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히 여기는 자는
마태복음 5:3~12 ═══════════════════
뉴욕주 로체스트시 기차역에 한 신사가 내립니다. 오랜 여행에서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아내 그리고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출발합니다. 집 가까이 로체스트시를 가로지르는 제네시 강 언덕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았습니다. 모두들 어쩔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을 붙잡고 물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저기 아이가……” 라고 하는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아이가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신사 “아니 그러면 왜 모두 이러고……” 라는 말도 채 마치기도 전에 외투를 벗어던지고 그대로 강에 뛰어 들어갑니다.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힘겹게 구해서 강변에 끌어올렸습니다. 모두 다 숨죽이고 있다가 환호하고 박수를 칩니다. 다행히 아이는 살아있었습니다. 신사는 한 숨 돌리고 기진한 아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맙니다. 그 아이는 다름 아닌 자기 아들이었습니다.
꼭 만든 이야기, 픽션 같지만 실화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이란 우리 말 사전에 이렇게 설명합니다. ‘불쌍하고 가엾게 여겨서 도와주는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을 보면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물에 뛰어들든지 아니면 건지기 위해서 나름 온갖 방법을 다 간구하는 것, 추운 바람 쌩쌩 부는 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볼 때 이것저것 생각 없이 주머니를 뒤져서 동전이 나오든지 지폐가 나오든지 가릴 것 없이 꺼내주는 것 이것을 긍휼이라고 말합니다.
긍휼은 헬라 원어로는 ‘엘레몬’이라는 말을 쓰고 히브리어 원어로는 ‘케세드’라는 말을 씁니다. 이 ‘케세드’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긍휼의 정도를 뛰어넘습니다. 단순하게 동정하거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넘어서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그 사람의 입장으로 그 사람의 마음으로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인도의 간디가 막 출발하려는 기차에 가까스로 올라탑니다. 그러다 그만 신고 있는 신발 한 짝이 벗겨져서 플랫폼 바닥에 떨어집니다. 기차는 이미 출발했습니다. 주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간디가 얼른 나머지 신발 한 짝을 벗어서 기차 밖으로 던집니다. 함께 동행 하던 사람들이 간디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간디가 조용하게 말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떨어진 신발 한 짝만 줍는다면 그 한 짝으로는 아무 쓸모없을 것이 아닙니까?” 신발 한 짝으로도 남을 생각하는 마음을 담는 것, 긍휼이란 이런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입니다.
긍휼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늘 가슴이 아픕니다. 늘 마음이 쉽지 않습니다. 아픈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하든지 도와주어야합니다. 어떻게 하면 치료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내가 저 사람을 도울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저 사람 마음이 위로를 받을 수 있겠는가? 힘없는 무릎을 보면 내가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좀 부축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저 다리에 힘을 넣어줄 수 있는가? 이것을 생각합니다. 딱한 사람을 보면 나도 힘듦에도 불구하고 가서 도와주고, 슬픔 당한 사람들, 가슴 아픈 일을 당한 사람들을 보면 가서 옆에서 손잡고 있지는 못할지라도 멀리서라도 가슴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이런 것이 긍휼한 마음이고 긍휼한 사람입니다
애니라는 이름을 가진 어린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바이올린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라도 자기 집 사정을 알았습니다. 지금 몇 년째 흉년입니다.
그러다 그 어린아이는 그 간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어느 날 힘들게 말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몇 년째 이어지고 있는 흉년을 힘들게 버티고 있었던 터라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날 밤에 에니가 우연히 아버지 방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가까이 가서 듣습니다. 아버지의 기도입니다. ‘주님 애니가 바이올린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라는 말을 하나님께 되풀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얼마 후 오하이오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씁니다. 일상적인 문안편지였지만 자기에게 있는 가장 무거운 짐, 안타까운 그 마음을 싣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몇 주 후에 오하이오에 있는 그 친구가 에니의 가족을 자기 집으로 초대합니다. 아빠와 아빠 친구는 반갑게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던 중에 그 아저씨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아주 아끼는 비싼 바이올린을 꺼내서 애니에게 켜보라고 말합니다. 애니가 켰습니다. 그러자 그 아저씨가 “이 바이올린은 아무래도 나보다는 애니에게 더 잘 어울리는데……” 라고 말하면서 “내가 이 바이올린을 벼룩시장에서 7달러를 주고 산 것인데 자네 7달러만 주면 이 바이올린을 애니에게 줄 수 있겠다.” 라고 말했습니다. 애니는 그 바이올린으로 행복한 소녀시절을 보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애니가 중년 부인 애니가 됩니다. 중년 부인 애니의 눈에 한 신문 광고가 보였습니다. ‘딸아이를 위한 싼 바이올린을 구함’ 그 광고를 본 순간 애니 가슴에 두 사람 얼굴이 떠오릅니다. 한 사람은 자기 아버지입니다. 딸아이에게 바이올린을 사주지 못해서 기도하고 자기 친구에게 편지까지 보낸 아버지의 얼굴 그리고 한 사람은 아빠의 친구 그 아저씨 얼굴입니다. 옛날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비싼 그 바이올린을 친구 딸에게 자존심 상하게 않게 주기 위해서 7달러에 팔았던 그 오하이오 아저씨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중년 부인 애니는 광고 낸 사람에게 연락했습니다. “제게 바이올린이 있는데 제가 이제는 더 이상 쓰지 못할 것 같아서 넘겼으면 좋겠습니다,” 그 광고를 낸 사람을 만났더니 영판 옛날 자기 아버지 모습이었습니다. 그 광고를 낸 사람이 애니에게 인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러면서 조심 조심 묻습니다. “악기 값을 얼마를 주면 되겠습니까?” “7달러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W.위트먼은 예수님의 그 말씀을 이렇게 나름 부연설명을 합니다. ‘갚음을 받게 되지 않는 사랑은 없다. 이런 것과 저런 것 방법과 사람은 다를지언정 그 사랑은 누구에겐가 꼭 갚아진다.’
이 말씀을 들으니 성경의 한 구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흐르는 물 위에 빵을 던져라.’ 그러면 밑에서 누군가는 먹을 것입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몇 날이 되지 않아서 네가 도로 찾을 것이다.’ 이론상으로는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흘러간 물에 던진 빵이 어떻게 나에게 다시 돌아올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흐르는 물 위에 빵을 던지면 내가 너에게 돌려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반대로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 때 긍휼을 받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고보서 12장 13절에서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주인에게 거액을 빚진 종이 있었다. 그 종은 모든 노력을 다했지만 워낙 큰 금액이라서 그 빚을 갚을 수가 없었다. 주인이 그 종을 불렀다. “자네 몸, 자네 처, 자네 자식, 자네 가재도구 다 팔아서 빚을 갚게.” 그 종이 주인에게 통사정을 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모든 노력을 다해서 빚을 갚겠습니다.” 그 부탁을 받은 주인은 종을 불쌍히 여겨서 빚을 전부 다 탕감을 해주었다.
그 이후에 그 종이 자기 돈을 빌려간 동료 종에게 빨리 나에게 빚진 돈을 갚으라고 독촉하고 또 독촉했다. 그 동료 종이 그 종에게 통사정을 했다. “조금만 연기해주면 내가 갚을 테니 기다려주시게.” 그러나 그 종은 동료의 부탁을 듣지 않고 감옥에 넣고 말았다.
그것을 안 다른 동료들이 해도 너무 한다, 보다 못해 주인에게 일렀다. 주인이 그 종을 불렀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너는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나도 너를 불쌍히 여길 수가 없다. 내가 자네에게 탕감해준 빚 취소다.” 그리고 감옥에 집어넣어버렸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 이야기 하십니다.
「한 부자가 매일 호의호식하면서 살았다. 그 집 앞에 병든 거지가 있었는데, 그 집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고 살았다. 그러던 중에 거지도 죽고 부자도 죽었다. 부자가 죽어서 간 곳은 물 한 방울 아쉬운 뜨거운 곳,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곳이었다. 그 부자가 왜 죽음보다도 더 무서운 그곳에 가게 되었는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유는 단 하나, 자기는 잘 먹고 잘 살면서 병들고 못 먹는 거지를 돌보아주지 않는 죄, 긍휼이 없는 죄였다. 이것 때문에 그 사람은 지옥과 같은 뜨거운 불에 가서 살게 되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 아시는 바처럼 한국 사회가 전반적으로 위기입니다. 나라 자체가 위기이고 사회, 경제 그리고 가정조차도 위기에 처했습니다. 앞으로 한국 사회에 올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될 것인지 알고 이미 나름 채비 차리는 사람들도 많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에 대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에 있는 긍휼이 중요한 핵심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한국이 어쩌다 이렇게 잘 살게 되었나? 어떻게 그 찢어지도록 가난하던 그 나라에서 오늘 이런 나라가 되었는가?’ 우리 기독교인들은 나름 그 이유를, 옛날에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땅에 눈물을 뿌리고 피를 흘리면서 복음을 전한 것,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시고 그 은혜를 베푸셨다고 설명합니다. 맞기는 합니다만 그것은 전체 이유 중에 아주 조금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땅에, 이 대한국민에게 이 대한민국에 그런 은혜를 베풀어주셨는가?’ 긍휼입니다. 불쌍히 여겨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불쌍히 여기면 여러분이 앞으로 잘 먹고 잘 살게 되었을 때, 여러분처럼 가난한 사람, 여러분처럼 찢어지는 아픔을 겪는 사람들을 도와주라는 하나님의 기대가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한국이 한국 사람들이 긍휼을 베풀지 않습니다. 국제사회에서 최악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정도의 긍휼만 손을 폈지 진심으로 그런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한국에 부어주시는 손에 계속해서 힘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에 떨어지는 하나님의 긍휼이 점점 작아져 갑니다. 은혜가 적습니다. 언제 이것이 끊어질지 모릅니다. 지금 한국의 상황이 이렇습니다. 나라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그렇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더 이상 긍휼을 한국에 내려주시지 않는 날이 올 수가 있습니다.
이제 그 누가 아니라 한국 교회의 차례이고 한국 교회의 신자들 차례입니다. 교회가 나서서 신자들이 나서서,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내 아픔을 내 살을 도려내듯이 긍휼을 베풀고 세상을 따뜻하게 하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 무릎에 힘을 주고 부축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긍휼의 손길을 끊으셔야 했지만 긍휼하신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다.’ 그 말씀에 이어서 정반대로 그러나 긍휼이 있는 사람들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 이 말씀을 아주 잘 보여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는 시편 23편 5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광경은 신자 최고의 영광입니다. 여러분들이 볼 수 있는 광경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들을 해코지하기 위해서, 누가 옛날의 잘못된 것을 보복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힘들고 어렵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의 원수가 잔뜩 벼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해칠까, 어려움을 줄까 준비가 다 되어서 덤벼들려고 하는 순간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엄하게 명령하십니다. “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말고 그대로 있어라.” 리모컨에 일시정지라고 있지 않습니까? 잔뜩 달려들어서 퍼부으려고 덤벼드는데 스톱을 시켰습니다. 꼼짝하지 못합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원수를 그렇게 해놓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진수성찬을 차려주십니다. 무엇이 여러분에게 달려든다고 해도 아무 신경 쓰지 말고 내가 지키고 있으니 마음껏 먹으라고 하십니다. 배고픈 사람 먹게 하고, 없는 사람들에게 주머니 채워주시고, 몸 약한 사람 건강 채워주시고 모든 것을 다 채워주십니다. 심판의 사자가 여러분들을 어떤 이유로 말미암아 심판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심판사자에게 “잠깐 멈추어라. 저 사람에게는 긍휼이 있다. 손대지 말라. 가까이 가지 말라.” 라고 큰 소리 치십니다.
긍휼이 있는 사람은 긍휼을 얻게 됩니다. 긍휼은 긍휼을 낳기 때문입니다. 낳은 긍휼이 또 다른 긍휼을 낳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프랑스 항공회사 조종사이던 한 폴란드인이 조국의 전쟁소식을 듣고 조국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이미 독일 수중에 있던 오스트리아 비엔나 호텔에 이 조종사가 투숙합니다. 그때 독일 게슈타포에게 쫓기던 유대인 젊은이가 호텔 방문을 두드리며 이 조종사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잘못하면 자기 목숨도 날아갑니다. 그러나 이 조종사는 유대인 젊은이를 도와줍니다. 생명의 위험을 무릎 쓰고 숨겨주고 극적으로 탈출하기까지 자기 모든 스케줄을 미루고 도와줍니다.
그 후에 이 폴란드 조종사는 조국으로 돌아가서 조종사로서 맹활약을 펼칩니다. 그러다가 전투 중에 격추를 당하고 영국에 불시착을 합니다. 뇌에 중상을 입었습니다. 모든 의사들이 회생불가라는 판단을 내립니다. 아무도 수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시간에 영국 공군 본부에 민간인 의사 한 사람이 자기가 수술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수술했습니다. 대성공이었습니다. 그 의사는 다름 아닌 이 조종사가 얼마 전 비엔나에서 생명의 위험을 무릎 쓰고 구해준 유대인 젊은이였습니다.
이 유대인 젊은이는 그 때 그 조종사의 도움으로 영국으로 탈출했습니다. 그 후 영국에서 진료 일을 하면서 계속해서 폴란드 비행 중대의 소식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에서 폴란드 조종사가 추락했고 회생불가하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 의사는 영국 공군 본부에 연락을 합니다. 그 유대인 의사가 수술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 모든 것이 전적으로 이 유대인의 예감에 의했다는 사실입니다.
어슴푸레 눈뜨는 환자의 눈에 자기를 들여다보고 있는 의사의 눈이 보입니다. 그 의사의 눈에 뽀얀 논물을 보이는 것까지도 보입니다. 그 의사는 감사와 감격에 넘치듯이 환자에게 말합니다.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저는 오랫동안 하나님께서 내가 받은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 저는 당신을 수술했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저는 의사이고 뇌신경전문의사입니다.”
이것도 실화입니다. 긍휼은 긍휼을 낳고 그 긍휼은 또 다른 긍휼히 낳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다시 들으십시오.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이 이런 의미인 것을 충분히 아실 것입니다. ’긍휼이 여김을 받은 자는 내가 긍휼하게 여기겠다.‘
이 나라를 위해서 이 나라의 경제와 사회를 위해서 긍휼을 베푸실 의향은 없습니까? 지금까지 긍휼을 베푸시던 분들은 조금 더 베푸시고, 아직은 긍휼이란 것이 나에게 먼 것이고 나에게 맞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이제는 팔을 걷어붙이고 어떤 형태의 긍휼이든 긍휼을 베푸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시고 하늘에서 감동하시고 이 나라 대한민국의 경제, 이 나라의 사회 그리고 이 나라의 모든 가정 가정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그 일 하실 의향은 없으십니까? 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선한 그 대답은 선한 것으로 열매를 맺고 그 열매를 여러분도 잡수시고 여러분의 사랑하는 사람들 또 그들이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이 함께 넉넉하고 풍성하게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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