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또 오라! 또 마셔라 (사도행전 7:51-60)

분당소망교회 2020. 11. 12. 09:38

또 오라! 또 마셔라!

 

 

 

사도행전 7:51~60

 

 

흙수저’, ‘금수저라는 말이 한참 떠돌았습니다. 태어날 때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 혹은 흙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 좋은 환경과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 그리고 부모의 능력이나 경제적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부모의 능력에 따라 인간 계급이 나뉜다는 자조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늘공’, ‘어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늘공은 늘 공무원이라는 말로 공무원 시험이나 일정 과정을 거친 직업 공무원을 말합니다. 나름대로 시스템 제도의 검정을 거친 공무원입니다. 어공은 어쩌다 공무원으로 시험을 거치지 않은 공무원들입니다. 시스템이나 제도의 검증이 아니라 주로 힘 있는 사람의 선택에 따라서 어쩌다 공무원이 된 사람을 말합니다. 어공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필요가 있기 때문에 어공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자기 능력과 관계없이 어공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어공이라는 이름을 붙이기가 미안할 정도로 자기 값을 제대로 감당해 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아무 자격도 없이 자리를 차지하고도 제 값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힘들여 쌓은 그나마 마저 흔들어대고 무너뜨리는 군상들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 이스라엘은 두 부류의 지도자에 의해서 영위되었습니다. 하나는 로마에서 파송한 총독을 비롯한 로마 관료들입니다. 또 하나는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입니다. 그 중에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유대인들의 종교지도자에 더해서 종교를 넘어선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역할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거의 모든 것을 지도하고 통치하는 지도자들이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런 지위를 가지고 누리게 된 것은 그들이 더 뛰어난 사람이라든지 그런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전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전문 종교인이라는 사실, 또 그들의 아버지가 전문 종교인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야말로 어마어마한 선물을 하나님으로부터 그저 받은 어쩌다 지도자들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도 어쩌다 지도자들이 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괜찮을 수 있습니다. 그 자리 노릇만 제대로 해주면 됩니다. 제대로 지도자 역할만 해주면 됩니다. 그러나 아닌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듯이 유대교 지도자들의 아닌 모습은 세월이 더해질수록 정말로 아니구나!’ 라는 것이 누구의 눈에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다 볼 수 있도록 되어 갔습니다. 이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다 자리 차지한 사람들도 처음에는 겸손한 마음으로 힘도 쓰고 애도 쓰지만 세월이 지나가면서 바뀝니다. ‘어쩌다 저 자리에 올라갔구나, 어쩌다 부자가 되었구나!’ 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을 때가 상당히 많습니다.

 

하나님은 사도행전 6장과 7장에서 어쩌다 지도자가 된 사람들의 전형적인 아닌 모습을 먼저 보여주십니다.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 새..어떤 자들이 일어나

이들은 여러 유대교 회당에서 내로라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때만 해도 이스라엘에는 여러 회당이 있었는데, 각 회당 즉 유대교 회당에는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유대교 회당의 유대교 지도자들 여러 명이 스데반 하나를 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라’(6:10)

이것도 그럴 수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은 여러 명이 아니라 수십 명이 되어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능력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실력도 모자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네들이 스스로 실력이 모자란다는 것을 인정하고 더 노력하고 더 힘써야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꼭 못된 짓을 합니다.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6:11) 라고 하면서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6:12) 스데반을 재판에 넘겨버렸습니다.

요즘도 이런 모습을 많이 봅니다. 거짓 증인들을 많이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들었다고 말하게 합니다.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기어이 스데반은 재판에서 선고받고 돌에 맞아 죽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똑같은 일이 옛날 이스라엘에서 있었습니다. 북 이스라엘 아합 왕 시대 때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아주 못된 짓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중 나봇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포도원을 왕이 가지고 싶어 했습니다. 나봇은 그 포도원은 하나님의 법 때문에 양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해서 이세벨이 아주 못된 짓을 했습니다. 나봇 동네의 장로와 귀족들에게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서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들 가운데 앉혀서 거짓 증인을 세웠습니다. 나봇이 죽을죄를 지었다고 말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으로 선량한 백성 나봇은 돌에 맞아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세벨의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이런 짓을 한 이세벨을 내가 그냥 두지 않겠다. 비참하게 죽게 만들겠다. 죽은 시체를 개가 먹도록 하겠다.’ 라고 불같이 화를 내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나중에 이세벨은 저 높은 곳에서 땅바닥에 떨어져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래도 장례라도 치러주려고 시체를 찾았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두개골과 손과 발만 남아있었습니다. 개들이 다 이세벨의 시체를 뜯어먹어버렸던 것입니다.

 

유대교 회당에서 일어난 유대교 지도자들의 모습 두 번째는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라고 사도행전 754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음이 찔리면 어떻게 됩니까? 앞으로는 찔릴 짓을 안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잘못 했고 몰라서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찔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7:54)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말에 뭐 한 놈이 성낸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못 해놓고 또 미안한 짓을 해놓고 성낸다는 말인데, 이것보다 더 적절한 말이 있습니다. ‘적반하장이라는 말로, 이 말을 그대로 해석하면 도둑질 한 사람이 도리어 도둑질 당한 사람에게 몽둥이를 든다는 말입니다. 딱 맞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7:54)라는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그런데 꼭 악하고 못된 사람만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당수 사람들이 이렇게 되기 쉽습니다. 반성 잘못하고 자기를 바꾸기 보다는 스스로를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해서 공격하는 현상이 생기는데 이런 쪽으로 나가지 말아야합니다. 그런데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힘 있는 사람들입니다. 권력이 있든지 돈이 있든지 어떤 자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7:54)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들이 누구입니까?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에서 최고 높은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세상 권력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관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재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도 지도하고 종교도 지도하는 그런 사람들로, 모든 면에서 최고의 지도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소위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외면하고 기어코 갈 때까지 가고 맙니다.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 새..’(7:57-58) 종교지도자들이 이런 짓을 했습니다.

 

여러분, 정치 지도자들은 어느 정도 잘못해도 괜찮습니다. 인간 역사에서 계속 그렇게 해왔습니다. 지금도 정치 지도자들은 좀 그렇게 해도 괜찮습니다. 본래 정치지도자들은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국민을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하고 젊은이, 후예들을 생각하는 것 보다는 당장 다음 선거에서 표 받는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정치지도자들은 그렇게 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이 이 지경이 되면 나라가 망합니다. 나라가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반드시 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꼭 기억할 것은 나라가 망하기 전에 이런 사람들이 먼저 망하는데, 이들이 망하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 때문입니다. 권력 때문에 돈 때문에 그런 지위 때문에 망합니다. 힘이 있을 때 조심해야합니다. 혹 돈이 있거나 높은 자리에 있을 때 또 다른 무언가 있을 때 조심해야합니다. 잘못하면 그것 때문에 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좋지 않은 모본을 한 사람 더 보여주십니다. 사도행전 71절에서부터 그 내용이 나옵니다. 대제사장이 이것이 사실이냐’(7:1) 라고 근엄하게 말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유대교 지도자들 중에서 최고의 지도자입니다. 회당의 지도자들을 대표하고 공회의 지도자들이 하는 모든 일의 최고 책임을 지는 자가 대제사장입니다. 최고 지도자는 항상 모든 일에 최종 책임을 져야합니다. 나라든 가정이든 교회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책임자는 자기가 관여했든 관여하지 않았든 자기가 알았든지 몰랐든지 간에 모든 책임을 져야합니다. 자주 내가 몰랐다는 말을 하는 책임자를 보는데, 책임자가 이렇게 말하면 그 사람은 책임자의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또 내가 못 들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 사람도 책임자의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관여하지 않았다고 책임이 없지 않습니다. 최고지도자는 모든 책임을 다 져야합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가 그러했습니다. 예수님 처형할 때 빌라도는 나름 예수님을 처형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자고 했을 때, 나는 저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 저 사람이 한 일로는 처형할 수 없느니 놓아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정히 여러분들이 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싶으면 여러분들이 데리고 가서 그렇게 하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내어주었습니다. 예수를 풀어주려고 빌라도가 상당히 힘을 쓴 것은 사실입니다. 심지어는 재판이 끝나고 난 뒤에 손을 물로 씻으면서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빌라도가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애를 썼다고, 판결한 손을 물로 씻었다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최고 책임자는 결과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지도록 되어있습니다. 빌라도라는 이름은 이미 수천 년, 또 앞으로 예수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어마어마한 사람들로부터 저주를 받은 이름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배워서는 안 될, 봐서는 안 될 유대교지도자들을 보여주시면서 또한 이 사람을 보고 배우라는 사람도 보여주십니다. 바로 스데반입니다.

먼저는 천사의 얼굴입니다. 사도행전 615장에서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스데반이 자기에게 돌을 던지면서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주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또 마지막으로 몸이 깨어져서 비참하게 죽으면서도 잠자는 듯한 평화로운 모습도 여러분에게 보여주십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자니라>’(7:60)

돌에 맞아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스데반의 모습은 천사의 얼굴 같았습니다. 돌에 맞아서 죽었는데, 얼마나 많이 돌에 맞았다면 죽겠습니까? 그렇게 죽으면서도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같이 편안한 얼굴, 평화의 얼굴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스데반의 그 모습, 그 얼굴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도를 닦는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힘쓰고 애써서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주먹을 불끈 쥔다고 되는 일도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절대 안 죽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실 것이라고 확신을 가져서 될 일도 아닙니다. 스데반이 그런 확신을 가졌을 리가 없었습니다. 자기 선생님 예수님은 죽으셨는데 나만 하나님께서 살려주실 것이라는 생각, 그런 확신을 가졌을 리가 없습니다.

스데반이 그런 평화로운 모습, 그런 아름다운 모습, 배워야할 모습을 가질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정확한 답이 사도행전 755절에 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으로, 하나님으로 가득한 성령 충만 이것 외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답이 없습니다. 스데반이 하나님으로 예수님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스데반에게 다른 것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습니다. 공간이 없었습니다. 스데반 눈에는 예수님으로 하나님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못된 사람들, 악한 일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습니다. 이것입니다. 방법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안 보려고 하면 더 보이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 더 생각납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눈에는 예수님과 하나님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악한 사람들이 스데반의 눈에는 없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7:56) 라고 말했습니다. 스데반에게 성령님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것이 비결입니다.

여러분, 아십시오. 온갖 사람들이 온갖 말을 해도 이것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저런 노력을 해보셨겠지만 이것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이제 모든 기독교 신자들이 계속해서 되풀이 되풀이하여 확인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스데반을 스데반 되게 했던 그 성령 충만이 스데반에게 어떻게 가능했던가?’ 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7:37) 라고 직접 답을 주셨습니다. 무엇에 목마르거든 이라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으로 성령님으로 예수님으로 목마르거든 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령님으로 하나님으로 충만하고 싶으면 내게로 와서 채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7:38)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생수의 강이란 정확하게 성령 충만입니다. 가득하게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사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성령 충만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가능합니다. 방언을 해야 하고 대단하게 무엇을 해야만 성령 충만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성령 충만할 수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와서 마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와서 마시라는 말을 정확하게 표현하면 계속해서 와서 계속해서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 가는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하면 마시는가? 이것은 여러분들이 고민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께 진정으로 가면 마신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도록 되어있습니다. 가지도 않고 멀리서 도대체 어떻게 마시는가?’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으로 하나님으로 성령님으로 충만하고 싶어서 예수님께 가면 알게 해주십니다. 어떻게 하든 알게 해주십니다.

 

제가 멍청한 질문을 여러분께 하겠습니다. 그러나 상당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정확하게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냥 교회만 다닙니까 아니면 정말로 예수님을 믿습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얼마든지 성령 충만할 수가 있습니다. 기초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는 그것이 기초자격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되풀이 되풀이 확인해야합니다.

하나는, 예수님께 가는데 계속 가는 것입니다. 틈만 나면 예수님께 가는 것입니다. 꼭 예배당에 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예수님께 가고 또 가기만 하면 됩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 가고 계속해서 마시면, 그렇게 하기만 하면, 자신 있게 말씀드리는데 세상의 어떤 사람도 어떤 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고 최고의 평화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있든 없든, 모자라든 넘치든 관계없습니다. 환경도 아무 관계없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얼마든지 최고의 평화,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