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猝지도자 참 지도자 (느헤미야 5:1-10)

분당소망교회 2020. 8. 5. 14:42

지도자 참 지도자

 

 

 

느헤미야 5:1~10 ═══════════════════

 

 

10여 년 전에 한 언론인이 당시 가장 유력하던 대통령 후보 A에 대해 한 말이 있습니다. ‘A후보가 이처럼 독주하는 상황에서 만에 하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것은 경쟁 상대보다는 내부의 잠재적인 적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거의 전부를 쥐고 있어서 자책으로 가진 걸 잃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자책으로 상대방에게 반사 이익을 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내부의 잠재적 적 1호는 후보자신이다. 2호는 직계가족 및 친인척이다. 3호는 캠프의 최측근들일 것이다. 자칫 없느니만 못한 혹이 될 수도 있다. 4호는 당 내외의지지 세력이다.’

 

그러면서 그 언론인은 외부의 적은 대비가 쉽지만 내부의 적은 제 살이기 때문에 오히려 다루기 쉽지 않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서운 까닭이다. A후보가 내부의 적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해서 자책골을 막느냐가 정상 정복 유무에 가장 중요한 가늠자가 될 것이다.’

 

A후보는 첫 번 관문은 잘 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관문은 넘지 못하고 크게 그것도 아주 크게 걸려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A후보를 넘어지게 한 것은 그 언론인이 걱정했던 내부의 적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귀환 후에 여러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루살렘 성벽 재건 건축은 잘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처구니없는 말이 느헤미야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이 빚을 갚지 못해서 가옥이 빼앗기고 토지가 빼앗겼다. 심지어는 자녀들을 종으로 팔기도 했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렇게 한 것이 같은 유대민족이요, 지도자들에 속하는 고관들과 귀족들이었고 그들이 이자를 받아도 고금리로 받았다.’ 라는 말이었습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런 상황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당시 돈 빌리는 것에 대한 유대인들의 법은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22:25) 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법이 법 그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 까닭은 이자가 없으면 돈을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돈을 빌려주는 사람도 없었고, 빌리는 사람도 그럴 수 없었으므로 빌리는 사람들이 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자를 줄 테니 빌려달라고 하여 빌렸습니다. 법은 그러했지만 이자는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고리채는 아니 될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불의가 저질러졌고, 그런 불의를 저지른 당사자들이 이스라엘 사회의 고위층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때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일반 백성들은 삶의 터전을 제대로 갖추지 못할 때였습니다. 오로지 나라와 민족과 후손들을 위해서 모든 백성들이 혼신의 힘을 쏟고 있을 때, 그 틈을 이용해서 소위 사회 지도층이라는 인사들이 그런 일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적은 외부의 적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부의 적도 있고, 그리고 내부의 적은 외부의 적보다 훨씬 더 무섭습니다. 역사가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멸망은 외부의 군사적 압력에서 시작한다기보다 내부의 윤리 및 정신의 타락에서 시작한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강대국의 멸망은 내부에 원인이 있었다. 예를 들어서 로마 제국의 멸망도 흔히 말하는 게르만 민족의 침입 때문이 아니라 내부의 사치, 타락, 분열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디든지 그렇습니다. 나라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내부의 적, 예를 들어서, 경제적인 문제 혹은 군사적인 문제로 인해서 망한 나라가 역사적으로 보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역시 최고였습니다. 멋지게 처리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 나라에 많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들이 되어주십시오. 이런 인물이 있으면 평화롭게 됩니다. 평안합니다. 이것저것 부족한 것이 있어도 행복을 누릴 수 있고,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른들이 지도자들이 어떻게 하는지에 달려있습니다. 외부의 문제가 아닙니다.

 

느헤미야가 이것을 멋지게 처리합니다. 어떻게 처리했는지 여러분들에게 낱낱이 보여주시는데, 하나님께서 왜 이런 멋진 모습을 오늘날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지 알아야합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실 말씀이 있어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보여주십니다.

 

먼저는, 이런 힘든 일, 속상한 일이 있음에도 느헤미야는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화가 크게 났습니다. 충분히 화 날만 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화를 참았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은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깊이 생각하고’(6-7) 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정적인 대응은 필경 부르는 것이 있습니다. 또 다른 감정적인 대응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감정적으로 대하면 그 사람도 감정적으로 나를 대합니다. 예를 들어 A라는 문제가 있는데, 감정적으로 하면 본질을 벗어나서 다른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을 흔히 논리의 오류라고 표현합니다. 때로는 본래는 별 것 아니었는데 훨씬 큰 문제로 바뀝니다. 그럴 경우에 문제 해결은커녕 문제를 더 크게 만들고 본래의 문제보다 또 다른 더 큰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내가 상처를 받은 일, 원통하고 억울한 일, 정말로 가슴 터지는 일이 있을 때 감정적으로 처리하면 문제가 해결이 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원통한 일을 실제로는 한 번 당했지만 감정적으로 처리하다 보니 당하고 또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감정을 내려놓아야지 그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있고 문제를 제대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알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대응하게 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어둠이 스며듭니다. 이 어둠은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여러분들은 알아야합니다. 어둠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이 생겨납니다. ‘귀신이 논리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귀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감정적인 일뿐이다.’ 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귀신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 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도무지 우리 이성으로는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귀신이라는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감정적인 곳에서 많이 생겨납니다. 감정적으로 대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입니다.

 

 

 

느헤미야는 화를 참고 깊이 생각합니다. 이 사태의 본질은 무엇인가? 어디서 생겨났는가? 어떻게 대응하면 되는가? 나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깊이 생각했습니다.

 

잘 아십시오. 억울할수록 더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원통할수록 더 깊이 생각해야하고, 화가 나고 분통이 터질수록 더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깊이 생각할 때 길이 보입니다. 때로는 그렇게 깊이 생각하고 기도하면 이것은 정말로 하나님께서 길을 주셨다는 그 길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 얼굴 앞에 가면 화를 낼 수가 없습니다. 분통이 안 터집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길을 주시고 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감정을 다스려주십니다. 그래서 깊이 생각하고 기도해야합니다.

 

 

 

두 번째, 느헤미야는 이것을 공개적으로 다루었습니다. 7절 마지막에 대회를 열고 그들을 쳐서라는 말씀에서 대회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큰 회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공개적인 회의, 많은 사람들이 모인 회의, 누구든지 참석할 수 있는 회의를 열어서 공개적으로 처리했습니다.

 

사적으로 처리하면 잘못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몇몇의 의중대로 끌려갈 수 있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판단을 짚을 수가 없습니다. 사적으로 하면 그렇습니다. 몇 몇 사람이 모여서 하면 그럴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기 위해서 대 회의를 열었습니다.

 

 

 

, 공개적으로 다룰 때 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7)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히브리 원어로 리브라는 말로 법적 용어, 하나님의 법정의 용어입니다. 즉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 법정 가운데 재판장으로 앉으셔서 너희들이 이럴 수 있느냐?’ 라고 책망하시는 책망을 했습니다. 느헤미야의 권위로 책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로 책망했습니다. 그렇게 할 때 감정이 상하지 않습니다.

 

귀족들과 민장들을을 꾸짖어’(7)

 

이들은 정부의 고위 관리들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정부의 고위관리들을 책망하는 까닭 하나는 그 고위관리들이 불법의 당사자인 가능성이 많습니다. 여유 있는 사람들은 몇 사람밖에 없었는데, 그 사람들이 돈을 빌려주면서 고리로 받고 집과 땅을 싸게 경매로 잡고 심지어 여자 아이들을 종으로 잡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즘 청문회를 보면 도대체 걸리지 않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대체로 일반 서민들은 착합니다. 군대 가라면 가고, 세금 내라면 내고, 불법하지 말라면 하지 않고 착하게 살아갑니다. 여러분 때문에 이 나라가 버티는 것입니다. 잘난 사람 때문이 아닙니다. 어느 시대에나 그러했습니다.

 

 

 

고위관리들, 사회 지도 계층 중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런 책망을 들으면 억울할 것입니다. 그러나 억울한 것이 아닙니다. 지도자는 이것까지 책임져야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잘못할 때 아니라고 지도도 해주어야하고 책망할 줄도 알아야 하고 세상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모범도 보여주어 합니다. 이런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어쨌든 지도자의 책임이 큽니다.

 

이럴 때 흔히 있을 수 있는 개연성을 생각해봅니다. 지도자들이 이런 책망을 받으면 반발이 있습니다. 이들이 반발하면 시끄러워집니다. 또 하나는 느헤미야 본인도 지도자 그 중에서도 최고 지도자였기 때문에 자기의 책임도 있고 자기에게도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최종 책임은 최고 지도자가 져야합니다. 이런 우려가 있었지만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런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개의치 않았습니다. 반발이 무서워서, 부끄러움이 무서워서 쉬쉬하고 넘어가면 이것 때문에 나라가 점점 썩어서 문드러집니다. 느헤미야는 반발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정당하게 할 말을 다했고 자기 부끄러움도 감추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정직하게 다 밝혔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8)

 

옛날에는 우리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고 종이 되었는데, 이제는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형제를 종으로 삼느냐는 책망입니다.

 

너희의 소행이 좋지 못하도다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9)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그럴 수 있습니까?’ 라고 말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의 귀한 덕목을 가졌습니다. 이런 비판, 비난, 책망, 호통을 치면서 그냥 호통만 치고 비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잘못한 사람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길을 제시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그들에게 오늘이라도 그들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이며 너희가 꾸어 준 돈이나 양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백분의 일을 돌려보내라’(11)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었습니다. 지도자 중에는 큰 소리만 치고 남을 비난하고 비판만 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대해서는 비판을 잘 하면서도 자기 의견을 통 내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견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모자라고 함량이 안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도자로서 배워야할 것을 배우지 못하고, 큰소리만 치고 야단치고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만 배웠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돈 번 사람을 졸부라고 합니다. 졸부가 있듯이 지도자도 있습니다. 어쩌다 줄을 잘 서서 지도자가 된 졸지도자도 괜찮습니다. 그 다음에 잘 배우기만 하면 됩니다. 문제는 그런 사람일수록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연하게 지도자가 되고 당연하게 부자가 된 것으로 생각해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책망을 들으면 온갖 변명을 다합니다. 아내 때문이라든지, 다른 사람들은 다 하는 것을 나도 했다는 등 별 소리를 다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아주 잘하는 것이 있습니다. 책망하는 사람의 별별 흠을 잡아 공격하는 것입니다.

 

 

 

다행히 이스라엘의 중간 지도자들은 느헤미야의 책망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이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8)

 

핑계대지 않고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당신 말씀대로행하여 돌려보내고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아니 하리이다 하기로’(12)

 

참 다행입니다. 이 정도 되어야합니다. 야단치면 받아들일 줄 알아야합니다. 이 정도가 되면 우선 최소한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라가 다시 회복할 가능성이 있고, 사회가 회사가 다시 일어설 가능성이 있고 가정도 일어설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중간 지도자들은 그런 최소한의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중간 지도자들이 어떻게 하여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우선 하나는, 이스라엘의 중간 지도자들에게는 기본 신앙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의 거품이 있습니다. 신앙적인 행동은 잘 하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양파처럼 속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속이 있으면 설사 실수를 했다 하더라도 크게 잘못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핵심이 있고 구심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가망이 없습니다.

 

양파같이 겉은 멀쩡한데, 속에 하나도 없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기본 신앙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의할 것은, 기본 신앙이 있다고 할지라도 기본 신앙도 훼손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있어도 계속 관리하지 않으면 훼손되어서 백묵으로 칠판에 쓴 글씨가 흐려지듯이 점점 희미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본 신앙을 수시로 다시 학인하고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만 있으면 괜찮습니다. 그것만 있으면 하나님과 교통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도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스스로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중간 지도자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느헤미야의 모본 바로 이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간절하게 부탁드리는 것은 여러분들이 모범적으로 사십시오. 자식들에게 모범이 되는 아빠,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모범이 되는 상관, 사장님, 회장님이 되시고, 혹시 나라의 일을 하시는 분들은 이런 사람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세상이 다 썩어가는 이런 시대에 저런 사람도 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알고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해야 할 노릇입니다.

 

느헤미야는 처음부터 모범적이었습니다. 당시 강대국 페르시아의 고위관리였던 느헤미야는 조국과 민족에 늘 관심 가졌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졌고 마음대로 즐길 수 있었지만 느헤미야는 자기 안락은 뒤로하고 조국을 생각하고 동포를 생각했습니다. 실제적인 일 하나하나에까지 모범을 보였습니다. 페르시아에서 이스라엘까지 상당히 먼 거리였습니다. 그 먼 길을 가고서도 다른 사람들은 다 쉬고 잠자는 시간에 일어나서 시종들 몇 사람만 데리고 나가 어디가 잘못 되었는지 찾아다녔습니다. 그렇게 다녀와도 아무도 그가 그렇게 다닌 것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일손이 모자라자 자기 돈으로 고용한 개인의 일꾼들까지도 나라의 일에 동원했습니다.

 

 

 

또 법을 모범적으로 지켰습니다.

 

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양식을 백성에게 꾸어 주었거니와 우리가 그 이자 받기를 그치라’(10)

 

법이 그렇게 정했으면 자기는 그대로 지켰습니다.

 

 

 

백성들이 세금 내느라고 힘드니 어떻게 하면 백성들의 세금을 덜어줄 수 있을지 생각했고, 그것을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실천했습니다.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이 십년부터 제삼십이년까지 십이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14)

 

마땅하게 받아야할 월급도 받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15)

 

 

 

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으며

 

기회만 되면 치부를 하려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달랐습니다.

 

또 내 사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백오십명이 있고 그 외에도 우리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한 마리와 살진 양 여섯 마리를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번 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하였을지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이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었더라‘(17-18)

 

나라의 일을 하기 위해 나라의 돈을 써도 되지만 느헤미야는 자기 돈으로 썼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여러분도 이런 멋진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돈은 이렇게 쓰는 것이다, 인생은 이렇게 사는 것이다.’ 이런 멋진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이타적으로 정말로 하나님 뜻대로 살면 행복이 있습니다. 만족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웃을 수 없을 때 웃을 수 있습니다. 노래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권력을 가지고도 돈을 쌓아놓고도 웃지 못하고 감옥에 가고 창피당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이제 생각해봅니다. 어떻게 해서 느헤미야는 멋진 모습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물론 느헤미야 개인적 인격으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 아십시오. 한 인간 개인으로는 어느 정도까지는 할 수 있지만 어느 정도를 넘어가면 달라집니다. 이런 멋진 느헤미야의 모습을 인간의 인격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느헤미야가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나라를 위해 지출한 재산,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필요하다면 훨씬 더 많이 주실 수 있다, 이것을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것 때문에 페르시아의 고위관리로 세우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을 보십시오. 느헤미야가 이런 저런 것 다 하고 난 뒤 기도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헤를 베푸소서’(19)

 

어떻게 보면 약간 유치한 것 같지만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는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결단코 내가 무엇 조금 하고 대가를 얻고 더 누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더 받고 더 누리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생각했고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즉 그것은 느헤미야가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신앙인이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여러분, 이렇게 한번 살아보십시오. 여러분이 먼저 행복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의 아내가 행복하고 여러분과 함께 하는 가족들이 행복하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행복합니다. 특별히 큰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서신 그 자리에서 이렇게 사시기만 하면 하나님도 행복하시고, 여러분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