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일의 완성이란... (느헤미야 6:1-9)

분당소망교회 2020. 8. 12. 16:15

일의 완성이란...

 

 

 

 

 

느헤미야 6:1~9 ═══════════════════

 

 

 

얼마 전, 로마 가톨릭 교황 프란치스코가 신도들이 손 반지에 키스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비난의 목소리가 일어났습니다. 그 비난 소리가 커지자 로마 가톨릭 교황청이 해명의 말을 발표했는데, 어정쩡한 해명의 말이었습니다. ‘교황이 반지 키스를 거부하는 것은 사람들이 반지에 입을 맞추다가 세균에 전염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교황청 해명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던 유대 교권주의자들에게 하셨던 예수님의 최고의 명답을 연상하게 합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선문답 같습니다. 쓸데없는 소리로 시끄럽게 하지 마라, 자꾸 일 만들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개혁적인 로마 가톨릭의 교황들은 권위주의 탈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바오로 6세는 교황이 왕관을 쓰는 관습을 폐지시켰고, 요한 바오로 1세는 교황 대관식을 최소로 간소화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규모가 크지만 상당히 간소화한 것이 그것입니다. 지금 프란치스코 바로 앞 교황인 베네텍트 16세는 교황의 코트 즉 교황의 가운 가운에 그려진 왕관 무늬를 떼버렸습니다. 아마 프란치스코도 그런 의도였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본래 손등이나 반지에 키스하는 것은 왕이나 황제에게 하던 존경의 표시였습니다. 프란치스코가 그런 권위 의식을 버리고 싶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그대로 설명하면 또 여기에 문제가 생깁니다. 가톨릭 교회의 권위주의를 선호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상당히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그러한 이상한 해명을 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바른 일, 선한 일, 특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할 때 항상 가로막는 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잘 아십시오. 이겨야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그 적에게 져서 인생이,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일반생활에서도 힘든 일이 있습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지피지기가 필요합니다. 상대방 적도 알고 나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무서운 적도 적을 제대로 알기만 하면 그렇게 무서워할 것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호랑이가 어흥소리를 내는 것은 두려워서입니다. 미지의 세계, 미지의 상대방에게, 자기보다 약한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어흥소리를 내는 것은 두려움이 있어서라고 합니다. 호랑이도 그렇게 무서워할 것이 없습니다. 호랑이인줄 알았는데, 상대방을 알고 보면 종이호랑이에 불과한 적이 될 수 있습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크게 문젯거리가 되는 미세먼지가 그렇습니다. 大氣 과학자가 말했습니다.

 

어느 순간 미세먼지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존재, 핵미사일보다 겁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실은 서울의 오염먼지 농도는 2000년대 초반이 지금보다 50% 이상 더 높았다.’

 

 

 

신앙인들의 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을 두려워하기는 해야 하지만 너무 겁낼 것이 없고 너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제대로 알기만 하면 됩니다. 몰라서 당하는 것이지, 알면 무서울 것도 없고 당할 것도 없습니다.

 

먼저 신자들의 적을 알아야합니다. 이 적은 우리 생각보다 상당히 강합니다. 적의 숫자도 많고 종류도 많고 아주 강하고 영악스럽습니다. 그리고 무섭습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뛰어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독교 신자들의 적에 대해서 느헤미야서를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해주시는데, 이 기회를 통해서 신자들의 적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되면 인생이 편해집니다. 알면 겁낼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인생이 편해지고 병에 잘 안 걸리고, 있던 병도 낫습니다. 사실입니다.

 

 

 

먼저는 신자들의 적은 언제 공격하는가?’ 공격의 때가 언제인지 그 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시도 때도 없습니다. 처음에도 공격하고 중간에도 또 나중에도 공격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할 때에 더 달려듭니다.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려고 할 그때 마귀가 덤벼들었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라’, 그 다음에 아래에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 위 저 높은 곳에서 슈퍼맨처럼 멋있게 뛰어 내려라’, ‘나한테 한 번만 절하면 세상 만국 부귀영화를 주겠다.’

 

그때 예수님은 대장정을 나서는 때여서 다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대장정의 길은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런데 마귀는 쉽게 가라, 힘들게 하지 말라고 유혹 합니다. 인생살이를 그리 힘들게 어렵게 할 필요가 뭐 있는가? 하나님의 종노릇을 하면서도 가능하면 쉽게 해야지 무엇을 그리 어렵게 하는가? 하나님의 종들에게 다가오는 이러한 유혹, 이것은 무서운 적입니다.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서 돌아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아서 편하게 쉬는 때에 느헤미야는 밤중에 성벽을 다 돌아보았습니다. 현황을 파악하고 난 뒤에 동족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2:17)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2:18)

 

즉 이제 일어나 건축하자고 했는데, 이때에 적이 나타났습니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아와 아라비아 사람 게셉이 이 말을 듣고 우리가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 이르되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2:19) 처음부터 방해가 있었습니다.

 

 

 

일이 잘 될 때에 또 덤벼듭니다. 집안이 좀 편안하다고 싶을 때, 교회가 좀 안정되었다고 싶을 때에 반드시 덤벼듭니다. 좀 안심하고 잠시 쉬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할 때 덤벼듭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을 그때가 언제인지에 대해서 성경은 40일 금식이 끝난 뒤라고 말씀하십니다. 40일 금식이란 참 쉽지 않습니다. 보통 40일 금식기도를 끝내 당장 드는 생각이 내가 손만 들면 병자가 다 낫는다, 내가 기도만 하면 저 사람 기도가 다 응답된다는 확신이 든다고 합니다. 이때에 마귀가 덤벼들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내가 성벽을 건축하여 허물어진 틈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6:1)

 

이때였습니다. 일단의 일이 끝이 났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건축은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하나는 성벽을 건축하는 것이고 하나는 성문 건축하는 것입니다. 그 중 하나는 끝냈습니다. 잘 아십시오. 이럴 때 아차 방심하면 그동안 어렵게 쌓아둔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다 무너집니다. 쌓은 것뿐 아니라 있던 기초까지 다 빼앗기고 무너지고 맙니다. 잔뜩 긴장해야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은 언제 쉴수 있을까요? 미안하지만 쉴 때가 없습니다. 대신에 한 백년 이 땅의 시간보다 천 배, 만 배 긴 시간 최고의 평화, 최고의 힘을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방심하지 마십시오. 아이 잘 키웠다, 내가 무엇을 이루었다, 사업 이루었다, 그것도 아닙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눈 감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때까지 방심하면 안 됩니다.

 

 

 

그 다음에 하나 더, 전환이 있을 때 또 덤벼듭니다. ‘그때는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였더라라는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성벽을 다 재건하고 이제 문짝만 달면 됩니다. 자동차 사고가 언제 어디서 많이 나는지 아실 것입니다. 골목길에서 빠져나가는 전환이 있을 때 사고가 많이 일어나고 또 횡단보도 신호등 앞에 사고 표시가 많이 있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도 언젠가는 담임목사가 교체가 되어야하는데 이때 반드시 적들이 덤벼듭니다. 반드시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어둠의 종노릇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그런 적들을 일단은 허용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허용하시고 난 뒤에 어둠들이 해야 할 노릇을 하고 나면 부러뜨려버리십니다. 성경 역사에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상당한 훼손이 있기도 합니다만 교회는 반드시 이깁니다. 그 적을 하나님께서 가차 없이 부러뜨립니다. 여러분들은 그 노릇하지 마십시오.

 

 

 

다음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적들의 공격의 종류, 방법입니다. 참으로 다양합니다.

 

맨 처음 인간에게 시험하려고 덤벼들었던 뱀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선악과만큼은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뱀이 하와에게 교묘하게 말을 바꿉니다, “동산의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 때 대답은 어떠했습니까? 하와는 선악과만 먹지 말라고 하셨다고 아주 쉽게 대답했습니다. 마귀는 뻔히 압니다. 알면서도 쉽게 접근해서 시작하려고 그렇게 덤벼든 것입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경계심을 풀기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마치 나와 대단히 가까운 사람인 것처럼, 나를 위하는 사람인 것처럼,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인 것처럼 접근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렇습니다. 그 적들은 느헤미야를 여러 차례 초청했습니다. 첫 번째 초청은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계속해서 네 번이나 초청했습니다. ‘그들이 네 번이나 이같이 내게 사람을 보내되’(4) 네 번이나 보내면서 틈을 노렸습니다. 초청을 거절할 때 이런 말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느헤미야 총독이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만나주지 않는다, 백성들의 힘든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저 사람이 어떻게 진정한 우리의 지도자가 되겠는가?’

 

그 다음 공개편지를 보냈습니다.

 

다섯 번째는 그 종자의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를 들려 내게 보냈는데’(5)

 

편지가 봉하지 않았으니 내용이 이미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 공개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고 사람들이 오해를 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모함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6)

 

여기서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혹시 어떤 사람이 여러분들에게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어서 무엇을 말하게 되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바로 여러분의 적이라는 것을 아십시오. 항상 다른 사람의 이름을 핑계 합니다.

 

너와 유다 사람들이 모반하려 하여 성벽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도다’ (6) 라고 말하면서 그런즉 너는 이제 오라 함께 의논하자 하였기로’ (7)

 

마치 생각해주는 듯이 말합니다. 이렇습니다. 속지 마십시오. 무엇보다 여러분들 이런 당사자는 결단코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절대로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대적들이 이렇게 한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처음 소문이 나면 사람들은 설마 그럴 리야 있겠는가?’ 라고 말합니다. 그러다 또 들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또 조금 더 지나면 그렇다더라.’ 라고 하고, 그 다음에는 확신으로 들어갑니다. ‘내가 아는데 그것이 맞아!’ 이처럼 점점 의혹이 불어나다가 끝내는 알지 못하던 사람들도 확신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것을 유도하는 어둠이 참 무섭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종까지 사용합니다. 그럴 리가 없겠는가 하겠지만 사실입니다.

 

이 후에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불출하기로 내가 그 집에 가니 그가 이르기를 그들이 너를 죽이러 올 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머물고 그 문을 닫자 저들이 반드시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하기로’(10) 라는 말씀을 보십시오. 제사장 스마야가 안 보여서 걱정이 되어 찾았더니, 그 스마야가 느헤미야를 걱정하는 척하면서 함정으로 끌어들입니다. 상당히 생각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다행히도 느헤미야가 알아챘습니다,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여 나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고 깨달은즉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가 아니라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내게 이런 예언을 함이라’(11-12)

 

이처럼 하나님의 종까지 동원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믿는 것은 하나님이어야지 목사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를 통해서 하나님 뜻을 전하는 것이고 여러분은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지 목사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 스마야가 이런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나한테 오라, 나와 함께 성전에 숨자

 

느헤미야는 총독이라도 평신도입니다. 평신도는 성소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이 소문을 퍼뜨리고 싶었습니다,

 

총독이라고 평신도가 들어가지 못할 성소에 들어갔다, 하나님의 법을 어겼다..’

 

그들이 뇌물을 준 까닭은 나를 두렵게 하고 이렇게 함으로 범죄하게 하고 악한 말을 지어 나를 비방하려 함이었느니라

 

 

 

그 다음에는 내부의 적을 만듭니다. 내부의 적은 대단히 무섭습니다. 내부의 적은 이기기 힘듭니다. 가정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부의 적은 파문을 일으킵니다. 내분을 일으킵니다. 결집력을 약화시킵니다. 나라의 결집력 그리고 교회의 결집력을 약화시킵니다.

 

그때에 유다의 귀족들이 여러 번 도비야에게 편지하였고 도비야의 편지도 그들에게 이르렀으니 도비야는 아라의 아들 스가냐의 사위가 되었고 도비야의 아들 여호하난도 베레가의 아들 므술람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므로 유다에서 그와 동맹한 자가 많음이라’(17-18)

 

이들은 서로 사돈지간이었습니다.

 

그들이 도비야의 선행을 내 앞에서 말하고..’ 이렇게 해서 내부 분란을 일으켜나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둠의 공격의 주 대상은 지도자입니다. 가정에서는 항상 가장입니다. 나라에서는 나라의 최고 지도자 교회도 마찬가지로 교회의 최고의 지도자를 공격합니다. 가정에서 가장이 무너지면 끝입니다. 가장 되신 여러분들 정신 바짝 차리십시오. 이유가 어떻든 가장이 정신 차리고 바로 서야합니다. 그래야지 여러분 가정이 편안하고 자식들이 제대로 설 수가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가장은 가장의 자리에 제대로 서야합니다.

 

 

 

그 다음에 하나 더, 한 번 물리쳤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물러설 뿐 반드시 돌아옵니다.

 

제대로 된 하나님의 사람들은 평생 쉴 틈이 없습니다. 영적인 전쟁에서는 쉴 틈이 없습니다. 누가복음에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하고 얼마동안 떠나니라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유혹하고 시험하다 실패했습니다. 실패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이렇게 기록한 까닭이 있습니다. 마귀는 아무리 지고 또 져도 절대로 완전하게 물러나지 않는다, 다시 덤벼든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여러분들에게 다가오는, 교회에게 다가오는 눈에 보이는 적은 진짜 적이 아니라 가짜 적이다, 진짜 적은 그 일 뒤에 그 사람 뒤에 있는 어둠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판 것은 가룟 유다입니다. 그러나 잘 아십시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마귀가 사탄이 예수님을 팔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2절은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이런 도구가 되지 마십시오. 성령님에게는 문을 열고 어둠의 영에게는 문을 꼭 닫으십시오. 넘어가지 마십시오. 누가복음 223절은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룟 유다가 아니고 진범은 마귀 사탄이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어떤 형태, 어떤 방법, 어떤 이유든지 간에 하나님의 가정, 하나님 신자들의 가정을 어렵게 하는 사람, 하나님의 일과 교회를 어렵게 하는 자는 마귀이고 사탄의 도구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너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지피知彼그 다음 지기知己로 돌아와야 합니다. 신자들이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알아야합니다. 그것은 단 하나입니다. 나의 힘으로서는 우리의 적을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는 분명하게 알아야합니다. 절대 자만하면 안 됩니다. 반드시 집니다. 대신 여러분이 아실 것은 나는 진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길 수 있는 예수님이 계신다.’ 이것은 확실하게 알아야합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이길 수 있다는 이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으면 절대로 이기지 못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지려고 작정한 사람입니다.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그 자식을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잘 아십시오, 내 아들, 내 딸 어떻게 되어도 괜찮다는 포기 선언이 바로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위대한 비결이 바로 이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총독입니다. 그 당시 유대에서 가장 높은 사람입니다. 페르시아의 왕 대신에 총독으로 온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그 총독의 힘으로 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기도로 철저하게 하나님께 의지했습니다. 처음 조국을 위해서 일을 시작할 때에도, 일이 진행되는 순간순간마다 그때그때마다 기도했습니다. 대적들이 덤벼들었을 때에도 기도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또 유혹을 받습니다. ‘이는 그들이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그들의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라는 9절 말씀을 보십시오. 느헤미야가 하나님,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것으로 이겼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하나님의 힘을 받아야합니다.

 

이것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신 것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셨습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세상의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인간으로 있는 이상, 내가 현재 인간의 몸을 입고 있는 이상 내 힘으로 이길 수 없다, 나도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아야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의 그 기도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완성이라는 무엇인가요? 내 자녀 다 키운 것, 내 가정의 삶의 모든 준비를 다했다는 것일까요? 아이들 대학 보내고 혹은 아이들 결혼 잘 시키고, 좋은 사위, 좋은 며느리를 보는 것일까요? 백 살까지 먹고 살 것은 챙겨놓은 것이 완성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있어서 완성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순간,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순간입니다. 일이 끝났든지 아니든지, 일이 진행되든지 아니든지, 일이 아직 시작되었든지 시작되지 않았든지 간에 그 모든 일을 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맡기는 순간이 완성입니다. 아직 그렇게 못했어도 괜찮습니다. 지금 뭔가 잘못 되어 있어도 괜찮습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는 그것이 완성이라는 사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성도들이 말하는 참된 평화, 참된 안전은 실제로 안전한 상황, 실제로 평화의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지하는 그 자체, 하나님께 위탁하는 그 자체가 평화이고 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