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있는/없는..
사무엘상 13:1~7 ═══════════════════
얼마 전 일간 신문에 보도된 내용입니다. 「요즘 서울 강남권 최근 유행 중 하나는 해외 투자 이민 설명회이다. 호텔이나 컨벤션 센터 등에서 번갈아 열린다. 최근에는 이민 사업자들이 이민 상담이 급격하게 늘어 정신이 없다고 말할 정도다. 일시적인 붐만은 아니다. 이민 희망자들이 40대 가장에서부터 20대 젊은이와 70,80대 노년층으로 확대되는 추세이다.」
이 보도 중에 특히 걱정스러운 것이 있었습니다. 이민 러시의 이유 중 큰 것 하나가 정치적․경제적 상황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끔씩 들리던 옛말이 하나 생각납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 종교 가운데 불교의 스님은 절밖에 없습니다. 절 밖에서 다니는 스님도 계시지만, 대부분의 스님들은 절에서 숙식 등 모든 것을 다 해결하기 때문에 절은 스님들에게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절이 너무 싫으면 스님도 절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서글픈 현실을 한탄하는 말입니다.
오늘 1,2,3부 예배 장로님들이 다 나라 걱정하는 기도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걱정하는 것도 좋지만 특별히 기도를 많이 해주십시오. 여러분의 기도는 힘이 됩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그냥 기도도 제대로 하나 하지 못하는 작은 사람의 기도가 무슨 힘이 될 것인지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힘이 있습니다.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사울 왕 때, 이스라엘에서 이민 러시가 일어났습니다. 그 까닭은 이러합니다. 사울이 왕 된지 2년 만에 무슨 이유였던지 군대를 소집하고 그 당시 강대국 블레셋을 공격합니다. 약소국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은 블레셋은 즉각 군대를 소집하고 반격할 채비를 차립니다. 충분히 예상된 일이었지만 동원된 블레셋 군대의 규모는 어마어마했습니다. 그 블레셋 군대의 규모를 알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겁을 먹게 됩니다. 숨고 도망하고 심지어는 해외로 피난하는 오늘날 말로 한다면 이민까지 가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되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그를 따른 모든 백성은 떨더라’ 라는 7절이 그것을 말씀합니다.
이민을 갑니다. 나라를 떠납니다. 도망을 갑니다. 나라가 온통 난리입니다.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심각하게까지는 아닐지라도 나도 한 번 떠날까 라는 생각을 해보신 분들이 제법 계실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먼저 우리가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전쟁 그리고 싸움을 좋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길 힘이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이길 능력도 힘도 없는 사람들도 싸움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남자들은 무슨 이유든 이유를 만들어서 어떻게 하든 간에 싸움을 만들려고 하는 존재인 것 같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전쟁을, 싸움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도 전도서 3장에서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전3:1-3) 라고 이런 저런 때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때에 대해서 또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3:4-7)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잠깐 멈추고 잘 알고 있어야할 것이 있습니다. 혹자들은 성경 한 부분만 알고 ‘성경에도 전쟁할 때가 있고 싸울 때가 있고 찢을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고 말씀하지 않느냐?’ 라고 말하지만 성경에는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전쟁할 때 싸울 때가 있을지라도 전쟁할 때 싸울 때는 인간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다, 하나님만이 결정하신다고 하신 이 말씀을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님은 평화이십니다. 하나님은 평화를 사랑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쟁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싸움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허락 없이 전쟁을 하고 싸움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나는 하나님을 거역하겠다, 나는 하나님과 대적하겠다고 스스로 선언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백성이 먼저 전쟁을 싸움을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백성임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이것은 결국 악마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쟁이나 싸움과 분쟁, 다툼, 분열은 마귀가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가장 악한 것이 있습니다. 소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 자기 목적을 위해서, 예를 들어서 통치권을 강화하고 내부의 문제를 덮기 위해 또는 정권을 연장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키고 싸움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꼭 아십시오. 이런 사람들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믿지 않는 세상을 통치하는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싸움 자주 하는 사람, 자주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그냥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 더 길게 보면 그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자기 목적이 있었습니다. 밖으로 드러내는 것으로는 당시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늘 억눌려서 지냈기 때문에 자주독립이 국민의 여망이고 국민의 꿈이라는 것을 알고 이것을 이루어야 한다는 명분을 걸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울이 전쟁을 일으킨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불구하고 다음 몇 가지에 있어서 하나님께 큰 범죄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나라의 최고 지도자로서 판단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입니다.
먼저 전력입니다.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드러난 양국의 군사력 차이는 도무지 말할 거리도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총 병력은 3천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하면 블레셋은 어마어마합니다. 블레셋은 전차만 3만입니다. 기마병이 6천, 이 정도라면 보병은 수도 셀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 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
그 정도 차이라면 아무리 정보력이 없는 지도자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전쟁은 해서는 안 될 전쟁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전쟁, 저런 전쟁 싸움질 벌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4장에서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 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눅14:28-32) 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이 말씀을 보면서 옛날 일이 하나 생각했습니다. 대학 2학년 말쯤 되었을 때 같은 법학과 친구와의 일이었습니다. 그 해의 총학생 회장 선거가 있었습니다. 제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어느 정도 그릇인가 해서 살펴보고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한 후보자를 지적했는데, 제 친구가 벌떡 일어서서 나하고 결투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 한 마디 했다고 싸우자고 하는 것입니다. 일어서기는 했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싸우면 제가 많이 맞을 것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런 것으로 싸울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싸우지 말자고 말했습니다. 만약 싸웠다면 아마 제가 많이 얻어맞았을 것입니다.
사울이 이것을 몰랐습니다. 어쩌면 알았는데도 그냥 전쟁을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뿐 아니라 이스라엘은 아예 무기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무기를 만들면 일일이 블레셋의 허락을 받아야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 않습니까? 미국의 어떤 사람들이 한국과 일본에 핵무기를 만들라고 할 수도 있다고 말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핵무기 만드는 것을 허락할 것 같지 않습니다. 블레셋이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에 아예 무기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온 땅에 철공이 없었으니 이는 블레셋 사람들이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이 칼이나 창을 만들까 두렵다 하였음이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각각 보습이나 삽이나 도끼나 괭이를 벼리려면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내려갔었는데 곧 그들이 괭이나 삽이나 쇠스랑이나 도끼나 쇠채찍이 무딜 때에 그리하였으므로 싸우는 날에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백성의 손에는 칼이나 창이 없고 오직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만 있었더라’(19-22절)
이스라엘에 무기 만드는 기술자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 까닭을 생각해봅니다. 무언가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 해서 왕권, 통치권을 굳게 해야 되겠다, 내가 왕일 때 무언가 했다는 역사 기록을 좀 남기고 싶다는 자기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왕권을 더 강화하고 왕권을 더 오래 쥐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사울이 사실 전쟁으로 재미 본 적이 있었습니다. 왕이 되고 얼마 있지 않아서 암몬과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깔보고 침공한 암몬을 이스라엘은 박살을 냈습니다. 그때 승리의 전적인 공로자는 사울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사울의 위상은 한껏 높아졌습니다. 이를 겪은 사울이 한 번만 더 전쟁을 일으키면, 한 번만 더 무슨 짓을 하면 자기 왕권이 더 굳건해질 것이라는 계산을 안 했을 리가 없습니다. 구실이 좋습니다. 우리가 블레셋의 통치를 받고 눌려있는데 외세를 몰아내고 자주독립을 쟁취하자고 하면 국민들이 안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일이라면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왕권이 굳건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기발한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러나 아시시오. 여러분은 보실 줄 알아야합니다 그것은 나라를 망하게 하고 국민을 파멸로 밀어 넣는 지도자의 ‘기망’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국민들이 대체로 넘어갑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도 보십시오. 그리고 세상 나라뿐만 하나님 나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아닌 일을 하는데도, 일반 교인들은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 저 사람이 무슨 목적으로 무슨 욕심을 가지고 하는지 잘 알지 못하고 ‘아멘’ 하고 따라갑니다.
어느 곳에서나 항상 그것이 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든 간에 내 욕심 채우려고 하는 것, 그 욕심 때문에 뻔히 보이는 국가의 멸망, 국민의 파멸도 보지도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최고의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어쩌면 저도 그런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기도 많이 해주셔야합니다.
무엇보다도 사울의 가장 큰 잘못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묻지 않은 것입니다.
오래전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그런 실패를 했습니다. 그 실패로 나라를 블레셋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민족 공동체가 아니라 신앙공동체 즉 하나의 교회입니다. 교회인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전쟁이라는 큰일을 두고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는 항상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웁니다. ‘하나님의 종에게 묻기는 물어야하겠는데 대제사장 엘리는 너무 늙어서 못 묻겠다, 대제사장의 아들 두 제사장은 제사장 같지도 않은 사람이라서 묻고 싶지 않다, 사무엘이라는 진짜 하나님의 종이 있기는 한데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등 온갖 핑계를 댑니다. 이것은 묻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교만입니다. 나보다 더 어른을 두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나 위에 어른을 두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 교만이 왕 된지 2년 만에 사울에게 가득하게 됩니다. 누구에게도 묻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도 묻고 싶지 않고 자기에게 왕의 기름을 부은 사무엘에게도 묻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내가 왕이라는 마음입니다. 말은 맞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대수입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서 생깁니다. 그 다음 가는 것이 ‘하나님도 아무것도 아니다’ 입니다. 내가 왕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자기가 제일 높은 사람입니다. 파멸, 멸망이 여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오늘 본문 중에 마음에 많이 걸리는 말이 있습니다. ‘사울이 왕이 될 때에 사십 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 년에’(1절) 라는 말입니다. 최고 지도자들, 세상의 지도자이든지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이든지 간에 많이 걸리는 병이 이 병입니다. ‘다스린 지 2년에’ 라는 말은 어떤 병일까요? 누구에게도 묻고 싶지 않은 병입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병입니다. 안 듣는 병, 못 듣는 병, 내가 왕이요 최고라는 병입니다. 지도자가 된 후 2~3년쯤 되면 이 병에 걸립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 몰골을 한 번 보겠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 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 몰골은 지난번과 너무 대조됩니다. 암몬과의 전쟁 때는 사기충천했습니다. 모인 군사도 대단했습니다.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 한 겨리의 소르 ㄹ잡아 각을 뜨고 전령들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역에 두루 보내어 이르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하였더니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 라는 사무엘상 11장 6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를 세어보니 이스라엘 자손이 삼십만 유다가 삼만 명 합해서 삼십삼만 명의 군인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야베스 사람들이 이에 이르되 우리가 내일 너희에게 나아가리니 너희 생각에 좋을 대로 우리에게 다 행하라 하니라’ 라는 10절 말씀을 보면, 침공을 받은 국경에 있는 사람들이 다 나가면서 우리가 내일 나갈 것이다, 내일 한 판 하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당당합니다. 자신만만합니다. 이러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번의 모습 형편 몰골은 딱하고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똑 같은 이스라엘 한 나라이고 똑 같은 왕인데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그 차이는 당시 그들에게 하나님이 있었고 이번에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나님 없는 나라, 하나님 없는 사람은 일이 되지 않습니다. 이상하게 일이 안 됩니다. 풀리지 않습니다. 일도 겁나고 사람도 겁납니다. 사람이 비굴해집니다. 힘 있는 사람, 돈 있는 사람을 보면 누추한 몰골이 되고 맙니다. 초라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있는’ 나라, ‘하나님이 있는’ 사람은 당당합니다. 상황은 똑같은데, 여건은 똑같은데 자신 있습니다. 무언지 몰라도 자신 있습니다. 그리고 일이 실제로 풀려나갑니다.
여러분, 이것을 한 번 경험해보십시오.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힘든 여건 어려운 일이 있어도 이상하게 당당해집니다. 무엇이 꼭 ‘있는’ 사람 같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당당해지고 자신만만해집니다.
희한하게도 이런 사람에게 또 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약하고 상대방 나라가 힘이 없으면 이런 사람은 그런 나라 그런 사람에게는 더 약해집니다. 더 낮아지고 더 힘이 없습니다. 못난 사람에게 더 못나집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참 바보 같습니다. 한참 모자라는 사람 같습니다. 정말 바보 같습니다.
그러나 아십시오. 세상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을 멋있게 만드는 것, 사람을 힘 있게 만들고 승리하게 하는 분은 세상이 아니라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 나라를 부쩍 들어서 괜찮은 나라가 되게 하고, 사람을 붙들어서 아주 멋진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고린도 후서 6장에서 바울이 멋진 고백을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있고 징계를 받은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은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8-10)
여러분, 한 번 이렇게 살아보십시오.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대단한 믿음 가져야만 이런 수준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만 ‘계신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가십니다. 여러분에게 그렇게 많은 고생을 안 시킵니다. 여러분에게 대단한 능력이 있어야지 죽을 고생을 해야지 죽으라고 애써야지 그렇게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계시기만 하면’ 이런 일은 일상처럼 이어집니다.
부디 하나님과 함께 하십시오. 하나님을 꼭 모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과 함께 하면 하나님은 더 기뻐하시면서 여러분들과 함께 하십니다. 거기에 승리가 있습니다. 거기에 기쁨이 있고 거기에 의미가 있고 힘이 있고 권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모든 것이 어우러집니다. 이상합니다.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게 이루어집니다. 나에게 어떻게 그런 지혜가 있었는지 내가 어떻게 그렇게 당당해졌는지 자기도 알지 못합니다. 당당해질 수 있는 사람은 그냥 당당해집니다. 자신만만하고 싶다고 됩니까? 자동적으로 자신만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그리고 이 나라가 그런 나라가 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눈을 크게 되고 혹시라도 그런 나라가 될 수 있겠나 그런 가정이 될 수 있겠나 쳐다보고 계십니다. 학수고대하시고 계십니다. 어느 순간 되었다 싶으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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