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돔 고모라의 10명
에스라 2: 1~10
‘황성옛터’ 라는 우리나라 옛 노래가 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황성 옛 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 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노래의 황성이란 황폐해진 성이라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찬란했는데, 현재는 폐허가 되어서 허무하게 된 옛 성터를 바라보면서 한탄하는 노래입니다.
이스라엘 정확하게는 유다가 멸망당할 때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유대인 포로들이 조국으로 돌아온 역사를 기록한 에스라서 2장에서 ‘황성옛터’의 황폐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1절을 보겠습니다.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갔던 자들의 자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와 각기 각자의 성읍으로 돌아간 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유다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었을 때 북쪽을 이스라엘이라고 하고 남쪽을 유다라고 했으므로, 분열된 이스라엘의 남쪽 나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유다는 한 나라, 한 국가를 칭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유다는 한 나라가 아니라 다른 나라의 한 부분인 지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갔던 자들의 자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와 각기 각자의 성읍으로 돌아간 자’ 즉 이스라엘이 나라의 주권을 잃어버리고 다른 나라의 한 지방으로 전락했다는 말입니다. 또 68절에서는 ‘어떤 족장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 터에 이르러’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이 아니라 성전이 있던 터, 빈자리라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성전이 있었는데 이제는 없어지고 성전이 이 있던 자리만 남아있다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얼마나 화려하고 거창했던가는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는 기간이 7년이었습니다. 건축하는 7년 동안 성전 안에서는 공사 소리가 일체 나지 않았습니다. 방망이 소리, 망치 소리, 연장소리가 일체 들리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공사를 했을까요? 밖에서 다 만들어서 성전 안으로 옮겨가서 거기서 조립만 했기 때문입니다. 목재는 나무 중에서 최고라고 하는 백향목으로 했고, 성전을 다 짓고 난 후에는 금으로 입혔습니다.
그렇게 화려하던 예루살렘 성전이 없어졌습니다. 그러했던 예루살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표현될 정도로 모두가 허물어져서 황량한 빈터가 되었습니다. 망하여 다른 나라의 한 지방으로 전락한 나라, 수많은 사람들이, 예쁘고 귀여운 어린 아이들까지 모여서 함께 예배드리던 아름다운 성전이 허물어져서 잡풀만 무성하게 되는 이것은 그러나 고대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든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그렇게 된 나라들이 많습니다.
절대 망할 것 같지 않았던 바벨론, 바벨론에 대해서 우리가 잘 알지 못하지만 바벨론의 역사와 지금 남아있는 유적들을 보면 정말로 대단합니다. 어떤 나라와도 비교가 안 될 정도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로마,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절대 안 망할 것 같았던 로마였습니다. 바벨론은 하드웨어적으로 대단했고 거기에 비해서 로마는 소프트웨어로 생각하면 됩니다. 세계 역사에서 그보다 더할 수 없었던 이 두 나라가 다 그렇게 별 볼일 없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마찬가지로 과거 대단했던 나라, 대단했던 권력과 대단한 재산을 가졌던 사람들 중에서 그 누구보다도 더 초라하고 비참하게 된 나라 그리고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있을 것입니다.
어쩌다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자랑하던 예루살렘 성전이 그 모양 그 꼴이 되었는가?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내일을 살아가고 있는 이 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대단한 나라 그리고 개인들, 대단하다고 하는 사람들 그리고 평범한 우리까지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 잘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들이 망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대단하다고 한 사람들 중에서도 한참 부흥하고 클 때는 아무도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유다가 그렇게 되었는지 성경은 확실하게 여러분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그 성전 건축을 끝내고 자랑스럽게 기도했습니다. 솔로몬이 드린 성전 그리고 기도를 받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함께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열왕기상 9장 1절부터 보겠습니다. 먼저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가 이루기를 원하던 모든 것을 마친 때에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게 나타나심 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라는 1절과 2절의 말씀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여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네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만일 너희나 너희이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성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며 이 성전이 높을지라도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며 비웃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대답하기를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가서 그를 경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왕상1:3-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말씀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나를 사랑하여 나와 함께 있으면서 내 말을 따르면 지금보다도 훨씬 큰 복, 지금 여러분들이 받고 있는 것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복을 내려줄 것이다. 반대로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를 버리고 나를 떠나면 복은커녕 지금 받아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비참하게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라고 엄중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두 번째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유다의 멸망 원인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성경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반드시 가져야할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 민족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멸망할 정도로 하나님을 떠났을까?’ 라는 것입니다. 떠나지만 않았다면 그때 그 영광을 그 영화를 그대로 누리고 더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왜 떠났을까요?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을까요? 그런데 여러분, 유다 사람들이 다 바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똑똑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어느 나라보다 똑똑한 민족이 유대민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경고하셨는데 듣고도 떠나고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유대 민족이 하나님을 떠나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유대 민족은 끝까지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유대민족은 끝까지 확신했습니다. ‘우리는 한 번도 하나님을 떠나려 한 적이 없었고 하나님을 버린 적이 없었고, 사실적으로도 절대로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인들만의 생각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자식이 부모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말하는데, 부모는 나는 절대로 너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면 누구 말이 옳겠습니까? 상처는 받은 사람 기준입니다. 나는 상처를 안 주었다고 할지라도 저 사람이 상처를 받았다고 하면 내가 상처를 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니다, 너희들은 나를 버리고 나를 떠났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 내용을 자세하게 봅니다. 유대민족이 처음에는 떠났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조금만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이미 걱정하는 어른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렇게 하다가는 망한다고 걱정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 특히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그 말씀을 기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정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것도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벌을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상 그렇게 해도 별 탈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확신했습니다. ‘보십시오. 이 정도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이건 확실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조금 더 떠났습니다. 그래도 ‘큰 탈’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조금마한 일들은 있었지만 큰 탈은 생기지 않고 망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정도에도 안 망했다, 안 망했으면 되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유대 민족은 조금씩 점점 더 하나님을 떠났고 결국은 완전히 떠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라인을 넘어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도 결코 자기가 하나님을 떠난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어이 그 라인을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유대민족은 한꺼번에 망한 것이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망해갔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개구리 이야기입니다. 미국 코넬대 생물실험실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두 개의 실험 비이커를 준비했습니다. 한 비이커는 개구리가 가장 잘 사는 15도의 온도의 물을 넣어두었습니다. 또 하나의 비이커에는 약간 뜨겁다고 할 정도인 40도의 물을 넣었습니다. 각각 그 안에 개구리를 넣었습니다. 온도를 조금씩 높였습니다. 40도에 들어간 개구리는 물의 온도가 더 올라가자 ‘앗 뜨거워라’ 하면서 비커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15도의 온도에 들어간 개구리는 물의 온도가 올라가도 적응하였습니다. 20도, 25도, 30도로 올라가도 잘 적응했습니다. 많이 뜨거워도 적응해나갔습니다. 그러나 뜨거워지면서 개구리는 점점 더 감각을 잃어갔습니다. 마침내 감각을 다 잃고 자기 살이 익어가는 줄도 모르고 익어버린 개구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유대민족이 당한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나라들이 많은 가정들이 많은 사람들이 그 개구리처럼 망해가는 줄 모르고 망해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 꼴이 될지 모릅니다. 어쩌면 마지막 라인 앞에 와 있는지도 모릅니다.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처절하게 후회했습니다.
그러다 페르시아가 제국으로 등극하면서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의 칙령으로 이스라엘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극히 일부였습니다. 당시 바벨론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끌려간 사람들과 그들의 자손을 합해서 200만 명이 넘었습니다. 그 중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2%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온 회중의 합계가 사만 이천 삼백 육십 명이요’(스2:64) 라는 말씀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바벨론에 끌려간 것이 길게는 70년 짧게는 50년이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상당한 기반을 잡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던 사람들이 땅을 샀고 집을 샀고 사회적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장관급에 오른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다 남겨두고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남의 이야기로는 쉽지만 내 이야기가 될 때는 쉽지 않습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가 1500Km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세 번 반을 왔다 갔다 해야 하는 거리였습니다. 교통수단도 거의 없었습니다. 여유가 많이 있어야지 노새 정도 탈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 걸어서 와야 했고 연로하신 분들도 많았고 어린 아이들이 있는 가정도 많았습니다. 안 돌아온 사람들, 안 돌아온 것을 이해해야합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돌아오지 않은 사람은 보지 말고 돌아온 사람들을 보아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사람들은 정말 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모든 희생,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돌아와도 보장되는 것도 없고 아무 혜택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분들에게 돌아온 것은 희생뿐이었습니다.
그분들이 돌아온 이유는 무엇보다도 예루살렘 성전재건이었습니다. 재건할 재료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전에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는 아버지 다윗이 전부 다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당시는 나라가 부강했습니다. 그때는 다윗을 보고 이웃나라에서 물건을 보내줄 정도이지만 그들에게는 재료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또 하나 더는 언제 어디서나 있는 텃새입니다.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남아있던 사람들은 미안하지만 별 볼일 없는 사람들입니다. 쓸 만한 사람들은 다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가 그동안에는 자리를 제대로 차지하지 못하다가 이제 자리를 좀 차지했으니, 죽으라고 그것을 빼앗기기 싫었고 그것을 자식들에게 대대로 물려주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간에 기득권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온갖 못된 짓을 다했습니다.
제 아버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아버님께서 어렸을 때 일본에 건너가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이런 고생, 저런 고생을 다했고 심지어 성냥 공장에서 일을 하시다가 아버님 표현에 의하면 열 손가락 손톱이 남아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고생 끝에 일본에서 의사가 되셨습니다. 일본에서 상당한 경제력 그리고 사회적 기반도 마련했습니다. 그러다 해방이 되어서 조국에 돌아오셨습니다. 조국에서의 병원이 잘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외삼촌, 아버님께는 처남이 야당이라는 이유 때문에 또 하나는 아버지 병원 근처에 자유당 의사가 있었다는 이유 때문에 아버지의 병원은 자유당의 온갖 행패를 당하셨습니다. 각목을 든 자유당 당원들이 병원에 몰려 들어와서 병원시설을 부수는 것을 제 눈으로 본 것만 해도 몇 번이나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렇게 잘 살던 제 집은 극빈 가정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의사가 의사 노릇을 못하니 할 수 있 일이 하나도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아버님께서 약주 한 잔 하시면 자주 부르시던 노래가 ‘황성옛터’였습니다. 그 노래를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일본 놈들도 의사에게만은 센세이라고 부르면서 존경했는데……’ 일본 사람들이 웬만해서는 사람에게 센세이라는 존칭을 잘 안 붙여준답니다. 특별히 존경하는 사람들에게만 센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의사에게는 늘 센세이라고 불러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처량하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수차례 보았습니다. 아버님께서 부르시던 황성옛터의 뒷 가사는 당시 어린 저의 가슴을 휑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고 있노라」
이 마지막 가사를 부르시는 아버지 모습은 참으로 안 되어보였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도 그 모든 어려움을 충분히 예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께서 성전을 건축하라고 하신 그 말씀에 순종한 것이었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스1:2-3)하는 말씀을 보십시오. 고레스의 그 칙령을 바벨론에 포로로 있던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네들에게 주신 명령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고레스의 칙령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유다로 돌아온 사람들이 하나님께서는 너무 고맙고 너무 예쁘고 너무 좋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일이 명단을 말씀하셨습니다. 에스라 2장 2절에서 60절까지 그 명단이 기록되어있고, 똑같은 명단이 느헤미야 7장에 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두 번씩이나 보여주신 이유는 ‘이 사람들아 정말로 고맙다. 너희들이 그렇게 했으니 나는 절대로 너희들을 잊지 않겠다. 정말로 귀하게 여길 것이다. 내가 여러분들을 귀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 때문에 여러분의 아들 딸 또 그 아들딸까지도 내가 기억하고 챙겨줄 것이다.’ 라는 말씀이 바로 그 명단을 기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열 명의 의인만 있어도 내가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또 예레미야 선지자에게는 ‘예루살렘에 정의를 구하며 진리를 구하는 의인 한 사람만 있어도 내가 예루살렘을 용서하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그 모든 어려움, 그 모든 예상 다 겪고 바벨론에서 유다로 돌아온 그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소돔과 고모라의 열 명이고 예루살렘의 한 명의 의인입니다.
이제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들에게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분량까지만 해주기를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의 그런 기대에 부응하는 여러분들이라면 여러분은 여러분 가정의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여러분의 아들이 딸이 좀 못하다고 할지라도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의 자식들이 복을 받을 수 있고, 많이 걱정스러운 이 나라, 위태위태하고 다음 젊은 세대들이 얼마나 빚을 갚아야 할지 걱정만 쌓여가는 이런 나라이지만 그러나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의 그 모습이 이 나라를 지킬 수 있는 버팀목이 될 수가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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