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시대
출애굽기 40: 34~38
그야말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시대입니다. 참으로 혼란스럽습니다. 나라도 혼란스럽고 시대도 혼란스럽습니다. 이런 시대에 기독교 신자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물어야할 질문이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여러분들이 TV나 책이나 여러 경로를 통해서 많은 답을 들으셨겠지만, 분명하고 확실하고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는 답, 그것은 성경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 출애굽기 40장은 그 물음에 대한 귀중한 답을 주십니다.
출애굽기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책 제목 그대로 ‘출애굽’, 이집트에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야곱의 후손들로 구성된 히브리인들이 노예로 살고 있던 이집트에서 벗어나서 홍해를 건넙니다. 그리고 시내산으로 갑니다. 요즘은 시나이 반도라고 하는 시내산까지 왔습니다. 이집트에서 나온 사람들은 야곱의 후손들 뿐만은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신으로 믿겠다고 작정한 이방민족들도 포함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가리켜서 이스라엘이라고 말합니다. 이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유일한 신으로 믿고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이것이 계약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지키고 순종해야할 법인 십계명과 율법을 주셨습니다. 세 번째는 이스라엘과 계약을 끝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열심히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성막을 지었습니다.
성막 건축을 끝낸 이스라엘은 가나안으로 출발합니다. 그때로부터 이스라엘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광야를 향해서 드디어 출발했습니다.
성경의 성막에 관한 기록을 보면 특별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 성경에 성막에 대한 분량이 아주 많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지면 할애에 상당히 인색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매우 두껍습니다. 신자들이 상당히 궁금해야할 것도 아주 적은 지면에 간단하게 기록하고 마십니다. 그러신 하나님께서 성막 기록에 대해서는 어마어마한 지면을 할애하십니다. 성막에 대한 기록 전부를 좀 폭넓게 다 합치면 성경 전체의 약 5%분량이 됩니다. 이 정도 되면 엄청납니다.
또 하나 느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막에 관해서 하시는 지시가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굵은 줄기만 말씀하시고 나머지는 담당자들에게 맡기면 될 것 같습니다. 전문가들이 알아서 하도록 하시면 될 텐데 좀 버릇없는 말로 한다면 미주알고주알 일일이 다 간섭하십니다.
예를 들면, 성막의 건축, 성막의 기구들, 성막에서 봉사하는 제사장, 제사장들이 입을 옷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구조나 설계뿐만 아니라 성막 건축 재료와 공사를 책임질 사람도 알아서 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하라고 하나님께서 지명하십니다. 기구 배열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심지어는 성막 건축을 다하고 난 뒤에 봉헌 날짜까지 지시해주십니다.
성막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 정도로 자세하게 하시는 것, 그리고 그렇게 많은 비중을 두시는 것을 볼 때 당장 드는 생각은 ‘성막은 기독교 신자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가 있구나.’ 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성막에 대해서 별로 알지도 못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많은 물량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그렇게 자세하게 말씀하실 정도 되면 무언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생각을 증명이라고 하시는 것처럼 성막 건축이 끝나자마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제 출발하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마치 ‘성막 준비가 끝났으면 모든 준비가 다 끝났다’ 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광야와 같은 세상길을 갈 때 성막은 이만큼 중요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코로나사태로 예배당에서 제대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지난주도 또 지난주도 오늘도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때 오늘 본문 말씀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예배당의 의미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먼저는 ‘성막은 어떤 곳인가?’ 이것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29장 45절에서 ‘내가 이스라엘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즉 내가 여러분들 중에 거할 곳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있을 곳이 바로 성막이라는 말씀입니다. 좀 편하게 말씀하면 성막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계실 곳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막이 그런 곳임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직접 눈으로 보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34절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곧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성막에 충만했다는 말씀입니다. 또 35절에서도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라고 같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성막에 충만했다고 말씀하십니다. 38절에서도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라고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성막에 항상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도록 해주셨습니다.
두 번째 ‘성막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 하나님께서 성막에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에 계시면서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출애굽기 29장 43절에서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성막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만나시는 곳입니다. 여러분들을 만나시는 곳이 성막입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을 뵙고 싶을 때 찾아가면 만날 수 있는 곳이 성막이고, 신자들이 궁금한 문제가 있을 때 찾아가서 하나님께서 물으면 하나님께서 대답해주는 곳이 성막이다, 신자들이 세상 살아가면서 낙심하고 절망하고 좌절하고 실망하는 일이 있을 때, 힘이 빠졌을 때 찾아가면 슬프고 속상하고 힘들어진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고 위로와 격려를 받는 곳이 성막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삶을 지도하시는 곳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출발할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성막 위에 구름이 떠오르게 하셨습니다. 가다가 쉴 때라든지 다른 일이 있어서 멈추어야 될 때가 있으면 성막위에 행하시던 구름을 멈추도록 하셨습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따라서 이스라엘은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순간 성막을 똑똑히 쳐다보았어야 했습니다. 아차 방심하다가는 성막 위에 떠오르는 구름을 보지 못하고 낙오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초등학교 다닐 때에 너무도 크게 놀란 적이 있습니다. 3학년이나 4학년 쯤 되었을 때인데 학생들은 자꾸 늘어나고 교실은 모자라서 오전, 오후반으로 나누어서 학교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 날은 저로서는 오후반이 처음이었습니다. 열시쯤 학교 운동장에 놀러갔습니다. 한참 잘 놀다가 교실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다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오후반인 것을 깜빡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식겁’ 했습니다. 집으로 뛰어가는데 숨도 안 쉬고 단숨에 뛰어가서 그야말로 숨이 차서 가슴이 터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너무 많이 놀랐기 때문입니다. 펑펑 울면서 어머니께 빨리 가방을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 웃으시면서 너는 오후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생긴 트라우마가 아직 저에게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잘못 알았는데 거기서도 트라우마가 생긴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정신 바짝 차리고 성막을 향해서 눈을 크게 뜨고 있어야했습니다.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대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진영에 머물렀고’(민9:17-18)
예고가 없기 때문에 내일 또 모레도 계속 구름이 가만히 있을지 떠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 내일, 모레 하루 한 번만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도 몇 번씩 계속해서 쳐다보아야했습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행진하지 아니하였으며 혹시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 그들이 다만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영에 머물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으며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으니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민9:19-23)
1년 동안의 일을 생각해보십시오. 1년 뒤 어느 날에 떠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그리고 매시간 성막을 쳐다보아야했습니다. 언제 떠날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 신자들은 압니다. 하나님은 예배당 안에만 계신 것은 아니고 어디에든지 계신다는 사실을 모든 신자들은 압니다.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열왕기상 8장 27절에서 솔로몬이 하나님께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라고 말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성전 뿐 아니라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것도 모든 신자들은 다 압니다. 이 사실은 우리 신자들뿐만 아니라 하나님 당신도 아시며 또한 그 말씀도 하셨습니다.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 예수님께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이든지 나도 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당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하신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성막에 있겠다. 여러분들이 성막에 오면 내가 거기서 여러분들을 만나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분명하게 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이 그것을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다니엘이 페르시아 총리로 있을 때 다른 고관들이 다니엘을 시기해서 제거하려고 공작을 꾸몄습니다. 페르시아 왕 이외의 다른 신에게 기도하면 사자굴에 처형한다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 법이 새로 생긴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파괴되어서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을 파괴되어서 없어진 예루살렘 성전 터를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다니엘 6장 10절의 기록입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저 멀리 있는 성전, 900Km, 1,000Km 멀리 있는, 그것도 빈터만 있는 성전을 향해서 다니엘은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 때문에 자기에게 어떤 일이 생길 가능성을 충분히 알면서도 다니엘은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 다니엘을 하나님께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직접 구하신 것은 물론이고 시대의 최고의 사람이 되도록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단6:28) 라는 기록입니다.
우리가 흔히 관념적으로 말하는 한 번도 가지 않은, 경험하지 않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정말로 생각할 수도 없었고 상상할 수도 없었던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시대에 기독교 신자들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바로 그 길밖에 없습니다. 다니엘이 걸어갔던 길,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에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항상 성막을 바라보면서 성막이 인도하는 대로 살아가는 길 그 길밖에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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