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교회에 악재(惡材)? (사도행전 5:1-11)

분당소망교회 2020. 11. 5. 13:28

 

 

 

 

 

 

 

 

교회에 악재(惡材)?

 

 

사도행전 5:1~11

 

 

 

흐르는 시냇물에서 돌을 치우면 시냇물은 노래를 잃어버린다는 서양 속담이 있습니다. 흐르는 물을 가로막는 돌들이 있기 때문에 시냇물은 흘러가면서 노래를 만들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하나님께서는 종종 그리스도인들에게 또 교회에 환란의 풍파를 보내십니다. 여러분들이 노래를 만들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성령님이 오신 제자들은 놀라운 일들을 만들어냅니다.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외국어를 능통하게 말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일어서보지 못한 40년 환자를 그 자리에서 일어서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돌아온 것은 체포되는 것, 감옥에 갇히는 것, 재판에 회부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런 박해에도 불구하고 밖으로는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안으로는 교인들 간에 서로 도와주고 날마다 예배당에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나서서 전도 하지 않고 내 돈을 나누지 않으면 내 돈이 굳게 되고 재산이 늘어나고 힘도 덜 드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터지고 깨지고 잡혀가고 재판받으면서도 그런 일을 한 까닭은 거기에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고 삶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특히 잘 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헌금이었습니다. 교회에 가난한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즐비했습니다. 그러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넉넉하지는 않지만 먹을 것이 없어서 굶을까봐 걱정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교인들 가운데는 집과 땅을 팔아서 구제헌금을 하는 사람이 있기도 했습니다.

교인 중에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는 이것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재산을 그렇게 교회에 바치는 것도 부러웠고, 그런 사람들이 다른 교우들에게 존경받는 것도 부러웠습니다.

이 부부가 땅을 팔아 교회에 헌금을 했습니다.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큰돈이든 적은 돈이든 그런 일은 다 귀합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에게 문제는 땅 판 값 중에서 일부를 일부를 바치면서 땅 값 전부라고 거짓말을 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그 사실을 알고 남편 아나니아에게 책망했습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3-4)

베드로의 책망을 받은 남편 아나니아는 그 자리에 쓰러져서 죽고 맙니다. 그로부터 세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사실을 모르고 온 아내 삽비라에게도 베드로가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삽비라가 시치미를 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내 삽비라 역시 베드로의 책망을 받아서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죽고 맙니다.

 

이 일을 대할 때 퍼뜩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교회에 큰 악재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아나니아 삽비라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면 누가 교회에 오려고 하겠습니까? 교회에 오면 복 받는다고 해도 오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교회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악재 중의 악재입니다. 교회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꼭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악재라고 하는 것이 정말 악재인가?’ 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신자들은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과연 악재라고 생각하실지 생각해야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뭐든지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왜 예루살렘 교회에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 같은 무서운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셨겠습니까?

아십시오. 우리의 하나님은 절대 바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단호하게 악재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것 때문에 교회에 사람들이 오고 안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의 권위는 교회나 목사가 하는 달콤한 소리나 교회 겉모습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에 나오면 무조건 잘 되고 잘 풀리고 복을 받는다, 사업도 잘 된다, 예배당이 화려해서 저런 곳이라면 정말로 좋겠다, 교인들의 수가 많은 것이 진짜 교회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계역사에 있어서 기독교 황금기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박해라는 것은 물론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는 누구든지 기독교 신자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어떻게 하든 기독교 신자라는 이름이라도 가지고 싶어 했습니다. 그 당시 교회에서 직분을 받는 것은 그 어던 다른 명예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당시에 교회의 신자는 부유층들의 품위를 위한 필수 액세서리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그 황금기가 겉으로 보기와는 정반대로 기독교가 썩고 기독교가 망하는 기독교의 암흑기였습니다. 화려한 교회의 겉모습 속에서 기독교는 변했고 썩어갔고 망해갔습니다. 기독교의 황금기가 곧 기독교의 암흑기라는 사실은 한때의 아이러니가 아니라 언제나 진리입니다. 그때도 진리였고 지금도 진리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리인 이 말씀은 그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교회의 화려함은 곧 교회의 썩음이고 교회의 망함입니다.

 

이솝이 노예였던 시절에 이솝의 주인이 지시합니다. ‘목욕탕에 가서 목욕하는 사람이 얼마 있는지 보고 오라.’ 주인의 분부를 받은 이솝이 집을 나와서 목욕탕에 갔습니다. 공중목욕탕 앞에 돌이 위험하게 놓여있었습니다. 이솝의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누가 저 돌을 치우나 기다렸습니다. 목욕탕을 들어가고 나가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돌에 발이 부딪치거나 돌에 걸려 넘어질 뻔 하면서도 아무도 그 돌을 치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 참 있다가 목욕탕에 들어가는 한 사람이 그 돌을 보더니 치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솝은 목욕탕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지금 목욕하는 사람의 수가 얼마 되는지 알아보지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갑니다. 주인에게 보고합니다. ‘주인님, 지금 목욕탕에는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이솝에게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처럼 교회 같지 않은 교회는 하나님께 교회가 아닙니다. ‘신자 같지 않은 신자는 하나님께 신자가 아닙니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기독교 교회에서 멀쩡하게 잘 살던 부부 두 사람이 세 시간 간격으로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죽었다더라. 그것도 땅을 팔아서 교회에 바쳤다가 그런 일이 생겼다더라.’ 소문이 예루살렘 온 시내에 퍼졌습니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다 기독교가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 소문은 그 소문만 퍼진 것이 아니라 함께 따라붙은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 부부가 참변을 당한 것은 교회에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래.’ 라는 소문이었습니다. 그 일 때문에 교회 다니던 사람들도 세상 사람들도 알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교회에는 두려운 존재가 계신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무서운 분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말이 정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정말로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십니다. 알고 믿으십시오. 알고 사십시오. 아는 것만큼 여러분의 힘이 됩니다. 정말로 사랑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신자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다.’ 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당신의 몸인 교회가 더렵혀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제게 약간 결벽증 같은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손 씻는 것입니다. 밖에 나왔다가 들어오면 손을 씻는데 조금 있다 무엇을 하다보면 또 씻으러갑니다. 예수님께 교회 결벽증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더렵혀지는 것을 추호도 용납하려고 하시지 않습니다.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이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막 생긴 교회를 더럽히려고 하는 순간 지구상에 처음 생겨난 교회가 이들 부부 때문에 더렵혀지는 것을 예수님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이 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교회를 멀리하고 교회에 안 나오는 한이 있다고 할지라도 교회가 더렵혀지는 것, 교회의 거짓됨 이것은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무섭게 일어나셔서 가차 없이 치고 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관한 한 어떤 다른 것보다도 엄격하십니다.

예수님은 늘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라는 말씀과 똑같이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큰 마음먹고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라고 여쭙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무엇이냐? 일곱 번을 일흔 번이나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2장에서 의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욕하는 사람은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님을 모독하는 사람은 절대 용서받지 못한다.’

이 말씀의 제 1대상은 성령공동체인 교회입니다. 주님은 어떤 형태든지 교회가 모독당하는 것을 결단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제대로 하지는 못해도 교회를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그렇게 좋아하십니다.

 

사무엘의 시대에 엘리 대제사장에게 제사장 노릇을 하고 있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두 아들이 성전을 모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인 아버지에게 무섭게 경고하십니다. ‘너 그대로 가면 너의 집안은 비참하게 멸망당할 것이다.’ 여러 차례 경고했지만 엘리는 이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에 두 아들을 책망하기는 했지만 모양만 내고 말았습니다.

그대로 세월이 한참 흘렀습니다. 하나님의 그 경고는 겁만 주는 경고로 끝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십시오. 하나님은 지키지 않을 약속이나 경고를 하시지 않습니다. 사무엘상 15장은 하나님은 빈 말을 하시거나 변심하시거나 변덕을 부리시는 분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 뒤에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 전쟁에서 엘리 대 제사장의 두 아들이 한꺼번에 죽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아버지 엘리 대제사장이 뒤로 넘어져서 목이 부러져서 죽습니다. 그 소식을 또 출산 준비하고 있던 엘리의 며느리가 듣고 출산하다가 생명을 잃고 맙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저주를 받아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이 온 예루살렘에 퍼졌습니다. 이제 막 생긴 기독교는 절대 위기를 맞습니다.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 때문에 생긴 그 악재 때문에 기독교 교회는 생기자 마자 곧장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반대였습니다. 그 일로 교회는 더 권세가 커졌습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12),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14-16)

교회가 권세가 더 커졌습니다. 권위가 더 높아졌습니다.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이 번역은 약간 어렵습니다. 좀 쉽게 번역하면, ‘교회 안 나가는 어떤 사람들은 감히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에 끼어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교회를 칭찬했다.’는 말씀입니다.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로 망할 것 같았던 예루살렘 교회가 망하지 않고 도리어 더 든든하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단 하나, 예루살렘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애를 쓰십시오. 잘 살려고, 공부 잘 시키려고, 건강하려고 애를 쓰십시오. 그러나 꼭 아실 것이 있습니다. 그 어떤 애보다 어떤 노력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가정에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더 열심히 공부하라 더 건강하라 더 열심히 사업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자극을 주실 뿐만 아니라 도와주셔서 여러분이 그 일을 이루게 만드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