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일하시는..
사도행전 3:1~10 ═══════════════════
「어머니가 우리 집에서 가족 모임을 열기로 했을 때,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그러다보니 열 두 살이었던 형과 아홉 살인 여동생 그리고 열한 살인 나는 집안일을 거들어야만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막바지 장을 보러 시내로 나갈 차비를 하면서 이렇게 신신당부를 하셨다. “오븐에 빵 반죽 네 덩이 넣어두었다. 빵 잘 지켜보아야한다. 노릇노릇하게 황금빛을 띄면 바로 꺼내야 된다. 방 태워먹었다간 너희들 모두 혼날 줄 알아라.” 그러겠노라고 우리 삼남매는 철석같이 약속했다. 형 리처드와 여동생 루시아 그리고 나는 소파에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다 지루해진 우리는 밖에서 조금만 놀기로 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조금 노는 것이 큰일 날 일일 것 같지는 않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던 우리는 빵이 타는 냄새를 맡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빵!’ 우리 셋은 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후다닥 부엌으로 달려갔다. 형이 오븐 문을 여는 모습을 우리 둘은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빵 덩어리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 형은 오븐 문을 쾅 닫아버렸다. ‘우리 이제 어떻게 하지?’ 우리는 모두 두 손을 움켜잡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러자 여동생 루시아가 말했다. “엄마가 하나님은 어떤 것이든 가능하다고 하셨어. 우리 같이 기도하자.” 우리는 따뜻한 오븐 문 위에 한 손씩 얹고 고개를 숙였다. 내가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 엄마가 우리에게 일러준 대로 저 빵이 노릇노릇한 황금색을 띄도록 고쳐주세요.’ 형이 덧붙였다. ‘그렇게 해주시지 않으면 우리 엄청 혼날 거예요.’ 여동생이 기도를 마무리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머뭇머뭇 망설이다가 리처드 형이 오븐 문을 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븐 안에는 노릇노릇한 황금빛으로 구워진 빵이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이튿날 가족들이 모였을 때, 빵 맛을 본 이모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쭉 사용해오던 레시피 그대로 한 거네.” 그러자 삼촌이 말했다 “아니야. 이 빵은 전혀 맛이 다른데, 내가 이제껏 먹어본 빵 중에 단연 최고야.” 가족들 모두 삼촌 말에 동의했다.
결국 우리 삼남매는 엄마를 부엌에 모시고 가서 사실 그대로를 말씀드렸다.」
열한 살 아이가 커서 나중에 한 말입니다,
“빵에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삼남매의 기도 응답이었습니다.”
기적 중에는 열한 살 아이에게 일어났던 그런 기적도 있고, 여러분들 나름대로 보시는 기적도 있고, 오늘 본문과 같은 기적도 있습니다.
초대 교회 시절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성전 문 앞에서 날 때부터 일어서지 못한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을 합니다. 그 순간 베드로가 무슨 생각이었든지 평소에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합니다. 그 환자를 향하여 “우리를 보시라” 그리고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그 환자의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 순간 40년간 한 번도 일어서보지 못했던 사람이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습니다. 믿기 어려운 기적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 기적 스토리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기적 그 자체보다 기독교 신자들은 이 기적을 어떻게 보아야하는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기적을 가지고 오늘 우리 기독교 신자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나름대로 이 말씀을 여러 차례 보고 들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기적을 어떻게 보시는지 생각하시면서 오늘 말씀을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이 기적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었는데, 오늘 그 대표적인 것 둘을 살펴봅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잘 믿기만 하면 이런 기적이 일어난다는 말에 관한 것입니다. 그럴 듯 하고 좋게 들리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세히 보아도 그 앉은뱅이가 예수님을 잘 믿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구걸 장소가 성전 문 앞이라는 말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의 신앙이 돈독해서가 아니라 그 곳에 사람들이 제일 많이 지나다니는 소위 ‘물 좋은 곳’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거기 앉아서 구걸한 것입니다.
또 하나 성경을 보시면서 의문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라는 16절의 베드로의 말씀입니다. 마치 이 말씀은 그 환자가 몸에 병도 있고 구걸했지만 그러나 믿음만은 있었다는 말씀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말씀의 정확한 번역은 ‘그 사람을 낫게 한 그것은 그 이름을 믿는 즉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우리의 믿음으로 된 것이다.’ 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믿음 때문에 그 사람이 병이 나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면 이런 기적이 생긴다는 해석은 신자들로 하여금 더 열심히 신앙하게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나도 열심히 신앙해서 이런 기적을 만나야 되겠다는 생각은 누구든지 속으로든 겉으로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런 말씀이 아닌 본문을 두고 그러한 해석을 하는 것은 사람들의 신앙을 좀 북돋워 줄지는 모르지만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을, 하나님 이름을 이용하는 것이 되고, 신자들은 스스로 자기를 속이는 것이 됩니다. 잘못 된 것을 가지고 결과만 좋게 만드는 것은 겉으로 보면 결과가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썩은 결과가 되고 썩은 열매가 되어서 오히려 사람들을 상하게 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또, 만약 예수님 믿는 사람이 큰 병에 걸렸다면 그 사람이 상당히 문제가 있다는 해석이 됩니다. 또한, 예수님 믿는 사람이 병이 낫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다는 해석이 됩니다. 믿는 사람에게 문제가 생기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신앙문제라는 해석이 가능할 수 있는데, 이것은 상당히 문제가 됩니다. 실은 그 사람이 잘못 믿었기 때문에 또 열심히 신앙생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해석이 되는데 그것은 전혀 아닙니다. 여러분 주변에 혹은 여러분들 가운데 그런 일들이 있다면 잘못 믿었기 때문인가? 혹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런가? 생각할 수 있는데, 분명하게 아십시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런 것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해서 어려운 문제가 생깁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렇습니다. 한평생 눈물로 살았습니다. 고통만 당했습니다. 고난만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위대한 하나님의 종 예레미야가 겉으로는 대단한 모습을 보이지만 속으로는 무언가 잘못된 신앙을 한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세상 부귀영화 모두 버렸습니다. 오로지 예수님만 전한 사도바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병을 낫게 하면서도 자기 병은 낫지 않았습니다. 대단한 학력, 대단한 재산 다 버리고 하나님만 위해서 평생 생명을 바쳤던 바울 왜 병이 낫지 않은가? 겉으로는 그렇지만 속에 무슨 문제가 있었단 말인가요? 이런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또,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 3년 동안 예수님 가까이서 배우고도 일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순교한 사도가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입니다. 그렇다면 야고보 사도는 무엇이 잘못되었나요? 신앙이 잘못 되었나요? 여러분이 너무 잘 아시는 하나님의 충성된 종 스데반, 그렇게 비참하게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은 잘못된 믿음, 잘못된 신앙생활을 했을까요? 결단코 그것이 아닙니다.
특히 욥기는 고난에 대해서 가장 말씀을 잘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욥기 그 긴 말씀 중에 전혀 그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해석을 전혀 허락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욥기는 아주 잘 믿는 사람도 얼마든지 고난을 당할 수 있고 어려운 일을 당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욥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잘 믿기만 하면 이런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은 완전히 틀린 해석은 아니지만, 적어도 오늘 본문을 두고 그런 해석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런 일에 있어서도 혹 그것 때문에 좋은 결과가 생길 수도 있지만 끝까지 그런 일에 있어서도 정직해야합니다.
두 번째 해석입니다. ‘누구든지 성령 충만하면 이런 능력을 받는다. 베드로를 보아라. 요한을 보아라.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가, 그러나 그 두 어른도 과거에는 문제가 많던 사람이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체포되었을 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까지 했고, 요한은 자기네들을 환영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에게 저주의 말을 할 뻔했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달라고 해서 저 사람들을 태워버릴까요?‘ 그런 말을 했던 사람이다. 과거에 이러했던 사람들이, 그러나 성령충만하면 얼마든지 이런 능력을 받는다.’ 라는 해석입니다.
이 해석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바른 해석인 것은 아닙니다. 성령 충만하면 이런 능력을 받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정확한 해석이 됩니다. ‘가능성’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 하다고 모두 다 그런 능력을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도 성령 충만하신 분이라고 할지라도 다 이런 능력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이런 능력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내가 저 사람보다 더 성령충만한 것은 아닙니다. 그 능력은 자격이 된다고 누구든지 당연히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특별한 필요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주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다고 판단되실 때 그리고 그 사람이 그런 능력을 받을 만한 사람으로 있는 동안만 하나님께서 잠시 허락하실 수가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베드로와 요한의 그 놀라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시는가?’입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하고 명확합니다. ‘갈릴리 나사렛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나 다시 살아나셨다, 다시 살아나서 하늘에 올라가신 예수는 하늘에서도 여전히 같은 일을 하고 계신다. 40년 환자를 치료한 일은 바로 그 예수가 한 일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한 것처럼 보일 뿐이지만 실제로 그 일을 하신 분은 예수 즉 예수께서 보내신 성령이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이것을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구약성경의 예를 봅니다. 나아만 나병치료의 일입니다. 나아만이 나병 치료를 받으려고 엘리사에게 왔습니다. 엘리사가 나아만에게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 씻으라고 했고, 나아만은 우여곡절 끝에 그대로 해서 나병이 완쾌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 드립니다. 이스라엘의 요단강 물에 나병 치료하는 효험이 있어서일까요? 다른 나병환자들도 요단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다 치료가 되었을까요? 아니면 엘리사에게 나병 치료하는 능력이 있어서 나병 환자 누구든지 엘리사에게 가면 다 치료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나병 치료를 받아 완쾌된 나아만 장군의 입을 통해서 들을 수 있습니다. 나아만이 나병 다 낫고 난 뒤에 엘리사를 찾아와서 감사의 인사와 함께 이러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로 압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한 분만이 신 인줄 압니다. 이제부터 저는 이스라엘의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제사를 드리지 않겠습니다.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에게만 제사를 드리겠습니다.’
이방인인 나아만도 자기의 나병을 엘리사가 치료했거나 요단강 때문에 나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치료하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에 한 때 구리뱀 부적이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구리뱀 형상을 가지기만 하면 병이 낫고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미신이었습니다. 그 미신의 발단은 이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불뱀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물었습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죽고 중상당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때 백성들이 모세에게 찾아와서 “모세님, 제발 하나님께 기도 좀 드려주십시오.” 라고 부탁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배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민21:8) 라고 응답하셨습니다. 모세가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달아놓고 뱀에 물린 사람들에게 그것을 쳐다보게 했고 쳐다본 사람들은 다 나았습니다. 그러나 병을 낫게 한 것은 구리 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때만 잠시 구리뱀을 사용하신 것뿐입니다.
이런 사실을 극히 분명하게 보여주신 일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의 일입니다. 왕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암몬 나라가 이스라엘을 침공합니다. 조롱을 합니다. 이스라엘이 치욕에 빠집니다. 이 소식이 왕 사울에게 전해집니다. 왕이 되었지만 아직 왕 다운 일을 하지 못하였고, 농사나 짓고 있던 사울이 믿기 어려운 용맹을 발합니다. 그리고 기가 막힌 지략을 발휘합니다.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 한 겨리의 소를 잡아 각을 뜨고 전령들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역에 두루 보내어 이르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하였더니’(삼상116:6-7)
그러자 믿을 수 없는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겁에 질려서 아무도 나서지 않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도 나도 군인이 되겠다고 나섰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군인으로 나선 사람들의 숫자가 33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전쟁 결과는 이스라엘의 완승이었습니다. 암몬 군사는 둘도 함께 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놀라운 결과가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암몬의 침공과 조롱의 소식을 들은 사울이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었다, 사울이 이스라엘 전 지역에 모두들 나서라고 경고를 보냈을 때 하나님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일, 사울이 놀라운 용맹을 발한 것, 뛰어난 지략을 보인 것 그 모두가 하나님의 영, 성령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너무 하고 싶으십니다. 이미 믿은 여러분에게도 아직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도 너무나도 이 말씀을 하고 싶으십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하신다, 예수님이 하신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영, 성령님이 이 일을 하신다 이 말씀을 하시고 싶으십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그 놀라운 능력을 주시고 환자를 치료하게 해주시고 놀라서 모든 사람들에게 그 말을 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백성들에게 소리쳤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3:12-16)
성령님이 하셨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그대로 베드로가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설교한 것입니다.
성령님은 아주 옛날 그리고 2000년 전 이때만 역사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만 역사하신 것이 아니라 오늘도 지금도 여러분 가정에서 이 나라 이사회에서 이 교회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삶의 모든 곳에서 모든 일을 하십니다. 모든 병든 것들을 고치십니다. 병든 몸을 고치시고 병든 마음을 고치십니다. 병든 가정을 고치시고 병든 자녀를 고치십니다. 사업이 병들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을 보내셔서 사업을 고칠 수가 있고, 경제가 병들었을 때 경제 병을 고치 수 있습니다. 나라가 병들었다고 많은 분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나서면 한 순간에 이 나라의 깊은 병도 얼마든지 고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하시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여러분이 ‘성령님께서 이렇게 하셨다!’고 담대하게 말할 준비가 되어있으면 여러분들에게 그런 능력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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