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이 이루어지이다!
민수기 33:50~56
어느 해변에 한 노인이 매일 같은 시간 어김없이 싱싱한 새우가 가득 담긴 통을 들고 나타납니다. 그 신선한 새우는 갈매기들에게 나누어주는 먹이였습니다. 그 시간이면 갈매기들도 노인의 발 앞에 모여들었습니다. 어떤 갈매기들은 노인의 어깨 위에, 어떤 갈매기들은 팔위에 앉기도 했습니다. 갈매기들에게 새우를 나누어주는 동안 노인의 얼굴은 환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갈매기들은 노인이 나누어주는 고급 요리를 마음껏 즐겼습니다. 매일 일어나는 이 광경에 사람들의 반응은 나뉘었습니다. 흥미와 궁금함을 가지고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고, 비싼 새우를 쓸데없이 낭비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노인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해군 장군이었습니다. 어느 날 전투를 하던 중에 장군의 배가 적군의 어뢰에 격침됩니다. 부하 몇 명과 함께 가까스로 구명정에 올라탈 수 있었습니다. 구명정에 탄 장군과 몇 명의 병사들은 뜨거운 태양과 거센 파도와 싸우면서 버텼지만 잠시 뿐이었고, 점점 더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비상식량까지 바닥이 났습니다. 함께 탔던 부하들이 한사람 한 사람씩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장군도 기력이 점점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장군의 정신이 희미해져서 쓰러지고 맙니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는 그때에 쓰러져있던 장군 눈에 작고 흰 물체 하나가 보였습니다. 갈매기였습니다. 갈매기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장군은 조심조심 갈매기를 잡았습니다. 장군의 표현에 의하면 갈매기는 잡혀주었답니다. 그 갈매기는 장군에게 생기를 공급했고, 장군의 생명은 그 갈매기 때문에 몇 시간 더 연장되었습니다. 생명이 연장된 그 몇 시간동안에 장군은 구조되었습니다. 그 노인의 이런 사연이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기 시작합니다. 그 사연을 알게 된 사람들은 누구도 노인이 갈매기들에게 비싼 새우 주는 것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후 40년간 광야 생활하다가 드디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가나안으로 출발합니다.
가나안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너희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거기 살고 있는 가나안 사람들을 다 몰아내라, 쫓아내라는 특별한 명령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만약 여러분들이 내 말에 순종하지 않고 가나안사람들을 다 쫓아내지 아니하면 가나안 사람들이 나에게 당할 심판을 여러분들이 대신 받을 것이라는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가나안 사람들을 그 땅에서 다 몰아내라는 하나님의 그 명령에 대하여 제기될 수 있는 항의가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민족들을 그렇게 쫓아낼 수 있는가?’ 라는 항의입니다. 인도주의자들은 더 그럴 수 있습니다. 특히나 당하는 당사자들은 더 강력하게 항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신자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함부로 불평하거나 원망하거나 누구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꼭 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그 질문은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렇게 하시는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입니다. 신자들은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생각할 줄 알아야합니다. 당사자도 그렇고 제 3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런 명령을 하셨는지는 성경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당시 가나안에 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 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창15:13)
너는 지금 가나안에 살지만 가나안을 떠나게 될 것이다. 떠나서 최소 400년을 이방 땅에서 고생하면서 살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라’(창15:1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말씀을 하실 때, 가나안은 오염되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더 오염이 심해집니다. 가나안에 그대로 계속 두었다가는 얼마 있지 않아서 아브라함의 집안도 썩어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될 아브라함의 집안이 썩게 되는 것은 하나님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보존해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무언가 조치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점점 더 썩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말씀을 하실 당시 가나안이 위험할 정도로 오염되고 있다면, 아예 그때 미리 가나안 족속을 멸망시켜버리면 될 텐데 왜 그러게 하시는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지만 이는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아직 멸망시키기에는 죄가 다 차지 않은 사람들을 멸망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필경은 죄가 가득차서 멸망시킬 수밖에 없을 가능성이 충분했지만 그러나 아직까지도 죄가 가득차지 아니한 가나안 사람들을 공의의 하나님으로서는 멸망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몇 백 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가나안의 죄악이 멸망시켜야만 할 정도로 가득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가나안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 이스라엘 민족이 살도록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상당히 이스라엘을 배려하시고 특혜를 베푸시는 것 같았지만, 그러나 그 말씀에는 상당히 무서운 경고가 포함되어있습니다. 누구에 대한 경고입니까?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의 죄가 가득 찼기 때문에 내가 멸망시키고 쫓아내고 몰아내지만 만약에 여러분들도 저 가나안 사람들처럼 죄악이 가득 차게 되면 여러분이라고 봐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가나안에서 쫓겨나가 멸망당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그 경고는 그러나 과거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인 기독교 신자들에게도 기독교 교회에도 그대로 해당되는 경고입니다. 그 귀한 십자가의 피로 값 주고 산 너희 신자들도 그리스도 몸인 교회도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간에 죄를 지으면, 그 죄가 차게 되면 공의로 심판할 수밖에 없다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가나안 족속을 멀쩡하게 살고 있는 가나안 땅에서 쫓아내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아무 까닭 없이 다만 이스라엘만 사랑해서 하신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가득 찬 가나안의 죄’라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항상 이유가 있습니다.
구둣방 주인 시몬이 추운 겨울 길거리에서 떨고 있던 벌거숭이 남자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서 그 남자에게 입히고 그 남자를 집으로 데리고 옵니다. 그 남자는 사람이 아니라 천사 미카엘이었습니다. 시몬의 집에 살면서 미카엘은 구두 일을 배웁니다. 얼마 있지 않아서 시몬보다 구두 일을 더 잘하게 됩니다.
어느 날 한 부자가 시몬의 구둣방에 와서 값비싼 가죽을 주면서 그것으로 오래 신을 수 있는 튼튼한 가죽 장화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는데 그 부탁이 상당히 엄합니다. 잘못 만들었다가는 감옥에 갈 각오하라는 그 대단한 기세의 부자 뒤를 보면서 천사 미카엘은 빙그레 웃습니다.
시몬에게서 그 일을 받은 미카엘은 어처구니없게도 그 비싼 가죽으로 부자가 주문한 가죽 장화 대신 죽은 시체에게 신기는 슬리퍼를 만들어버립니다. 그것을 본 시몬이 절망에 빠집니다. 나는 이제 죽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때 그 부자의 하인이 황급하게 구둣방으로 쫒아왔습니다. ‘가죽 장화를 만들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구두주인이 죽었습니다. 가죽 장화대신 장례 때 시신에게 신길 슬리퍼를 만들어 주십시오.’
천사 미카엘이 기세등등한 부자를 보고 미소를 지은 것, 가죽 장화 대신 시체에게 신기는 신을 만드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부자의 뒤에 죽음의 천사가 서 있는 것을 미카엘은 보았고, 따라서 부자에게 필요한 것은 질기고 튼튼한 가죽 장화가 아니라 죽은 뒤에 신길 슬리퍼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주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시고는 합니다. 경제적인 일, 건강의 일, 때로는 자녀들의 일, 정말 억울한 일, 도무지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될 만한 일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기도 하고 직접 만들기도 하십니다. 우리로서는 너무 힘들고 너무 고통스럽고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가 되지 않은 일을 종종 하십니다. 그런 일이 있을 때 신자들은 알아야합니다,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신자들이 그것과 함께 알아야할 것은 거기에는 지극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자들에게는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선으로 귀결된다는 사실도 알아야합니다.
신자들에게도 힘든 일이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지만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의 사람, 신자들에게는 그것이 고통으로만 끝나도록 하나님은 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혹시라도 여러분에게 그런 일이 있을 때, 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 정말로 하기 싫은 일을 시키실 때는 그렇다고 하더라고 그냥 받아들이십시오. 그냥 순종하십시오. 한 걸음 더 나가서 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들에게 있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뜻으로, 여러분을 위하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도록 애를 써보십시오. 이것이 비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질 수 없는 비밀입니다. 그리고 비결입니다. 행복의 비결이고 건강의 비결입니다. 그렇게 하면 건강해지고 행복해집니다.
약 10여 년 전인 것 같습니다. 제가 북한 선교 문제로 중국 단동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단동은 신의주 바로 맞은편입니다. 압록강 강변을 산책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모여 운동하고 있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중국은 조그마한 공간만 있으면 거기서 운동하고 체조도 합니다. 태극권도 하고 칼 춤추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중의 한 곳은 다른 데 비해서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모여서 아주 열심히 합니다. 보니까 괜찮아서 제가 그 옆에서 한참 동안 따라했습니다. 따라하면서 퍼뜩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나의 건강을 위해서 저 체조를 접하게 하셨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몸이 시원찮고 늘 힘들 때였습니다. 그래서 동영상으로 찍어서 계속 그것을 보고 체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 다음날 그 시간이 되어서 그 자리에 갔습니다. 시간이 되니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정말로 구름같이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미리 사범인 듯한 사람에게 가서 영상을 찍어도 괜찮겠냐고 부탁했더니 좋다고 하여 찍었습니다.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제가 사진을 찍는 광경을 본 운동하던 사람들 중 중국사람 한 사람이 저에게 와서 자기에게 이전에 체조를 찍어 영상으로 만든 시디가 있으니 내일 오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그 말을 듣자마자 ‘맞다. 이 체조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한 번에 40분 정도 일주일에 서 너번 하고 있는데 몸에 참 좋습니다. 큰 덕을 보고 있습니다.
시편 139편 1절부터 10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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