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할 일, 해서는 안 될 일
에스라 1:1~11
나이가 들면 자칫 추해지기가 쉽습니다. 육체적인, 신체적인 추해짐이야 어쩔 수 없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다 그렇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불평할 것도 없고 오히려 감사로 받아들여야하겠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 추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60대, 70대의 나이가 들어서 추해지는 것이 아니라 20대 30대에도, 40대 50대에도 얼마든지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조심하지 않고 스스로 챙기지 않으면 육체적인 추함보다도 더 추한 일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들이 많습니다. 나이 들어 늙은이가 되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대표적인 말들을 꼽아보았습니다. ‘설치지 말고 미운 소리, 우는 소리, 헐뜯는 소리 그리고 군소리랑 하지도 말라.’ 라고 합니다. ‘알고도 모르는 척 어수룩하고 한 살 더 먹으면 밥 한 숟가락 적게 먹고 말도 적게 하라’고 합니다. 누구에게든지 좋게 보이는 늙은이로 살라고 하고 고집하지 말고 상대방을 꼭 이기려고 하지 말고 적당히 져주라고 합니다. 한 걸음 물러서서 양보하는 것, 그것이 지혜롭게 살아가는 비결이라고 말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추해지는 것은 나이가 들어서 추해지는 것뿐만 아니라 권력을 가진 사람,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자는 말년에 네 가지 마음을 끊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무언가 해야 한다는 마음, 두 번째는 반드시 어떠해야한다는 마음, 세 번째는 고집을 부리는 마음, 마지막으로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정도 되었으니 공자라는 어른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세 차례의 바벨론 침략 끝에 기원전 586년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임시 정부가 잠시 서기는 했지만 독립을 이루기까지 2,500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나라가 없는 민족으로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고 온 세계에 뿔뿔이 흩어져서 살아야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역사 중에 이스라엘 민족으로서는 꿈과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의 멸망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국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 일을 노래한 것이 시편 126편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시126:1-2)
이 시편 126편은 참으로 감격적인 노래입니다.
또 여러분이 잘 아시는 베르디의 음악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있습니다. 오페라 나부코에 그 노래가 나왔는데 나부코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포로들을 끌고 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입니다.
그 놀라운 일이 있게 된 것은 이스라엘을 정복한 바벨론, 그 바벨론을 정복한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의 칙령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오늘 본문 1-3절의 말씀입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하셨나니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서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유대인 포로들을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던 페르시아 왕, 그리고 이것과 비견되는 일들과 관련된 성경의 다른 인물들의 면면을 잠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면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말씀을 들으실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는, 페르시아의 고레스와 정반대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출애굽 때 이집트 왕 바로입니다. 당시 이집트의 최대 노동력이었던 히브리 노예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주는 일은 이집트 왕에게 있어서 어떤 일이 있어도 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는 나라가 망할 것 같았습니다. 끝끝내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이집트는 무서운 재앙을 만납니다. 재앙 하나가 끝나면 또 다른 재앙, 그 재앙이 끝나면 또 다른 재앙이 계속해서 몰려왔습니다.
이집트가 당하는 재앙이 이스라엘 노예 때문일 가능성이 점점 확실해졌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집트 신하들 중에서는 그것을 직접 말하는 신하들도 있었습니다. 바로도 몇 번이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보내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몇 번이나 해방시켜주겠다고 약속하기까지 했지만 그러나 바로는 자기가 내린 결정을 번복하고 또 번복했습니다. 번복할 때마다 바로는 확신했습니다. 보내주겠다, 해방시켜주겠다고 한 판단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내가 늦게나마 내가 내린 판단을 번복하는 것이 결국은 올바른 판단이고 나중에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이런 확신을 하는 사람들이 요즘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재앙이 서너 번 지나고 대여섯 번 지나고 일곱 번, 여덟 번째 이르자 이집트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하게 됩니다. 왕이라고 임금이라고 최고지도자라고 고통까지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바로는 끝내 자기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바로는, 지금에 와서 내 소신을 굽히는 것은 괜히 사람들 고생만 시키고 결국 내 잘못 때문에 내 백성들이 저렇게 고생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는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힘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잘 합니다. 나라의 안위, 백성들의 고통보다는 자기의 체면, 자기의 권위를 더 귀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로의 고집은 아홉 번째 재앙이 끝날 때까지 계속 됩니다. 기어코 이집트가 당하는 재앙이 열 번째에 이릅니다. 바로도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왕이라고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힘이 있다고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절대 만만하지 않습니다. 원통하고 분통했지만 바로는 이스라엘 노예들을 해방시켜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보냈습니다.
그러나 막상 이스라엘 노예들이 이집트를 떠나자 바로는 또 후회했습니다. 그렇게 고통을 당하면서까지 지금까지 버텼는데 이 고통들의 값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이것이 옳다고 소신을 지켰는데 그 소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막대한 이집트의 노동력 상실을 생각하니 견딜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마음을 바꿉니다. 번복합니다. 추격대를 조직해서 추격에 나섭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풀어주었던 노예들이 다시 돌아오기는커녕 엄청난 이집트 군사력 상실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인생들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이런 인생이 많고 특히 지도자 되는 사람들, 힘 있는 사람들, 권력가지고 있다는 사람들 중에 이런 인생이 많습니다. 망해가고 있는 줄 모릅니다. 그것을 볼 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말해도 들을 줄 모릅니다. 바꿀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주변에 함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못 봅니다.
두 번째, 그 바로와 비슷하다가 아차 깨닫고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무엘 시대에 블레셋 지도자들입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여 통쾌한 승리를 거둡니다. 승리를 거둔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최고 보물인 법궤를 빼앗아서 본국으로 갑니다. 가서 신나게 큰 소리를 치면서 자기 신들 앞에 이스라엘 신이 엎드린 것처럼 법궤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법궤가 블레셋에 온 때로부터 블레셋에 무서운 일이 일어납니다. 법궤가 가는 곳마다 재앙이 닥칩니다.
블레셋 지도자들도 이스라엘 법궤와 자기네들이 당하는 재앙의 연관성을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 같은데도 믿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을 확인하려고 법궤를 세 번이나 다른 지방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법궤가 가는 곳마다 재앙이 닥쳤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지도자들은 이집트 바로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을 모시고 와서 지혜와 자문을 구했습니다. ‘여러 어르신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우리는 믿고 싶지 않지만 아무리 해도 그럴 개연성이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법궤를 빼앗아 온 날로부터 나라가 계속해서 이런 재앙으로 국민들이 고통을 당하고 나라도 국력손실이 많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렇게 자문을 구해서 의견을 모은 결과 빼앗아 온 이스라엘의 법궤를 돌려보내기고 합니다. 블레셋 지도자들도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들이 가질 수 있는 의문을 블레셋 지도자들도 가졌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재앙이 이스라엘 법궤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정말로 사실일까, 아닐 수도 잇지 않겠는가? 그러나 블레셋 지도자들은 지혜로웠습니다. 일단 의견이 모인 이상 우리가 당하는 재앙이 법궤 때문인 것을 일단은 인정을 하자, 그러나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을 하자, 그리고 법궤를 정성껏 모십니다. 법궤를 잘 단장하고 예물들도 바쳐서 이스라엘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도 따라 보냈습니다. 이것이 과연 이스라엘 법궤와 관련이 있는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 잘 알아보고 오라고 보냈습니다. 돌아온 사람들이 보고를 합니다. 재앙이 법궤 때문이 맞았다는 보고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블레셋 백성들이 당하는 재앙은 세 번으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 있는 이스라엘 포로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낸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생각합니다. 바벨론을 정복하니 너무도 따라오는 것이 많았습니다. 바벨론이 그동안 빼앗아온 많은 외국의 보물들 그리고 많은 외국의 백성들이 다 자기네들 소유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횡재를 했습니다. 그러나 고레스는 달랐습니다. 횡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짜로 떼돈을 벌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되는 것이 아니다, 외국 사람들을 뭐 하러 잡아오느냐? 더구나 그 나라의 신전의 보물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레스는 왕으로 등극한 바로 그 해에 조치를 취합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고레스는 왕으로 등극한 바로 그 해에 조치를 취했습니다. 고레스가 왕이 되자마자 취한 그 조치는 단지 말이나 흉내를 낸 것이 아니라 마음속 인격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이런 저런 행동을 할 때 그것이 모양으로만 하는 경우도 있고, 흉내만 내는 경우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나를 보이려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그런 것이 아닌 사람됨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꼭 큰 일이 아니라 작은 일을 가지고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4) 라는 고레스의 칙령은 그것을 말씀하십니다.
고레스의 그 조치를 보면서 노년에 뜻밖의 놀라운 복을 받은 보아스를 돌아봅니다. 보아스는 나이가 상당히 들었음에도 젊은 여자와 다시 결혼하게 되었고,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게 놀라운 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조상이라는 어마어마한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 복을 받게 된 계기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보아스가, 늙은 과부를 홀로 모시고 살아가는 젊은 과부 룻이 이삭줍기로 연명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롯이 그렇게 힘들게 이삭줍기를 하면서 살아가는 이유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홀로 남은 과부 시어머니를 섬기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를 알게 된 보아스는 하인들에게 저 여자가 보릿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더라도 나무라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본래 이삭은 이삭 있는 단 옆에서 줍지 못합니다. 거둔 이삭단을 다 치우고 그 후에나 주울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이삭 줍는 척하다고 이삭단에서 뽑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하인들에게 그 사이에서 줍더라도 그냥 아무 소리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 보릿단에서 이삭을 빼내어서 땅바닥에 흘려주라고까지 말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복 받을 사람은 무언가 다릅니다. 복을 받고 싶다는 소원만 가질 것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이것을 가져야합니다. 고레스는 생각했습니다, 물건을 빼앗아 와도 남의 신전에 있는 물건을 빼앗아서 내 신전에 바치는 그것이 과연 잘 하는 것인가?
고레스는 달랐습니다. ‘우리가 바치는 것은 귀한 것을 바쳐야하는데 어떻게 남의 것을 빼앗아 와서 신에게 바칠 수가 있는가? 그것은 아니다.’
‘고레스 왕이 또 여호와의 성전 그릇을 꺼내니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것이라 바사 왕 고레스가 창고지기 미드르닷에게 명령하여 그 그릇들을 꺼내어 세어서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넘겨주니 그 수는 금 접시가 서른 개요 은 접시가 천 개요 칼이 스물아홉개요 그 대접이 서른 개요 그보다 못한 은 대접이 사백열 개요 그 밖의 그릇이 천개이니 금, 은 그릇이 모두 오천사백 개라 사로잡힌 자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갈 때에 세스바살이 그 그릇들을 다 가지고 갔더라’(7-11절)
어떻습니까? 다시 보십시오. 특별한 복을 받을 사람은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이런 사람이 되기 바라십니다. 아십시오. 이런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주십니다. 누가복음에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가득 가지시고 들어갈 곳이 없으면 흔들어서 채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세 사람을 비교해보라. 어떤 사람이 진짜로 지혜로운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 진짜 복 있는 사람인가? ’
첫 번째는 이집트 왕 바로, 당장 눈앞의 이익, 자기 이익, 자기 위상만 생각할 줄 알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국민들이 참혹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똑똑한 척했던 바로는 그것 때문에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국민들이 어떤 고통을 당할지 이것이 복인지 재앙인지 볼 줄 몰랐습니다.
두 번째는 블레셋 지도자들, 그들도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서, 조금 고통을 당하고 난 뒤에 얼른 제대로 알고 바로 잡을 줄 알았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은 실수할 수 있습니다. 잘못할 수 있습니다. 바로 잡을 줄 알아야합니다. 블레셋 국민들의 고통은 잠시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를 봅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 몰라도 하늘의 흐름을 알았습니다. 인생은, 세상은 이렇게 살아야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왕 고레스 덕분에 페르시아 국민들은 이집트 백성들처럼 열 번의 고통도, 블레셋처럼 세 번의 재앙은 물론 단 한 번의 재앙도 받지 않고 끝났습니다.
장자가 말했습니다. ‘성인은 꼭 해야 할 일도, 꼭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어서 하는 말은 나이 든 사람, 힘이 있는 사람들이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는 말입니다. ‘꼭 해야 할 일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성인의 마음에는 다툼이 없다. 그러나 속된 사람은 꼭 해야 할 일도 아닌 것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속에 다툼이 많다.’
장자의 결론을 요약합니다. ‘꼭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은 망한다.’
우리나라 그리고 현금의 세계 최고 지도자들이 하는 모습을 잘 보십시오. 그리고 잘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5장의 이 말씀도 잘 보시고 기억하십시오.
‘만일 이 사람들의 계획이나 행동이 사람의 생각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자기들이 망할 것이다. 반대로 그것이 하나님께로 나왔다면 아무도 그 사람들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잘 보십시오. 잘 기억하십시오. 사람들도 잘 보시고 하나님의 말씀도 잘 보시고 기억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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