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 충만하시면..
사도행전 4:8~21
기억력 연구의 대가인 신경생물학자 제임스 맥고에게 질프라이스라는 여성이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메일에서 서른다섯 살인 맥고는 열한 살 이후부터 과거의 일 전부를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그것 때문에 미칠 것 같다는 하소연이었습니다. 너무 생생하게 모든 일들이 다 기억나니 도무지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나이가 듦에 따라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의 큰 선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은 확실하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기억력이 떨어진다고 너무 속상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학자는 그 여성의 말이 사실일까? 그 여성이 허풍이 심하거나 거짓말쟁이가 아닐까 고민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학자로서의 호기심이 그 학자의 마음을 돌렸습니다. 그 여성을 만났습니다. 테스트를 했습니다. 테스트 방법은 그 여성이 25년간 써 온 일기장을 가지고 이 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여인이 한 말은 모두가 사실이었습니다. 과거 어느 날을 무작위로 지목해서 그 날이 무슨 요일이며 어떻게 보냈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어 보면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 기억했습니다.
최근 장로님 한 분이 저에게 책 한권을 보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미국의 한 목회자가 아내의 극심한 우울증 때문에 큰 고통을 앓게 됩니다. 부부가 함께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아내의 우울증 치료를 위해서 해보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심리상담, 비타민 요법, 무기질 요법, 허브 요법 등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다 해보았습니다. 우울증에 관한 책도 심리학, 자기 계발, 영성 서적 등 다수 읽었고, 물론 기도도 계속 했습니다. 그러나 12년 동안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저자가 비행기 안에서 아내를 위해서 기도를 하던 중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단 몇 분간의 몇 가지 손동작으로 심각한 질환을 치유하는 방법을 계시로 받습니다.
그 방법에 의한 치유결과입니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저자의 아내는 그 방법대로 치료한 후 45분 만에 우울증이 사라졌습니다. 우울증이 다시 재발되었지만 계속 3주의 치유 결과 우울증이 완전히 사라졌고, 그 후에 그 책을 쓰기까지 8년 동안 아내의 우울중은 전혀 재발되지 않았습니다. 아내 외에도 그 치유방법에 의해서 치유된 불치병 환자의 수가 수천 명이 넘는다고 밝힙니다.
과연 사실이겠습니까? 믿어지십니까? 혹세무민은 아닐까도 생각되실 것입니다.
치유효과에 대해서 저자는 심박변이도 검사 등 정통 의학적 검증을 거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효험을 사실 그냥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조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주 하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치유 행위를 성령님께 집중하는 시간으로 가진다면 성령님께서 권능으로 충분히 역사하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 제자들이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님이 강림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오신 성령님은 제자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었습니다, 외국어라고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제자들에게 외국말을 하는 신기한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한 나라 말이 아니라 이 사람에게는 이런 외국어를, 저 사람에게는 저런 외국어를 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 소문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 기회를 이용해서 베드로가 설교를 합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왔습니다. 그날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된 사람 숫자만 삼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후에 성령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아주 특별한 능력을 주십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일어서보지 못한 환자를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게 한 능력을 베드로와 요한이 받습니다. 나면서부터 사십년간 한 번도 일어서보지 못한 그 사람이 일어섰고 걷기도 했고 뛰기도 했습니다. 그 소문을 듣고 또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베드로는 또 그 기회를 이용하여 설교를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 중에 믿고 기독교 신자가 된 사람이 남자의 수만 오천 명이나 됩니다.
베드로 요한이 한 그 일을 전해들은 유대의 종교 권력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당시는 종교 지도자들이 사회 권력까지 같이 쥐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베드로의 설교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낫게 했다’는 말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사람을 낫게 해도 자기들의 허가를 받아야하는데, 허락을 받지 않고 사람을 낫게 했다는 죄입니다.
이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권력을 가지고 온갖 못된 짓을 다 하면서도 자기네들이 잘못하고 있는지 잘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자기들이 하는 일은 그냥 다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자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5-7절)
이 말씀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사람을 낫게 했으면 그 자체로만 한없이 좋은데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는지 시비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산헤드린 법정에서 재판이 시작됩니다. 산헤드린은 이스라엘 최고 법정입니다. 재판관은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때의 종교권력자들은 모든 것을 다 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사형판결을 내린 법정도 이 법정입니다. 이 무시무시한 법정에서 두 사도가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신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병자를 낫게 한 것에 대해서 백성들의 어른이요 대표로서 고맙다는 말은 한 마디도 없고 누구 이름으로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을 했는지 심문을 합니다.
베드로가 맨 처음 그 사람을 낫게 하고 사람들이 모였을 때 했던 내용으로 변론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그 분이 이 사람을 낫게 했다!”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8-10절)
그때 베드로가 한 변론 중에 기독교의 아주 유명한 진리가 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12) 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진리 때문에 기독교가 많은 비난과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다른 종교에서 더 비판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간에 여러분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이것만큼은 기독교가 양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베드로의 그 말에 종교 권력자들이 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종교권력자들은 자기네들 스스로 아주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데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법정에서만큼은 그 누구도 기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러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 권력까지 가지고 있는 종교 권력자들의 말에 지금까지 그 누구도 감히 대꾸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저 사람들이 서슬 시퍼런 자기네들에게 한 마디도지지 않고 또박또박 대꾸를 하는 것입니다. 말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할 것 같은 어부 출신 두 사람은 너무 당당합니다. 자기네들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유창하게 변론합니다. 변호사야 유창하게 변론할 수 있겠지만 일반 시민이 그것도 특별한 훈련을 받지 않은 어부 출신이 그렇게 유창하게 변론한 것입니다. 말을 얼마나 잘했던지 그 잘난 척하던 사람들이 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거기다가 두 사람이 치료하여 일으킨 당사자가 지금 눈앞에 있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13-14절)
또 지금 방청석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켰던 그 기적의 현장을 직접 보았던 사람들과 그 일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15-16절) 이들에게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무런 방법이 없었습니다.
또한, 이 종교권력자들, 종교지도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아픈 곳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네들은 그 아픈 환자를 고치지 못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저 사람들은 병자를 깨끗하게 낫게 했는데, 소위 잘났다고 하는 자기네들 그리고 시민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기네들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많이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는 말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대제사장님, 제사장님, 서기관님들은 그렇게 똑똑하고 잘났고 대단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왜 그 일을 못하시는가?’ ‘우습게 보이던 예수를 따라다니던 저 제자들은 기껏해야 어부출신인데 그들이 한 일을 왜 못하시는가?’ 이런 빈정대는 것 수군거리는 소리를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습니다.
이제 생각해봅니다. 왜 그 종교지도자들은 못했을까요?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모든 권력을 당연하게 가질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그런 종교지도자들은 왜 그 일을 못했을까요?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배우지 못했습니까? 경험이 없습니까? 말을 못했습니까? 그들에게는 다 있었습니다.
이유는 딱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보내신 예수님의 영, 성령님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일을 못한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와 요한도 자기들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베드로 요한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간혹 혹자가 나와서 자기가 이런 말 저런 일을 했다는 것은 다 헛소리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예수님,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이 보내신 영,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오신 성령님께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다만, 겉으로는 베드로와 요한이 그 일을 한 것처럼 보였을 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스스로 대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 잘난 사람들, 저 대단한 사람들도 못한 일을 우리가 했다고 충분히 스스로 자랑스러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이미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베드로는 너무도 분명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저 사람을 낫게 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셨고,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에 마치 우리가 그 일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 속에 오신 예수님, 예수님의 영 성령님께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자랑스러운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자랑스러웠던 것은 자기네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3년 동안 따라다녔고 자기네들이 지금 전도하고 있는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신 것이 너무도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또 자랑스러운 것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우리의 구주로 모시지 않지만 우리는, 나는 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셨다는 이것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여러분도 이것이 자랑스러울 수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 믿는다.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셨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는다, 그 예수님은 그냥 종교적인 예수님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필요하면 창조하실 수 있고, 이 세상의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는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이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십니까?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 따라서 여러분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사도들에게 자랑스러운 것이 늘 그것이었습니다. 늘 자랑스러웠습니다. 맨 처음 병자를 낫게 하여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도 그 일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3:11-12)
이 사람을 낫게 한 것은 십자가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베로드와 요한은 그것이 너무 자랑스러웠습니다. ‘이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니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여러분이 항상 기억하고, 틈이 날 때마다 증언할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한테 재산이 얼마 있든지, 내가 얼마나 배웠든지, 어떤 능력이 있든지 간에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계신다!’
이것을 기억하고 틈나는 대로 다른 사람들과 나누십시오. 나에게 예수님의 영, 성령님이 계시는 한 나는 어떤 일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이것을 정확하게 하신 말씀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는 빌립보서 4장 13절 말씀입니다. 나는 무능하고 가진 것 없고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예수님께서 성령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자기네들이 병자를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속상해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자기네들도 믿으면 됩니다. ‘아무 능력 없는 사람들’ 베드로와 요한이 단지 예수님 때문에, 성령님 때문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면, ‘더 잘난 사람, 더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성령님을 속에 모시게 되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되는데, 이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어떻게 하든 못된 짓만 하려고 했습니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재주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상관없습니다. 못 배웠다고 생각하십니까? 신앙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괜찮습니다.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서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처럼 여러분도 예수님을 믿고 성령 충만하면 이런 놀라운 일을 여러분도 하실 수 있다는 간증입니다.
베드로는 옛날에 큰소리만 칠 줄 알았습니다. 아무 곳에서 쓸모없을 것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어린 여자 종에게도 벌벌 떨면서 스승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그랬던 베드로가 40년 동안 한 번도 일어서지 못하던 사람을 단 한 마디로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게 했습니다. 자기 스승, 예수님을 재판하고 죽게 한 무시무시한 법정에서 서슬 시퍼런 사람들의 심문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할 말을 다 했습니다. 재판관들이 호통 치며 위협하는 말에 대해서도 도리어 어른이 아이를 꾸짖듯 했습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여러분도 이런 모습을 한 번 가져보십시오. 충분히 가질 수 있습니다. 왜 위축되어서 삽니까? 왜 힘들게 불안해하고 조급해하고 답답해하면서 조마조마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이런 멋진 모습을 여러분은 얼마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할 수 없어도 예수님은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내신 영, 성령님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실패자가 아닙니다. 이제는 승리자요 성공자입니다.
다시 확인해봅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해서 이런 사람이 되었고 이런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성경이 분명하게 확인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8절 맨 앞에서 ‘이에 베드로가 성령에 충만하여’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참에 여러분에게 꼭 짚어드리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이전에 성령 충만 하셨던 적이 있었던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성령 충만하니 계속해서 성령 충만 하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전에 여러분이 다른 분들을 위해서 기도했을 때, 여러분의 기도 때문에 다른 사람이 살아났고 일어섰던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이후에도 또 그렇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함은 계속해서 성령 충만할 수 있도록 스스로 유지하고 관리할 때 충만해집니다. 이것은 모래를 손으로 쥐고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모래를 손에 쥐고 있을 때 ‘아차’하면 모래가 다 새어나가 조금밖에 남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채우든지 그렇지 않으면 더 꽉 지고 있어야합니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성령 충만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소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오셔야합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오실만한 데만 오시고 오지 못할 데는 오시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으로 있는 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을 보내주십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계속해서 충만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뒤에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일, 놀라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성경은 꼭, 베드로가 성령 충만해서 그 일을 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계속해서 다시 짚어야합니다.
그 누구든지 어떤 사람이든 간에 베드로와 같은 승리자, 능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여러분들에게 성령님이 계속해서 충만하실 수 있도록 여러분이 그렇게 살 때 성령님이 충만하게, 계속 충만하게 임하십니다. 그러면 병자도 낫게 하고 가정의 문제,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을 얼마든지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미신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체험해보신 분들은 빙그레 웃습니다. 쓸데없는 소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체험해보신 분들은 쓸데없는 소리가 아니고 사실인 것을 압니다.
한 번 이것을 체험해보십시오. 인생이 달라집니다. 세상사는 것이 달라집니다. 세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이 나라도 얼마든지 고칠 수 있습니다. 병든 나라, 잘못된 나라, 병든 가정, 병든 인생 얼마든지 고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성령님이 충만하시면 ‘여러분이’ 그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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