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어쩌라고...
신명기 14:22~29 ═══════════════════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면서 독일의 유대인 학살이 시작됩니다. 독일인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는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을 구해내기 시작합니다. 쉰들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유대인 한 사람 한 사람 그 목숨을 독일군에게서 돈으로 삽니다. 돈으로 산 유대인들을 쉰들러는 자기 고향으로 옮겨갑니다. 거기서 안전하게 지내도록 만듭니다. 쉰들러가 구해낸 독일 유대인들의 숫자가 1,100명에 이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구해준 쉰들러에게 자기들의 금니를 뽑아서 반지를 만들어서 전달합니다. 유대인들의 금니로 만든 반지를 받아든 쉰들러가 회한의 독백을 합니다. ‘내가 타고 다니던 자동차를 팔았더라면 열 명의 목숨을 더 구했을 텐데…….’ 자기 옷에 달려 있는 핀을 보면서는 ‘이 핀을 팔았더라면 두 사람의 목숨을 더 구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쉰들러는 슬프게 후회합니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아서……, 내가 하지 않아서……’ 처절하게 후회하는 쉰들러의 얼굴 모습이 아련합니다.
저도 언젠가는 목회활동이 끝날 텐데 목회활동 끝나면 후회하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것 하나가 십일조를 제대로 설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이 저에게 큰 후회가 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그렇게 후회가 되는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불충함입니다. 교인들에게 헌금, 돈 이야기하지 않는 고상한 목사라는 소리를 들으려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귀한 설교에 제대로 십일조를 말하지 않은 불충입니다.
또 하나는 그것을 제대로 전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교인들이 더 큰 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못 얻게 한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제대로 십일조를 가르치기만 했다면 우리 교인들이 그보다는 훨씬 더 큰 복을 받았을 텐데……’ 라는 후회가 저에게 있을 것 같습니다
명절에 여러분들이 아이들에게 세뱃돈을 주고 덕담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저런 덕담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낫겠습니까? 최고의 세뱃돈, 최고의 덕담은 십일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준 봉투 그보다 천 배 많은 세뱃돈을 그 아이들에게 주는 것이 되고, 어떤 덕담보다도 더 복 받는 가르침을 주는 것이 되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이집트를 빠져나와서 40년 광야생활을 끝냅니다. 꿈에 그리던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모세가 긴 설교를 하는데, 그 모세의 설교가 성경 구약의 신명기입니다.
모세의 설교는 십일조에 이릅니다. 십일조의 의미는 간단하게 ‘나의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누어서 보면 먼저는 ‘하나님, 제가 번 것은 전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니 다시 가지고 가십시오. 하나님께 바칩니다.’ 라는 첫 번째 과정이 있고, 두 번째는 그것을 받으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알았다. 네가 바치는 모든 헌금은 다 잘 받았다. 그러나 나는 그 중에서 십분의 일만 가질 테니 나머지 열의 아홉은 네가 쓰라’ 이 과정을 생략하고 십분의 일만 바치는 것이 현재 여러분들이 아시고 계시는 십일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십일조의 법은 여러분들이 보통 알고 계시는 십일조 하나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가 더 있습니다. 제 2의 십일조라는 십일조가 하나 더 있습니다. 먼저 십일조를 바치고 남은 소득 가운데서 다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것을 제 2의 십일조라고 하는데 이 두 십일조의 용도는 각각 다릅니다. 첫 번째, 통상 우리가 알고 있는 십일조는 하나님의 일만을 담당하는 레위인 그리고 제사장들의 생활비 용도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생활비 벌려고 다른 일 하다가 하나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우를 범치 않도록 하기 위해서 생활비를 드려 하나님 일에 전념하시라고 드리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제 2의 십일조 용도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감사의 식사를 하는 경비로 사용되었습니다.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라는 23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마땅히 매년 토지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라는 22절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십일조이고, 23절은 제 2의 십일조입니다. 이것 때문에 제 2의 십일조를 ‘축제의 십일조’라고 합니다. 먹을 때 감사함으로 좋게 먹고 넉넉하게 먹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감사의 식사를 할 때 하나님의 일을 하는 분들이 따로 잔치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그분들을 모시고 함께 잔치하라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이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27절)
그런데 제 2의 십일조로 감사의 식사를 할 때 주의할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것은 우리 마음대로 먹으라고, 마음대로 쓰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장소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식사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장소를 정할 수 없습니다. 정한 장소에서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느 가정에서 식사를 한다면 식탁 맨 상석을 하나님의 자리라고 비워둡니다. 명절에 제사지낼 때 조상들에게 밥 한 그릇 따로 떠 드리는 것과 똑 같습니다. 식탁 한 자리를 하나님 자리라고 정해두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왔을 때 자리가 없으면 이곳은 하나님의 자리인데 네가 이 자리에 않으라고 하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식사를 할 때 ‘하나님, 이제 우리가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먼저 드십시오. 하나님이 드셔야 우리도 먹을 수 있지요.’ 라고 감사하면서 식사하는 것입니다.
또 제 2의 십일조 하나의 용도는 구제입니다.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28절).. 매 3년 끝이니까 6년에 두 번입니다. 6년 중에서 두 번은 식사를 하지 않고 저축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디에 쓰는가요? 그것을 성경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29절)라고 설명합니다. 준비했다가 그 분들께 넉넉하게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교회에 사랑의 쌀독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많이 퍼가기도 하고 또 때로는 남기기도 하는데, 지하 1층 늘 있는 거기다 넉넉하게 준비해둡니다. 그러면 필요한 사람들이 가지고 갑니다. 우리 교회에서 한 달에 한 번 하는 구제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헌금할 것 다 하고 따로 나갈 때 한 번 더 헌금합니다. 그것으로 특별하게 어려운 사람들을 돕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에게 십일조를 말씀하셨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십일조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당연하게 떠오르는 의문 그리고 걱정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사는가? 우리는 어쩌라고 이렇게 하시는가? 우리가 버는 것 전부를 써도 모자랄 판인데 십일조를 떼고 거기다 또 제2 십일조를 바치고 나면 그 나머지만 가지고 어떻게 살라고 하시는가?’ 라는 의문과 걱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십일조 제대로 바쳤다가는 살기 어려울 걸?’ 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 제대로 바치는 사람은 무언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비아냥거림을 속으로 받을 수 있고, 속된 말로 하면 십일조는 바치는 사람만 손해라는 인식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해봅니다. 여러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이 개연성들을 하나님께서 모르실까요? 세상의 모든 일들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과연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의문, 걱정 혹은 비아냥거림을 모르실까요? 하나님은 당신이 그렇게 사랑하신다고 하면서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들이 세상 사람들과 달리 십일조를 내고, 또 이런 저런 헌금을 내고 남은 것만으로 살 때 세상 사람들보다 더 못살게 될 가능성을 모르시고 무조건 바치라고만 할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버지라면 여러분의 자식에게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더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자람이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절대로 그러실 리가 없습니다.
그것을 명쾌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다음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6:25-26)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28-33)
다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십일조 바치는 것 때문에 당신의 자녀들이 어렵게 사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을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십일조 바치는 사람들이 안 바치는 사람들보다 손해가 되는 일은 절대로 없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아시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확실히 가지고 계시면서 챙겨주십니다. 이것을 확실하게 하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십일조를 바치고 또 제 2의 십일조를 바치고 나면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29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손해가 아니라 도리어 복을 받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신명기 12장 1절입니다.
‘네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 이 말씀은 십일조 그리고 제 2의 십일조를 말씀하시기 전에 그 근거로 하신 말씀입니다. 즉 이 말씀은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지금 바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버는 것이 없는 이 광야에서 바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가나안에 들어가면 돈을 벌고 재산이 일궈지면 그때 바치라는 말씀입니다. 조금 더 다르게 말씀드리면 바칠 것이 없을 때, 돈 버는 것이 없으면 안 바쳐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나중에 내가 여러분들에게 재산을 주고 여러분들이 벌 수 있도록 할 때, 내가 준 것 중에서 일부를 바치라’는 말씀입니다.
잘 아십시오. 하나님은 주지 않으시고 바치라 하시지 않습니다. 벌게 안하시고 번 것이 없는데 바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 있게 하시고 아무것도 벌지 못하는 사람에게 벌게 하시고 그 중에서 일부를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이런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복잡하게 하시지 마시고 열을 주실 것이 아니라 아예 아홉을 주면 이런 복잡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만약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하나님께서 열을 주실 것을 아홉만 주면 십일조를 안 바쳐도 됩니다.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때 여러분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번 이 아홉은 전적으로 내 능력으로 내 재주로 번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고 그렇게 벌 수 있는 머리도 능력도 재주도 주시고 환경도 주셔서 내가 벌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 돈을 번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이 복이 아니고 화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
십일조 제도는 하나의 테스트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 자기가 버는 것이 자기의 능력으로 그렇게 벌고 가지게 된 것으로 아는 사람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을 못난 나에게 하나님께서 벌게 해주시고 재산을 가지게도 해주셨다고 고백하는 신앙의 사람인가? 또 다른 말로 한다면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주실 만한 그런 사람인가 아니면 그럴 가치가 되지 못하는 사람인가?’ 하나님께서 테스트하기 위해서 주신 제도 그것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그것 때문에 성경에서 가장 강력하게 약속하시고 심지어는 내 약속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나를 한 번 시험해보라고 말씀하시면서 하신 것이 십일조입니다. 말라기서에서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시험 하실 분들은 한 번 해보십시오.
오늘은 부득이 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특별히 이 이야기를 청년들과 젊은이들에게 더 하고 싶습니다. 그들과 나누고 싶은 것이 지금 드리는 제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저는 하나님께 정말 복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그 이유를 생각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무엇을 보시고 나에게 어째서 이런 은혜와 복을 주셨는가?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지금까지 얻은 답 중에 하나가 십일조입니다.
저는 좋은 집에서 태어났지만 무엇이 잘못 되어서 어려서부터 어렵디 어려운 환경에서 살고 공부했습니다. 그것이 대학 4학년 1학기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4학년 2학기 때 취직을 했습니다. 당시 월급쟁이 최고의 대우를 받았고 그 중에서 최고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때 저는 봉급을 받으면 맨 처음 한 것이 십일조를 뗐습니다. 그 당시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 최고로 받았지만 그 봉급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십일조를 뗀 나머지 가지고 반을 떼어서 어머니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나머지 반만으로 살았습니다. 저도 자식이 있던 터라 쉽지 않았습니다. 물론 최고의 좋은 길로 갔지만 쉽지 않은 가운데 계속해서 그런 십일조의 삶을 살았습니다. 어머니에게 보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형님에게 그것을 보냈습니다. 부모님께로부터 물려받은 것 없는 저였지만 주변에 비해서 최고의 시절이었습니다. 점점 더 환경이 좋아졌습니다. 한참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어제 밤에 부르셨는데 오늘 새벽에 회사에 사표를 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랐습니다. 단지 하나 제 마음에 걸리고 아팠던 것은 어머니께 돈을 못 보낸다는 것이었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였습니다. 그 후 목회 길 가는 모든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과 시련과 테스트가 있었지만 그것도 기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잘 넘겼습니다. 인턴 과정, 전도사와 부목사 과정 전부 다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였습니다. 참 제가 복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훈련도 많이 받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선물을 많이 받았습니다.
처음 신학 시작할 때 예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생활환경도 좋고 경제적 여유까지 오히려 많아졌습니다. 그때 고민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람이 이래도 되는가?’ 방법이 잘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고민 끝에 한 것이 십이조였습니다. 십일조 하나는 교회에 바치고 또 하나의 십일조는 구제를 위한 십일조를 썼습니다. 참 행복했습니다. 참으로 희한했던 것은 그럴수록 경제적으로 더 넉넉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 후에 이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개척하는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을 저도 못지않게 겪었지만 개척 이후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여전히 이어졌습니다. 시련과 어려움까지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요 특별한 복이었습니다.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 가운데 경제적인 것을 비롯해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복 중에서 아주 작은 부분밖에 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특별히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큰 복은 우리 사랑하는 교우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각별히 응답을 잘 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지금 확실하게 압니다. 그리고 확실하게 믿습니다. 만약 제가 지금까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복에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그것도 넉넉하게 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의 마지막 말씀을 보겠습니다. 22절에서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23절에서 제 2의 십일조를 말씀하시고 난 뒤 29절 마지막에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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