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삭개오의 회개 (누가복음 19:1-9)

분당소망교회 2021. 4. 30. 13:41

 

삭개오의 회개

 

 

 

누가복음 19: 1~9

 

 

며칠 전 어떤 분이,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이 쓴 일기장을 사진 찍어 보내왔습니다. 일기장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나는 오늘 지각했다. 그래서 선생님께 혼이 났다. 다음부터는 혼이 나지 않기 위해서 결석을 해야겠다.

 

최근 일간지에 성경 인물 용어가 등장했습니다. ‘밧세바 신드롬

밧세바 신드롬이라는 용어를 만든 오래 전의 한 논문은 지도자의 실패 원인을 네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하나는, 제약받지 않는 지도층의 권력입니다. 두 번째는 권력을 통해서 은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오판이고, 세 번째는 정부와 사람에 대한 특권적인 접근 가능성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개인적 그리고 조직적 성공이 주는 만족감으로 말미암아 본연의 목표 상실, 이것 때문에 지도자들이, 정권이 실패한다는 말입니다.

밧세바 신드롬의 당사자 다윗이 그랬습니다. 당시 나라는 안팎으로 안정이 되었습니다. 왕의 입지는 탄탄해졌고 전쟁이 있어도 군대 총사령관이 출전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국력 그리고 군사력은 막강해졌습니다.

그 날도 다윗의 부하들은 전쟁터에서 전투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궁궐에서 저녁때까지 낮잠을 느긋하게 자다가 일어나서 어슬렁거리다 아름다운 모습의 여인을 봅니다.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 여인을 궁궐로 데리고 왔습니다. 부하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밧세바가 임신을 합니다. 다윗은 자기의 불륜을 감추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러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급기야 다윗이 생각한 고약한 생각, 밧세바의 남편을 죽여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밧세바의 남편이자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아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그 죄는 그보다 더 큰 죄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최고 악질적인 죄였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기는 받았지만,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더 나가서 다윗을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 되도록 해주셨습니다. 동서고금을 통해서 다윗과 같이 무서운 죄를 범하고도 위기를 잘 넘기고 거기다 복까지 받은 경우는 찾기 어렵습니다. 성경의 인물에서 죄를 짓고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망한 경우를 봅니다.

성경의 첫 경우는 아담의 아들 가인입니다. 하나님께서 동생의 제사는 받아주시고 자기 제사는 안 받아주신다고 가인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습니다. 급기야 그 분노와 질투를 이기지 못하고 동생을 살해하고 맙니다. 그 죄로 인하여 가인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떠돌이 신세가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는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입니다. 궁궐 근처에 포도원을 탐냈습니다. 포도원 주인을 죽이고 맙니다. 그 죄로 아합은 전쟁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맙니다. 하루 종일 피를 흘리다가 끝내 전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의 아내는 높은 곳에서 던져져서 몸이 박살이 납니다. 그 시체는 개들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그 악한 아합의 아들 아하시아도 그랬습니다. 별로 높지도 않은 난간에서 떨어져서 병들어 병상에 눕습니다. 아하시아는 병 같지도 않은 병, 사고 같지도 않은 사고로 한 번 올라간 병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남 유다의 의롭던 왕 아사가 있었습니다. 그 아사가 어찌된 일인지 하나님을 배신합니다.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발에 병이 들었습니다. 발에 병이 들었다는 말은 죽지는 않을 병이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아사는 발병 때문에 죽고 맙니다.

성경에서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입니다. 땅을 팔았습니다. 땅 판 값을 교회에 바쳤습니다. 그런데 조금 거짓말을 했습니다. 땅 판 값 일부를 바치면서 전부 다라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남편이 급사를 하고 남편이 죽은 지 세 시간 만에 아내도 급사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예를 든 사람들에게 살 길이 없었겠습니까? 꼭 죽어야했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꼭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어떤 경우가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는 반드시 길이 있다는 사실, 이것은 꼭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사랑하는 아들딸들, 여러분의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는 길이 있다는 사실, 이것을 아십시오.

그 사람들도 틀림없이 살 길이 있었습니다. 그 까닭은 다윗이 지은 죄는 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크고 죄질이 나빴음에도 불구하고 망하지 않았고 거기다 복까지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얼마든지 살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혹은 앞으로 여러분들과 여러분 자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혹 다윗보다 더 큰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살 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잘 알아야할 것은 다윗이 그 사람들보다 더 악한 죄, 더 무서운 죄를 짓고도 망하지 않고 복까지 더 받은 그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께 회개를 했는데, 하나님께 돌아왔는데 진정으로 회개하고 진정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가인부터 봅니다. 동생을 죽이기 전에 기회가 있었습니다. 화가 잔뜩 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할 때 하나님께서 왜 그런지 물었습니다. 그때 돌아왔으면 되었는데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어둠이 있으면, 악이 있으면 점점 더 큰 악으로 나가게 되기 때문에 빨리 결단해야하는데 악을 단절시키지 못하고 가인은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또 기회를 주셨습니다. ‘가인아 동생이 어디에 있느냐?’ 라고 물으셨을 때, 가인은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라는 못된 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돌아올 기회가 있었지만,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망했습니다.

다음은 아합입니다. 나봇을 죽인 뒤에 하나님께서 너와 네 아내는 이러 이러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라고 무서운 심판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합에게 내리신 그 심판 선언은 길이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길이 있으니 지금이라도 돌아오라는 부르심이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합은 굵은 베옷을 입기도 했고, 풀이 죽어서 다니기도 했지만 진정으로 회개함이 없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망했습니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아에게도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습니다. 죽을 수가 없는 난간에서 떨어졌는데, 병이 점점 심해집니다. 이 아하시아가 신하를 보냅니다. 살 방법을 찾으려고 사람을 보냈는데, 하나님이 아닌 이방신에게 보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셔서 그 신하를 만나게 합니다. ‘가서 왕에게 전하라. 이스라엘에 신이 없어서 이방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느냐? 그것 때문에 너는 죽을 것이다. 한 번 올라간 병상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 이 선포는 무슨 선포입니까? ‘이 바보 같은 사람아, 제발 바보 같은 짓 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돌아오너라. 그러면 길이 있다.’ 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러나 아하시아는 끝까지 돌아오지 않고 망하고 맙니다.

유다 왕 아사는 참 아까운 인물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 충성했습니다. 여러분, 꼭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아사가 간 길로 갑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니 하나님께서 사랑을 주셨습니다.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이래서 자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지 못합니다. 좋은 것을 주지 못합니다. 그냥 그것만 받고 그것만 쳐다보고 있다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고 맙니다. 아사는 발에 병이 생깁니다. 심해집니다. 위독해집니다.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기회가 있었습니다. 발에 병이 나고 난 뒤 2년간의 기간이 있었습니다. 2년간 얼마든지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도 있었고 자기가 하나님께 직접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돌아오지 않아서 그 괜찮았던 사람이 아깝게 망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바보 같은 신약의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는 너무도 딱합니다. 헌금, 교회 돈 안 바치는 사람, 못 바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고도 복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땅 팔아서 교회에 헌금하고도 그런 비참한 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거짓말 할 이유가 무엇이 있습니까? 왜 거짓말 합니까? 괜히 칭찬 더 받고 얼굴 더 내려고 한 것 아닙니까? 아차하고 거짓말 할 수도 있습니다. 말을 잘못 할 수도 있습니다. 얼른 돌아오면 됩니다. ‘제가 그만 큰 실수 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하면 되는데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나니아가 먼저 죽습니다. 세 시간 동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내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흉흉합니다. 분위기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 기회를 놓치고 아내마저도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다시 기억하십시오. 아무리 악한 사람도 아무리 무서운 죄를 지은 사람도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은 길이 있습니다. 틀림없이 길이 있습니다. 이사야 118절에서 하나님께서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미래형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그런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씻어서 없어지지 않을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나에게 오기만 하면 아예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만들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제가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잠깐 묻습니다. 각각 마음속으로 대답하십시오. 여러분은 이 말씀 믿습니까? 어떤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돌아오면 죄를 안 지은 것처럼 해주신다는 이 말씀을 믿습니까? 이것을 믿어야 기독교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에 대한 응답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다윗입니다. 다시 보십시오. 인간의 탈을 쓰고 그보다 더 악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죄를 숨기기 위해서 그렇게 충성스러운 부하를 그렇게 비참하게 죽일 수가 없습니다. 저는 성경을 볼 때마다 혹은 이 광경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그 우리아가 죽을 때 눈망울을 생각해보십시오. 나라에 충성하기 위해서 앞장서서 쳐들어갔습니다. 한참 가다보니 이상하게 자기에게 엄청 많은 적군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부하도 상사도 아무도 없고 자기만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가 있습니까? 얼마나 애처로운 눈으로 가슴 아픈 눈으로 부하들을 쳐다보고 동료 군인들을 쳐다보았겠습니까? 그때 우리아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다윗은 그렇게 하고도 자기 죄를 뉘우친 것도 아닙니다. 그럼 면에서 보면 아주 못됐습니다. 전장에서 상황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다윗이 그 보고를 받고 불같이 화를 냅니다. ‘자네들이 전쟁을 처음 하느냐? 전쟁을 모르느냐? 어떻게 전쟁을 하다가 그런 일을 당하게 되었는가?’ 그때 다윗의 밀명을 받은 장군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가 그렇게 당했다고 말하자 다윗의 얼굴이 싹 바뀝니다. ‘전쟁을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못된 말을 한 다윗입니다. 자기 스스로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하나님께서 종을 보내 호통을 치시니 그때서야 회개를 했습니다. 그때까지도 다윗은 정말로 죽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회개했습니다.

역사서만 보면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그 회개가 얼마나 진정한 회개였고 철저한 회개였는지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6편은 다윗이 쓴 시로 하나님께 한 고백이고 하나님께 드린 호소의 기도입니다.

여호와의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나를 구원하소서’(6:1-4)

아무리 회개해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서해주실 것 같지 않아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5절에서는 사망 중에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지 누구리이까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러다가 제가 죽으면 어떻게 더 회개를 하겠습니까? 제가 죽어서 지옥에 가면 무엇으로 갚겠습니까?’ 라는 기도입니다.

6절에서는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입니다. 그저 한 번 대강 회개하고 만 것이 아닙니다. 처절하게 회개했습니다. 밤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했습니다. 그 눈물이 침상을 적시고 요가 푹 젖도록 까지 눈물을 흘렸습니다. 모든 것을 보실 수 있는 하나님의 눈에 다윗의 그 회개는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실 만한 회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회개를 받으셨습니다. 그 뒤에 다윗은 이전 어느 때보다 더 하나님께 가까이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절하게 회개하는 다윗, 진정으로 돌아온 다윗을 보시고 받아주시고 거기다가 지은 죄가 전혀 없는 것처럼, 마치 9살짜리, 6살짜리 아이의 깨끗함같이 받아주시고 복까지 주셨습니다.

 

이 다윗을 볼 때, 아합에게 참으로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한참 회개를 잘 했습니다.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눕기도 하고 풀이 죽어서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하고 끝내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회개의 모습은 있었는데 진정한 회개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돌아옴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두려움이 있습니다. 어쩌면 현재 기독교 신자들의 모습이 아합의 그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두려움이 많습니다. 말로만 그렇게 하면, 한동안 회개의 모양만 가지면 다 용서받는 줄로 생각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싸구려가 아닙니다. 그렇게 값싼 구원이 아닙니다. 아합과 같은 회개는 회개가 아니요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 자들에게 남은 것은 망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진정으로 돌아온 것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의 세리장 삭개오입니다. 악질 세리 삭개오에게 아픔이 있었습니다. 고민이 많았습니다. 잠 못 자는 날이 많았습니다. 유대인 동족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확실한 일이었습니다. 이 삭개오에게 절대로 양보할 수 없고 그것은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내가 하나님께 이미 버림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이것 때문에 잠을 못 잤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습니다. 예수님을 많이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합니다. 갇혀있는 사람들을 건져주는 구원자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도 예수님을 만나면 길이 있을지 모르겠다, 자기도 건짐을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러던 차에 예수님이 자기 마을을 지나가신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만나야 되겠다고 굳게 결심을 합니다. 그러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 대단한 사람들에게 저주받을 인간이라고 야단을 치시는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까? 자기를 쳐다보시기나 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라도 기회가 된다면 그 예수님께 무슨 말을 할까? 온갖 생각을 다 했습니다.

길에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키도 작고 제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꼭 봐야했습니다. 나무 위로 올라가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이만큼 삭개오의 심정이 절박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간에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오고 계십니다. 가슴이 콩닥거립니다. 그 삭개오에게 꿈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말을 거신 것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내가 오늘 밤에 자네 집에 가서 묵어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이런 일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무엇을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보셨던 그 참된 회개를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서 보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의 눈은 정확했습니다. 삭개오가 거침없이 말한 것이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라는 오늘 본문 8절의 말씀입니다. 진실함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이고 구원입니다.

회개는 싸구려가 아닙니다. 구원은 싸구려가 아닙니다.

 

야고보서 224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그 삭개오에게 예수님께서 공개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삭개오는 구원 그리고 완전한 자유를 얻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