “잘 왔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십시오.” 라고 좋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젊은이가 “선생님, 그것은 제가 어릴 적부터 잘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는 본론을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그 다음을,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가니라’(마19:22) 라고 기록합니다.
그 젊은이는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켰습니다. 큰 허물없이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 자기 마음속에 나는 아직 구원받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고 영생이 나와는 관계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도 그렇게 사모하던 영생을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2장 14절은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라고 말씀합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이 젊은이와 달랐습니다. 허물이 컸습니다. 지은 죄도 많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세리를 하면서 돈 많은 사람은 물론이고 하루 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힌 사람이 삭개오였습니다. 재산도 많이 모았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세리장 삭개오는 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모았습니다. 유대인들의 견해에 의하면 구원은 삭개오에 있어서 전혀 해당사항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삭개오에게 예수님께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눅19: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절대로 구원받지 못할 사람 같은 삭개오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께로부터 구원을 영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누가복음 19장 8절은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그 젊은이가 그렇게 받고 싶어도 받지 못했던 영생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것은 삭개오가 예수님께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도 전에 먼저 예수님 마음속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2장 19절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라고 재미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 하나님 믿습니까? 그 정도의 믿음은 귀신도 믿습니다. 귀신도 진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귀신도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떱니다. 그러나 귀신은 하나님을 믿기만 하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도 행하지 않습니다.’ 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은 ‘당신이 그런 귀신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행함이 없는 당신의 믿음은 귀신의 믿음과 똑같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2:2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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