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신자다움 (에스라 4:1-6)

분당소망교회 2021. 4. 30. 13:41

 

신자다움

 

 

 

에스라 4:1~6

 

 

1980 12, 뉴욕 맨하탄 고급 아파트 앞에서 전설적인 비틀즈의 존 레넌이 등 뒤에서 쏜 다섯 발의 총에 맞고 쓰러져서 죽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총을 쏜 사람은 존 레넌의 광팬이었습니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존 레넌을 총으로 쏜 이유입니다. 그 이유는 그 광팬이 너무도 좋아하는 존 레넌의 노래가사 때문이었습니다. 상상해보라는 의미를 가진 ‘Imagine'이라는 노래의 가사 일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상상해보세요.

소유하지 않는 걸 상상해 봐요. 당신은 그럴 수 있겠지요.

탐욕도 굶주림도 없는, 모든 인류가 가족처럼 세상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을 상상해보세요.

나를 몽상가라고 말할지 모르죠.

하지만 나 혼자만 그런 건 아니에요. 언젠간 당신도 나처럼 되고 세상이 하나될 걸 희망해 봐요.

노래는 무소유 그리고 형제애를 노래하면서 우리 함께 그렇게 살자고 말합니다. 존 레넌을 총으로 쏜 마크 체프먼은 이 노래가 좋아서 존 레넌을 미치도록 좋아하고 존경하는 광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래를 만들고 노래를 부른 존 레넌이 실제로는 그 노래와는 전혀 다른 최고의 고급 주택에서 최고의 부를 누리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체프만이 알게 됩니다. 당신만은 다를 줄 알았다고 기대했던 존 레넌의 이율배반 그리고 배신감을 견디지 못한 체프먼은 자기가 그토록 좋아하고 존경했던 그 마음이 미움과 원한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미움과 원한 때문에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는 존 레넌을 총으로 쏘아죽이고 말았습니다.

 

당신만은 달라야한다는 기대감은 사람들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가지고 계십니다. 특히, 신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그 바라심은 상당히 강력합니다. 여러분만은 달라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대를 지금도 여러분한테 가지고 계십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레위기 11 4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바벨론 포로 1차 귀환 후에 유대인들은 성전재건을 시작합니다. 기초공사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되는 듯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다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항상 특별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꼭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잘 믿든지 덜 믿든지 간에 이 것은 사실입니다. 특별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있는 적도 여러분들에게 있고, 거기에 더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만 있는 어둠이라는 적이 있습니다. 어둠이라는 적은 변장을 잘 합니다. 갖가지 모습으로 변장해서 여러분들을 공격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 성전 건축에 동참하게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유대지도자들이 거절합니다. 거절당한 사마리아인들이 여러 가지로 건축을 방해합니다. 심지어는 페르시아 관원들에게 뇌물까지 주면서 방해를 합니다. 결국 예루살렘 성전 건축은 중단되고 맙니다. 장장 16년 동안이나 건축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의문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얼른 생각되어지고 느껴지는 것은 유대의 지도자들이 사마리아인들의 건축 동참 요청을 받아들이면 될 텐데 왜 그렇게 했나?’ 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도 명색이 같은 민족입니다. 더구나 그때는 성전건축에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힘이 많이 부쳤습니다. 그런데 왜 거절했을까요? 어쩌면 그 일을 통해서 남남으로 지내고 있던 북쪽의 사마리아인들과 화해를 하고 화합을 할 수도 있을 텐데 왜 거부했을까? 마치 유대지도자들이 화해를 거부하고 하나됨을 거부하는 듯한, 또 유치하게 주도권을 다투는 것처럼 보이는데 과연 그런가? 왜 거절했는가?

그 동참 거부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은 상당히 많은 손실을 입었습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가진 것이 없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올 때, 바벨론에서 재산이 조금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 중 일부만 가지고 왔고 대부분 재산이 제대로 없었습니다. 바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오랫동안 그것에서 살았기 때문에 재산이 제법 많은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동참을 거부당한 사마리아인들의 방해공작으로 건축이 16년 동안이나 중단되었는데 왜 그렇게 바보 같은 노릇을 했을까요? 그 결과는 충분히 예상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거부하면 충분히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아는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의 동참을 거부한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솔로몬 왕 다음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 남북으로 분열이 되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신앙이 상당히 훼손되었습니다. 이방신앙에 물들었습니다. 거기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의해서 멸망당했는데, 앗수르 제국이 혼혈정책을 세웠습니다. 북이스라엘에 있던 쓸 만한 사람들을 외국으로 흩어버리고, 북이스라엘에 앗수르의 고관들과 사람들을 대거 이주시켰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릅니다.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에 주로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잡혼으로 민족성도 상실했고 종교성도 상실했습니다. 전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사실은 그 사마리아인들의 도움이 아주 절실했습니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돕겠다는데 얼마나 절박했겠습니까? 그러나 유대인들 생각했습니다. 다른 도움은 다 받아도 사마리아인들의 도움만은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의 도움을 받는 것보다 더 크고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깨달았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사는 동안에 우리 조국 이스라엘이 왜 망했는가? 그것은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앙이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만 믿는 그 여호와 신앙이 훼손되어서 하나님이 아무리 보아도 저것은 나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서 그런 일이 생겼습니다. 이미 이방인이 된 사마리아인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겨우 살아나기 시작한 우리의 믿음에 큰 훼손을 줄 수 있다, 이것을 판단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마리아 인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또다시 우리 믿음이 훼손되어도 좋다는 말밖에 안 되기 때문에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그렇게 도움이 절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인들의 도움을 거부한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오늘날 도움만 된다면, 자기에게 유익만 된다면 신앙이든 무엇이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유대 역사를 통해 잘 아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의 도움을 거절한 것은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성전 건축이 늦어져도 좋다, 안 되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지키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이고, 제 일이라는 것이 유대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기독교 교회, 기독교 신자들이 회복해야할 것이 그 거룩함입니다. 제가 회복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이미 잃어버렸다, 상당히 잃어버렸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다움, 교회다움, 신자다움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가 교회다움, 신자다움을 잃어버리면 남는 것은 비참함밖에 없습니다. 당장 지금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끝내는 그 비참함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골리앗 위기 때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 공로는 다윗이 세운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아무 힘도 없었습니다. 다윗에게 있던 것은 오로지 믿음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 하나만으로 다윗은 대단한 일을 했습니다. 그 후 다윗이 장군이 되어 왕 사울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다윗에게 있었던 그 귀한 믿음이 상당히 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윗이 장인 왕 사울의 위협에 도망갈 즈음에는 믿음이 거의 사라진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급히 도망하느라 먹을 것을 못 챙겨 제사장을 찾아간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종 제사장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다윗의 그 거짓말 때문에 제사장 85명 그리고 그 가족들이 처참하게 몰살을 당했습니다. 거짓말로 제사장의 도움을 받은 다윗은 이러다가는 사울에게 잡혀 죽겠다고 생각하고 블레셋에게 도망갑니다. 거기서도 생명의 위험을 느낍니다. 다윗이 미친 짓을 합니다. 몸을 비틀거리면서 미친 사람 흉내를 내고, 말을 해도 글을 써도 말도 안 되는 말, 말도 안 되는 글을 씁니다. 발작을 합니다.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립니다. 다윗이 거짓말로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을 죽음에 몰아놓고, 블레셋에서 추하고 비참하고 초라한 모습을 연출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고 거룩함을 잃어버릴 때 반드시 결과가 나옵니다. 그 기간에 다윗이 하나님을 찾았다는 흔적이 없습니다. 옛날에 다윗이 얼마나 멋졌습니까? ‘너는 칼과 창과 다낭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 라고 한 말을 기억해보십시오. 앳된 몸으로 그 무시무시한 골리앗을 향할 때 하나님을 부르던 위대한 다윗의 모습은, 그 믿음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오로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아야한다는 이것만 남아있었습니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이것만 남아있었습니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이 말은 참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알아야합니다. 그것을 찾을 때 찾고, 챙길 때 챙기고 보일 때 보여야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을 보일 때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다움’ ‘교회다움 이것을 보여야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와 기독교 교회와 신자들에게 팽배한 것이 실용주의입니다. 실용주의가 무엇입니까? 나타나는 결과가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곧 진리이다. 즉 결과가 진리인가 아닌가를 가늠하는 것이 실용주의입니다. 이 실용주의 때문에 교회도 신자들도 자주 계산합니다. 교회에 도움이 되는가 안 되는가? 이것으로 사람들이 모이는가 안 모이는가? 교회가 더 커지는가 아닌가? 이것만 생각합니다. 이것이 옳은가, 아닌가? 하나님의 진리인가 아닌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하면 사업이 더 잘 되는가? 재산이 더 많이 모이는가? 이것만 생각합니다. 타산만합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결과만 좋기만 한다면 진리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 교회다움이고, 어떤 것이 기독교이고, 어떤 모습이 기독교 신자의 본래 모습인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거룩함의 최상위에 있는 예배도 신자들의 힘의 원천인 기도도 너무 쉽게 실용주의에 양보됩니다. 자리를 빼앗기고 맙니다. 예배 안 드려도 특별한 문제 안 생기지 않는가? 기도 안 해도 크게 잘못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돈만 더 벌면 됩니다. 재산만 더 모으면 됩니다. 교회만 커지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로부터 떠나가고 그 사람으로부터 떠나가시고 그 가정으로부터 떠나가십니다. 거룩함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서실 자리가 없어집니다. 기독교 실용주의 때문에 교회는 능력을 잃어버렸고 진자들은 진짜 대신에 가짜만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실용주의 눈으로 볼 때, 기독교 경전 제일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 1장에는 참으로 미련스럽기 그지없는 기록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집안의 가장 부끄러운 내력을 일부러 콕 끄집어내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구세주 예수님의 조상 중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하필 그것만 끄집어냈습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만든 예수님의 조상도 있었고, 술파는 기생도 있었고, 잠자는 남자 이불 속을 슬그머니 들치고 들어간 여인도 있었고, 부하의 아내와 불륜을 숨기기 위해서 충성스런 부하를 죽인 조상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고로 올라간 것은 특히 구세주 예수그리스도 어머니는 남편의 아이가 아닌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일이 하나도 숨김없이, 가림 없이, 채색됨이 없이 기록된 책을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에 주셨고, 기독교의 어른들은 그 책을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그대로 출판했습니다.

망할 작정이 아닌 다음에 어떻게 이럴 수 있겠습니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계산 때문에 기독교다움을 잃어버리고 교회다움을 잃어버리고 신자다움을 잃어버렸습니다. 뻔히 아시면서도 하나님은, 기독교의 어른들은 아무 계산 없이 기독교 경전 첫 머리에 그대로 기록하고 그 기록된 책을 그대로 출판했습니다. 그 까닭은 거룩함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손해 보더라도, 잘못되더라도 거룩함을 지켜야한다, ‘이것이 하나님이고 위대한 기독교 어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신 거룩함, 기독교 어른들이 지키신 그 거룩함 때문에 기독교는 그 숱한 위기에서 2000여 년 동안 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날이 가면 갈수록 온 세상으로 뻗쳐나갔고 온 세계의 가정 가정으로 뻗쳐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기독교 교회 기독교 신자의 힘은 거룩함에 있습니다. ‘다움에 있습니다. 기독교다움, 교회다움, 신자다움에 있습니다. 짧은 눈으로 보지 마시고 긴 눈으로 보십시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거룩함을 지킨 기독교 신자들, 교회들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역사하실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교회가 교회다울 때 교회는 권세가 있고 여러분이 진정 신자다울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권세를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