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어른이 있으면 (사도행전 6:5-15)

분당소망교회 2020. 11. 12. 09:36

어른이 있으면

 

 

사도행전 6:5~15

 

 

금년에 100세가 된 노교수 한 분이 며칠 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열일곱 살 때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마지막 설교를 눈앞에서 들었다. 목사님 설교보다 더 감동적이더라. 신앙에도 그릇의 크기가 있더라. 장로였던 고당 조만식 선생이나 도산 선생은 그릇이 컸다.’

신앙의 그릇이 큰 목회자가 없더라는 말입니다. 또 학생들의 질문을 빌어 이런 말도 했습니다. ‘스님이 쓴 책은 베스트셀러가 있는데 신부님이나 목사님이 쓴 책은 베스트셀러가 없더라.’ 목사로서 부끄럽기도 한 말이지만 그 모두에 틀린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못난 목사의 변명 아닌 해명, 해명도 희한한 해명을 하려고합니다. 그 노교수의 그 말이 사실이라면 고당이나 도산보다 그릇이 작았던 목사님들 또 스님은 내는 베스트셀러를 내지 못하는 목사들은 오히려 제대로 목사노 릇을 한 목사들입니다. 목사들이 큰 사람, 위대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큰 그릇이 되지 못하고 베스트셀러를 내지 못하는 것은 능력이 없어서도 그렇겠지만 목사들은 본래 그래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3장에서 특히 목회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23:8),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23:1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목사를 세우신 이유는 유명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위대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존경받는 사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목사는 주님께서 당신의 종으로 만들기 위해서, 종으로 쓰시기 위해서 세우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감옥에 갇혀서 곧 죽게 될 세례요한을 놓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11:7-9)

세례요한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세례요한은 오로지 예수님의 길만 준비하다가 다른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고 또 못 했습니다. 그러다 비참하게 죽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서 선지자 중의 최고의 선지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5:19) 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본래 유명한 사람, 위대한 사람, 베스트셀러가 안 나오고 못 나오는 그런 사람으로 세웠다는 말씀입니다.

 

목사는 주님의 종이기 때문에 자기를 말하고 자기를 보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말하고 예수님을 보여야하는 사람들이 바로 목사입니다. 또 말도 자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 또 지금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전해야하는 사람들이 바로 목사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당신조차 이 세상에 계실 때에 그런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12:49-50)

 

목사는 끝까지 종노릇만 하다가 작은 그릇, 못난 사람으로 끝내야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문제는 큰 그릇이 되지 못하는 목사, 존경받지 못하는 목사, 베스트셀러를 쓰지 못하는 목사가 아니라 오히려 큰 목사, 위대한 목사, 유명한 목사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 내가 존경받는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 목사들입니다.

잘 아십시오. 큰 그릇, 위대한 사람, 존경을 받는 사람들은 목사들이 아니라 여러분들이어야 합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것을 도와주어야합니다. ‘이렇게 하면 위대한 사람, 큰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가르치면 여러분들이 그 말씀을 받아 큰 사람, 위대한 사람, 존경받는 사람, 베스트셀러를 쓰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교회 안에서는 교인들 간에 서로 사랑하고 밖으로는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정말로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그 예루살렘 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인들 간에 분열이 일어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을 구제하는데 불공정하다는 원망이 나온 문제였습니다. 불만과 비판이 생겼습니다. ‘어른들이 계시면서 일을 어떻게 했기에....’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는 두 부류의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본토 토박이 교인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히브리파 유대인이라고 하고, 또 하나는 외국에 살다가 돌아온 교인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가리켜서 헬라파 유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교회 안에서 구제의 주 대상은 아무 의지할 데 없고 의지할 사람이 없는 홀로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분쟁은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네 파 과부들이 구제대상에서 빠지는 일이 많은 것에 대해 불평하고 원망하고 지도부를 향해서 비판을 가한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라는 1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 최고 어른인 사도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이어갔습니다.

이에 사도들이 교인들을 소집하여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등한히 하고 다른 일에 몰두한 것은 잘못 되었습니다. 여러분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가 원망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불만이 맞습니다. 우리 때문에 다 이런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라고 말한 후,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니라’(3)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노릇에만 전념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 가운데서 교인들, 교회 대표들을 뽑으라고 했고, 그 말대로 뽑았습니다.

이때 뽑힌 이들을 두고 집사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교인들의 대표였습니다. 사도들은 교인들의 대표를 뽑아서 그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종으로서 해야 할 일만 제외하고 다 담당하도록 하자고 했고, 그 말을 들은 교인들도 좋아했습니다. 교인들의 생각도 사도들이 모든 일을 다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교인들 가운데 일곱 명의 교인들 대표가 선출되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과 7장에 그 일곱 명의 예루살렘 교회 대표 가운데 스데반이 등장합니다. 스데반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하셨던 놀라운 기적들도 만들었다, 기독교를 박해하는 그 잘난 유대인들 그 누구도 스데반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8),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을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10)

그러자 유대인들은, 못된 인간들이 늘 하듯이 사람을 매수해서 거짓증언을 하게 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늘 이런 일이 생겨납니다. 거짓 증인들이 나와서 떠들어 나라를 뒤집어 놓고 나중에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면 잘못했다, 미안하다하고 끝내버립니다. 사법부, 재판관들도 문제입니다. 잘 감당하라고 그 누구보다도 많은 대접을 하면서 재판관으로 세웠는데 예나 지금이나 재판을 의도적으로 혹은 알지 못해서 제대로 하지 않은 재판관들이 많으니 큰 문제입니다. 이것이 특히 문제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은 잘못해도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지만 재판관이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실 특별한 하나님의 권세인데 이것을 하나님께서 재판관에게 위임한 것입니다. 이것을 잘못하면 하나님께서 잘못하셨다는 원성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재판관들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들을 합니다, ‘재판관들이 잘못하면 나라가 망한다.’

성경은 스데반은 체포되어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스데반의 모습입니다. 위대한 스승 예수님에게까지 사형선고한 공포의 법정에서 스데반은 그러나, 겁에 질려 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천사의 얼굴처럼 평화롭고 당당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라는 15절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스데반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는 주님께서 오고 오는 교회 그리고 기독교 신자들에게 꼭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마터면 큰 문제가 되고 큰일 날 뻔 했던 예루살렘 교회가 그 위기를 멋지게 극복하고 도리어 더 부흥하고 더 권위 있는 교회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라는 7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른 종교, 유대교 지도자들도 기독교에 복종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사도들의 어른다움이라고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라든지 가정이든지 교회든 어디든지 문제는 생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정하셔야합니다. 세상 사는 동안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문제가 생겼다거나 문제가 크다는 것 때문이 아닙니다.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그곳에 있는 어른들이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본문의 사도들은 정말 어른이었습니다. 헬라파 사람들이 과부 구제 문제로 원망하고 비판했을 때, 사도들은 어떤 사람들 누가일 잘 못한다고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또 불평하고 원망하고 말이 많고 어른들을 향해서 비판한다고 사람들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어른입니다 틈만 나면 약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원망하고 책망하는 것이 소위 잘난 사람들의 모습인데, 사도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책임을 다른 데 돌리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참 죄송합니다. 이 일은 다른 그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사도들이 잘못해서 생긴 문제입니다. 죄송합니다.’ 라고 자신들에게 그 책임을 돌렸습니다.

어디든 못난 사람들은 자기가 책임지려고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 자기는 책임이 없다고 말을 희한하게 돌려서 변명을 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희생양을 찾습니다. ‘못난 사람들은 그러면서도 어른 노릇을 계속 자기가 하려고 합니다. 인사 받고 대접받고 큰소리치는 것은 자기가 하려고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지도자들을 향해서 그들은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23:6-7) ‘그들은 말만 하고 해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23:3-4) 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는 일 하나도 안 하고 입만 살아있다고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반대였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또 말로만 반성하고 말로만 사과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꿰뚫어보았습니다. 지도자들은 이래야합니다. 어른들은 이래야합니다. 자꾸 변명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해서는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사도들은 문제를 꿰뚫었습니다.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고라는 2절 말씀에서 접대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재정을 비롯한 교회의 일반 모든 행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이런 일까지 다 붙들어 쥐고 하려고 하다 보니 이런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미안합니다. 우리가 못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잘못 했습니다. 우리 때문에 그렇게 됐습니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정말로 어른답습니다.

 

이 어른다움, 어른 노릇을 제대로 하려고 할 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마음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간에 가정에서도 나라에서도 교회에서도 일만 생기면 내가 책임지겠다는 어른이 나와야합니다. 이러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리고 나를 내려놓아야합니다. 내가 큰 사람이다, 어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내려놓고, 나는 못난 사람이다, 내가 잘못해서 생긴 일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행하던 권세가 있으면, 권리가 있으면, 권한이 있으면 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꼭 자기들이 해야 할 일만 빼놓고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4) 라고 말했습니다.

 

참 딱한 것, 그것은 책임은 지지 않고 계속 큰 소리만 치고 계속 누리려고만 하는 지도자들입니다. 이것이 망할 징조입니다. 나라에서도 지도자들, ‘어른들이 이러면 나라가 망하게 되고 교회도 그렇고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좀 문제가 있고 힘든 일, 어려운 일이 있고 여건과 상황이 안 좋을 때라도 제대로 된 어른만 있으면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른이 되십시오. 나이가 많든지 적든지 간에 또 남성이든 여성이든 간에 상관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른 되십시오. 제대로 된 사람들이 어른이 되면 나라가 괜찮습니다. 직접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사회의 지도자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집에 혹 남편이 가장으로 있다고 할지라도 누구이든지 그런 모습, 그런 역할을 하게 되면 절대로 잘못 될 수 없습니다. 자식들이 잘못 될 리가 없습니다.

스데반을 보겠습니다. 스데반은 기독교 신자로서 완벽에 가깝습니다. 은혜가 충만했고 권세가 가득했고 능력이 넘쳤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권능까지 스데반에게는 있었고 지혜와 성령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못되고 악한 사람들, 힘 있는 사람들의 시퍼런 서슬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담대한 사람이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스데반의 이 모습은 오고 오는 세대에 교회의 최고 어른인 사도들 그 누구보다 더 예수님에 가깝습니다. 정말로 예수님 가장 닮은 사람이 이 스데반입니다.

 

이제 마지막 결론입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나오는가?’ 입니다. 나라에 여러분의 가정에 교회에 어떻게 하면 이런 사람이 나오는가?

오늘 6장에서 말씀하시는 바는 최고 어른인 사도들이 모델이 되었기 때문에 스데반 같은 어른이 나왔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어른들인 사도들이 클 수 있는 기회를 사람들에게 제공했고 자기네들이 그 자리를 비켜주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젊은이들이 그 자리에서 귀한 어른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바로 사도들이 잘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 이 아이들이 잘 자라야지 큰 애가 나옵니다. 큰 애가 잘 자라야지 진짜 어른이 됩니다. 그러나 아이든 큰 아이든 간에 보고 배울 어른이 없으면 크지 못합니다. 보고 배울 어른이 있어야 큰 어른이 될 수 있습니다. 저 어린 아이들, 저 젊은이들이 큰 어른, 진짜 어른이 될 수 있는 것은 어른들이 키워주고 기회를 주고, 어른 자리에서 비켜나고 젊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른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밀어줄 때 가능하게 됩니다. 진짜 어른만 있으면 어떤 문제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가 이렇게 오래 시끄러운 것은, 이렇게 오래 국민들의 마음이 상하게 된 것은 진짜 어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스스로 어른만 있을 뿐 진짜 어른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진짜 어른만 있으면 문제가 생기면 생길수록, 위기가 생기면 생길수록 오히려 더 좋습니다. 그것을 기회로 더 발전할 수 있고 클 수 있고 좋은 것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진짜 어른만 있으면 그 어른보다 더 큰 다른 어른을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할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 그 누구에게도 미루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그 일을 하십시오. 여러분이 서신 그 자리에서 여러분들이 어른이 되어서 젊은이들에게 작은 모본을 많이 보여주고, 얼른 어른의 자리를 내어주고 젊은이들을 그 자리에 올려서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밀어주십시오. 그러면 이 나라에 이 사회에 여러분의 가정에 교회에 더 큰 어른들 또 더 큰 어른들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