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돌아온 자들 (에스라 3:8-13)

분당소망교회 2021. 3. 12. 08:01

돌아온 자들

 

 

 

에스라 3:8~13 

 

 

20대 후반 제가 처음으로 미국에 갈 때 비행기를 타지 않았습니다. 배를 타고 갔습니다. 인천에서 3만 톤급 화물선을 타고 부산을 거쳐서 동해 바다로 그 다음에 일본 열도를 지나고 태평양을 가로질러서 미국 롱비치로 들어갔습니다. 약 보름을 가는 동안 멋진 일도 많았고 힘든 일도 있었습니다. 멋진 일은 갑판에 나가서 바다 구경을 하는데, 저 멀리서 시커먼 한 떼의 물고기들이 몰려오는데 돌고래 무리였습니다. 수 천 마리였습니다. 배를 향해서 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 물고기 떼는 유유히 배 아래로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위로 올라가서 지나가는데 정말로 장관이었고 멋진 모습이었습니다.

유리 바다도 있었습니다. 정말로 잔잔한 바다, 물결이라고는 머리털만한 가는 물결도 없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말씀하시는 진짜 유리와 같은 바다도 보았습니다.

180도 날짜 변경선이 가까워지자 선원들이 저에게 겁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곧 배가 흔들릴 테니 단단히 준비하라는 경고였는데, 그때 그 경고를 들은 것이 워낙 잔잔한 바다를 지날 때라서 경고가 아니라 놀리는 빈말인줄 알았습니다. 배에는 식당이 두 개 있었습니다. 사관 식당과 선원 식당 두 식당이 있는데 배안의 식탁들은 흔들리지 말라고 다 바닥에 고정이 되어있습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배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식탁을 붙들고 한참을 버텼지만 더 이상 버티지 못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바다에 익숙한 선원들도 한 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습니다. 침실로 돌아와서 누웠습니다. 배가 흔들리는데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침대 옆에 있는 조그마한 창으로 바다 물결이 보였습니다. 그만큼 기울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배 크기는 갑판에서 조깅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배였는데 한 장의 나뭇잎 같이 흔들렸습니다.

구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에 시작한 구토는 하루 종일 그리고 밤까지 이어졌습니다. 거의 하루를 구토하고 나니 더 이상 구토할 것이 없었습니다. 다시는 배를 타지 않겠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보름 동안 배를 타고 가는 동안에 가장 괴로웠던 것은 멀미가 아니었습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 당시 20대였는데, 대단한 믿음을 가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주일만 지키고 예배만 드릴 정도였습니다. 예배드리지 못한 첫 번째 주일, 마치 영혼이 빠진 허깨비 같았습니다. 온종일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갑판 위로 갔다가 지하 기관실로 갔다가 식당으로 갔다고 온종일 왔다갔다 넋 나간 사람 같았습니다. 그렇게 배 위에서 첫 번째 주일을 지내고, 그 다음 한 주간은 온 데를 헤매고 다니면서 기독교 신자들을 찾았습니다. 마침 기관장이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배에는 탑Pop이 둘 있습니다. 한사람은 선장이고 다른 한 사람은 기관장인데 그 기관장이 기독교 신자인 것을 알아내고 만났습니다. 다음 주에는 기독교인들을 모아서 배에서 예배드리자고 했습니다. 아마 배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관장이 예배드린다고 하니 기관장 아래 부하 기관원들 중 이전에 잠깐 교회에 갔던 사람들까지도 다 모였습니다. 기관장실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무 구색을 갖추지 못한 예배였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이었지만 그 때 드렸던 예배 광경이 눈에 선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이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급한 일을 끝내고 다시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예배를 드렸습니다. 꿈에 그리던 조국, 꿈에 그리던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예배는 그 유대인들에게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 할새’(3:1-2)

참 감동스러웠습니다. 몇 년 만입니까? 어떤 사람은 70년이 되었을 것이고,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지 50년이니 어떤 사람은 50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그 고생길을 마다않고 조국을 찾아온 목적인 성전건축을 시작했습니다. 돌아온 유대인들은 이 성전건축을 위해서 바벨론에서 그동안 쌓았던 모든 것을 다 뒤로하고 1500Km나 되는 그 멀고 험하고 힘든 길, 고생길을 마다않고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쯤에서 생각해봅니다. ‘예루살렘 성전 건축이 그렇게 할 만큼 그렇게도 중요한 일이었던가?’ 라는 것입니다. 대답은 그렇습니다.’입니다. 분명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처음으로 예배당을 건축하거나 새로 건축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전혀 다른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러했습니다. 그때 그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 성전 건축은 죽어도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 건축은 성전 건축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하나님, 우리가 확실하게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떠나있었습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있다가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라는 말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확실한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귀했습니다. ‘하나님, 정말로 우리가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말로만 돌아간다고 했는데 정말로 돌아왔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우리가 어쩌다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가? 우리도 집이 있었고 가족이 있었고 친척이 있었고 정부의 관리들이 있었고, 정부의 관리들이 우리를 지켜준다고 하기도 했었지만 모두 다 잃어버렸습니다. 어쩌다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답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분명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이 그렇게도 외친 한 마디 그것이 답이었습니다. 그것을 요약하면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지금 여러분들이 누리고 있는 것보다도 더 큰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버리면 지금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것, 지금 여러분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비참하게 됩니다. 뭇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됩니다. 부디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떠나지 마시고 하나님을 버리지 마시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수도 없이 들었기 때문에 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떠나보니 괜찮았습니다. 망하지 않았습니다. 큰 일 나지 않았습니다. 무언가 조금 잘못되어도 이 정도는 그것과 연결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유대인들은 비커 속에 들어앉은 개구리처럼 몸이 익어가고 자기가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죽어가고 망하고 말았습니다.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옛날에는 자기들이 우습게 여기던 사람들에게까지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바벨론에 끌려와서 살던 유대인들은 결심했습니다. ‘다시는 우리도 우리 자식들도 이런 비참한 일을 겪을 수는 없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다시는 우리가 이런 비참한 일을 안 겪고 우리 사랑하는 딸 아들들이 이런 비참한 일을 안 겪을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도 아주 쉬웠습니다.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밖에 없다는 답이 이미 나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자!’ 모든 유대인들이 공감했습니다. 대표적으로 호세아 선지자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6:1)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 건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이제 하나님께 다시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확실하게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라는 의미였습니다. 당시 바벨론에 살고 있던 모든 유대인들은 그 말에 공감했습니다. ‘그렇다! 맞다. 우리가 살길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그것밖에 없다.’ 이때 이 말씀 중에 돌아간다는 말은 지역적인 이동을 꼭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벨론 땅에서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 돌아감입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은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것을 하는 이것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러던 중에 바벨론 제국을 무너뜨린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 고레스가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여기를 떠나서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라는 칙령이었습니다. 바벨론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모두 다 이 칙령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통해서 다 전해지고 이 사람에게서 또 다른 사람에게, 유대인들은 다 전해 들었습니다.

그 칙령을 들은 유대인들의 반응은 갈라졌습니다. 한 부류는 고레스의 칙령을 페르시아 황제 칙령으로만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황제가 이런 칙령을 발표했구나.’ 오늘날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종을 통해서 어떤 말씀을 하실 때, 오늘도 목사님이 저런 말씀을 하셨구나, 그러나 저 말씀은 다른 사람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하는 부류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고레스의 칙령을 듣고 이런 저런 사유가 있었기 때문에 유다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바벨론에 남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고레스의 칙령을 하나님께서 페르시아 황제를 통해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은 고레스의 칙령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유다로 돌아가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해야한다고 말씀하셨고 명령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명령을 받아들이고 순종해야한다, 가야한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의 한 마을에 들어가셨을 때,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병환자들이 소리를 지르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나병에 걸리면 귀라든지 코라든지 바깥쪽에 있는 것이 먼저 썩어 가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기관지 후두입니다. 후두가 먼저 상합니다. 후두가 다 내려앉아 소리를 못 냅니다. 말소리가 제대로 안 납니다. 소리를 내면 목이 찢어집니다. 터집니다. 나병환자들이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는 것은 절박한 심정으로 죽으라고 소리를 질렀다는 말입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안타깝게 절망적으로 예수님께 부탁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치료해주시고 난 뒤,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제사장들에게 가는 도중에 몸이 다 나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열 명 모두 다 나병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열 명 중 한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 사람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돌아온 한 사람에게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7:17-18)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심각한 의미가 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7:19)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도 감사하는 마음은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하신 말씀은 구원받은 사람은 돌아온 단 한사람뿐이라는 말씀입니다.

 

북이스라엘 왕 아합이 포도원 하나를 탐을 냅니다. 그러다가 그 포도원 주인을 죽이고 자기가 포도원을 차지합니다. 하나님께서 격노하십니다. 그야말로 격노를 하십니다. 그리고서는 선언을 하십니다. ‘아합, 내가 너를 죽이겠다. 그리고 너 죽을 때 흘린 피를 개들이 핥게 하겠다. 너 아내 이세벨은 죽은 그 이세벨의 살을 개들이 먹도록 하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그 말씀에 아합이 깜짝 놀랍니다. 벌벌 떱니다. 그리고서는 회개하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걸치고 금식을 합니다. 굵은 베옷을 입은 채 자리에 누웠고 풀이 죽어서 힘이 없이 걸었습니다.

아합의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으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는 내리지 않겠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합에 대해서 하신 말씀을 자세히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가운데 내가 너를 용서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아합 너는 구원받았다는 말씀도 없습니다. 다만, 아합 집안에 내리는 재앙을 아합의 시대는 말고 아합의 아들 시대에 내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후에 아합에게 처참한 일이 생깁니다. 전쟁에서 활에 맞아 중상을 입습니다. 피를 흘립니다. 전쟁터에서 빠져나가려고 죽도록 애를 썼지만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하루 종일 피를 흘리다가 저녁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내 이세벨은 부하의 반란에 의해 죽게 되는데, 높은 곳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집니다. 몸이 박살이 나서 죽습니다. 죽은 시체를 개들이 먹고 말았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아합에게, 아합 집안에 구원받을 길이 없었겠습니까? 꼭 망할 수밖에 없었겠습니까? 아닙니다. 구원받을 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그 무서운 선언을 듣고 아합이 풀이 죽어서 지내는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엎드려서 처절하게 회개를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되었습니까?’

회개하는 것이 진정인지 아닌지는 내가 이만큼 회개했다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말로 회개했다고 인정하실 정도가 되어야합니다. 이미 나봇은 죽었습니다. 살아날 수가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대신에 나봇의 가족에게 충분한 배상을 하고 자기가 빼앗아온 포도원을 돌려주었으면 길이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합은 마치 회개하는 듯한 모습은 있었습니다. 모양은 있었지만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그 말씀, 고레스의 칙령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고 유대인들에게 있었던 행동, 삶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나는 내 아내, 내 남편을 정말로 사랑합니다.’ 라고 하지만 정말로 사랑하는지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습니까? 말만 하는 그것을 누가 못합니까?

 

야고보서 2장에서 하나님께서 야고보를 통해서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미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2:14-18)

다시 19절에서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귀신들도 말은잘 한다는 말씀입니다. 삶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또 이어지는 20절에서는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벨론에서의 그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 힘든 길을 온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하셨을 말씀이 있습니다. 틀림없이 이 말씀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느냐? 여러분들의 그 믿음이 여러분들을 구원하였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되십시오. ‘여러분의 그 믿음이 여러분을 구원하였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