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근본을 바꿔야 (열왕기하 2:19-22)

분당소망교회 2021. 5. 14. 10:38

근본을 바꿔야

 

 

 

열왕기하 2: 19~22 

 

 

 

여자 성도 한 분이 절박한 모습으로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하나뿐인 아들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서 일을 하겠다고 하니 제발 말려달라고 목사님께 부탁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인이 이런 부탁을 드리는 데는 까닭이 있었습니다. 그 집에 이런 내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어린 세 아들을 남겨두고 바다에서 일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이들이 살아가는 동안 어머니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신신당부 부탁을 했습니다. ‘너희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바다에 나가서는 안 된다.’ 아이들이 약속도 했습니다. ‘절대로 우리는 바다에 나가지 않겠습니다.’

어머니의 그 당부 그리고 아이들의 철석같은 약속에서 불구하고 큰 아들이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바다로 일을 나갔다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슬픔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스스로 굳게 맹세하고 다짐을 했습니다. 남은 두 아들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겠다는 맹세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둘째 아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타관으로 나가겠다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그 둘째 아들에게 축복을 한 후, 확인하고 다짐을 합니다. ‘다 좋지만 바다에만은 절대로 나가면 안 된다.’ 둘째 아들이 맹세하듯이 말합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나 어느 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소식이 그 어머니에게 날아듭니다. ‘아드님이 바다에서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어머니의 슬픔은 요셉을 잃은 야곱보다 더 했습니다. 마치 지옥에 사는 것과 같았습니다. 어떤 위로도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정신을 차린 어머니가 즉각 결단을 내립니다. 평생 살던 집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하나 남은 막내아들을 데리고 바다로부터 저 먼 내륙지방으로 집을 옮겼습니다. 거기서 사는 동안 어머니는 바다라는 말은 입에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막내아들도 어머니의 슬픔과 아픔을 아는지라 바다 이야기는 일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장성하여 어머니에게 청천벽력 같은 말을 합니다. ‘바다로 나가고 싶습니다.’

이 모든 내력을 자세히 들은 목사님이 며칠 후에 그 여자 성도의 집을 찾아갑니다. 식탁에 앉은 목사님이 식탁 맞은 편 벽에 걸린 액자를 보게 됩니다. 액자는 거세게 출렁이는 검푸른 바다 풍랑위에 돛을 활짝 펴고 항해하는 멋진 배의 그림이었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성도님 저 액자의 그림은 언제부터 걸려있었습니까?’ 부인이 대답합니다. ‘돌아가신 남편이 사랑하던 그림이라 남편이 있을 때부터 계속 걸었고, 그 이후에 버리고 싶었지만 남편을 기념하는 물건이라 버리지 못하고 저렇게 계속 걸어두었습니다.’ 그 대답을 들은 목사님은 당장 떼서 버리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매일 식탁에 앉아서 저 그림을 보았고, 그 배를 타고 항해하는 멋진 모습이 아이들 가슴에 각인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가 여리고에 있을 때 여리고 마을 주민들이 찾아와서 하소연을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마을의 물이 나빠서 곡식과 과일이 다 자라지도 않아 땅에 떨어져 버립니다.’

엘리사가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오라 하고, 그 소금을 여리고 모든 물의 근원되는 곳에 던지면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물을 고쳤다. 앞으로는 농사가 잘못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과연 그 후로 여리고에서 농사가 잘못되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무너져가고 있는 한국 사회, 한국 교회 그리고 가정들에 대해서 귀한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하십니다. 근원을 고쳐야한다. 나라의 근원도 고쳐야하고 교회의 근원도 고쳐야하고 가정의 근원도 고쳐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지 농사가 제대로 되고 제대로 과실이 열매가 맺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 정치인들에게 국민이 없습니다. 옛날 왕들도 백성들을, 국민들을 나라의 주인으로 어른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 현재 이 나라의 정치인들에게는 정권만 있고 표만 있습니다. 국가의 마지막 보루라고 불리는 사법부 판사들에게 법이 없습니다. 판사들 눈에는 좋은 자리만 보입니다. 올라가고 싶은 자리만 보입니다. 정치인들의 못난 부분을 매우겠다고 나선 시민단체는 하도 정치에 곁눈질 하다 보니 사팔뜨기로 가득 찼습니다. 시민단체에 사팔뜨기 아닌 사람들은 몇 명만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국민들은 그것보다 나을까 하고 보지만 그렇지도 못합니다. 국민들도 그것보다 낫지 못합니다. 이러 저리 끌려가도 왜 끌려 다니는지도 모르고 그냥 끌려갑니다. 심지어는 정치인들에게 그냥 끌려 다니는 것만 아니라, 정치인들의 홍위병 노릇을 자처하는 정치꾼들의 노리개로 전락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 기독교 가정도 그보다 더 낫지를 못합니다.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예수님께서 신신당부하셨지만 교회가, 기독교인들이 빛을 비추지 못합니다. 비출 빛이 있어야지 비추는데 가진 빛이 없습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욕심을 부리다가 교회도 신자들도 소금의 맛 그리고 빛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두다 근원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너무 잘못 되어서 조금 고치고 수리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근원을 고쳐야합니다. 나라의 근원, 교회의 근원, 사회의 근원, 가정의 근원, 인생의 근본을 고쳐야합니다. 근본이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근원이 병들면 다른 모든 것이 잘못되고 병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 33절에서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매가 잘못되고 결과들이 몹쓸 결과가 된 까닭은 근원이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의 모든 농사가 잘못 되었던 것은 여리고의 모든 물의 근원이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사는 이 물 고치고 저 물 고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물도 고치고 개울도 고치고 강을 고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사가 고친 것은 단 한 곳, 여리고 물 근원이었습니다. 새 그릇에 담은 소금을 여리고 물에 던져 넣자 여리고의 모든 물이 다 살아있는 물이 되었고, 살리는 물이 되었습니다.

나라, 교회, 가정의 문제가 아무리 많아도 근원만 고치면 됩니다. 근원만 건강하면 모든 것이 다 건강해지고, 근원이 복이 있으면 모든 사람들이 다 복이 있습니다. 근원이 건강해야하고 근원이 복이 있어야합니다. 나라가 문제가 있을 때, 이 사회에 문제가 있을 때, 가정 그리고 개인에게 문제가 있을 때 근원만 고치면 나라에 이런 문제 저런 문제 다 고쳐집니다. 한꺼번에 싹 고쳐지는 것은 아니지만 순차적으로 하나씩 다 고쳐집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이고 개인도 그렇습니다.

 

거기에 대한 확실한 예가 성경에 있습니다. 사무엘상 첫 머리에 두 가정이 등장합니다. 한 가정은 당시 최고의 자리에 있던 엘리의 가정, 또 하나는 당시 별 볼일 없던 평범한 엘가나의 가정입니다.

엘리의 가정은 처음에는 대단했습니다.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최고의 대접을 받았고 제일 좋은 자리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근원이 썩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에 따라서 온 집안이 썩어갔습니다. 결국은 그 집안의 모든 것, 모든 사람들이 완전하게 썩어서 망하고 말았습니다. 가문도 망했고 자식들도 망했습니다. 그 대단하던 집안에서 빌어먹는 자식이 생길 정도가 된 것이 엘리의 가정, 엘리의 집안이었습니다

반면에 별것 아니던 엘가나의 가정, 그러나 근원이 바로 서있으니 콩가루같이 시끄럽고 소란스럽고 집 같지도 않던 집안이 조금씩 조금씩 바루어져 갑니다. 어느덧 최고의 가정이 되고 최고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근원이 문제이고 근원이 답입니다

 

한 젊은이가 교회에서 정말 훌륭한 교인 한 분을 보게 됩니다. 여자 성도님이었습니다. 그 부인은 교회에서 그 많은 일을 하면서 한 마디 불평이 없었고, 한 번도 찌푸린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항상 얼굴에 웃음이 있었습니다. 그 부인은 키가 아주 작았지만, 주변의 사람들 누구에게도 작은 사람으로 비쳐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작은데도 불구하고 그 부인을 아는 사람들 중 아무도 그 부인이 그렇게 작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주 큰 사람으로 비춰졌다고 합니다. 얼굴에는 항상 미소가 있었고, 그 미소는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미소가 아니라 저절로 솟아나오는 미소였다고 사람들이 공히 말했습니다. 교인들은 교회에서 그 부인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습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에도 복입니다.

부인은 집안에서도 정말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대가족의 맏며느리였습니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시할머니도 계셨다고 합니다. 두 명의 시동생이 있었고 한 명의 시누이가 있었습니다. 그 큰 대가족을 정말로 잘 섬겼습니다.

이 젊은이가 그 부인의 내력이 너무 궁금했습니다. 알아보았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도 보았고 그 부인을 직접 만나보기도 했습니다. 알아본 결과, 그 부인의 아버님은 종갓집 장남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집안의 수많은 행사가 그 집에서 치러졌습니다. 그 많은 식구들을 돌보고, 그 많은 일들을 하고, 그 많은 뒤치다꺼리를 감당한 사람은 그 부인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런데 부인의 어머니는 그 많은 일들을 늘 웃으면서 감당을 했다고 합니다. 부인의 어머니가 그렇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주님의 이 가르침이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25:40)

이 말씀을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을 것입니다. 다들 수도 없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인의 어머니가 그 말씀을 대하는 순간 이것은 내 삶의 기둥이다, 나는 이렇게 살아야한다고 생각하고 그 말씀을 기둥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그때로부터 그 부인의 어머니는 늘 다른 사람들 위해서 사는 사람 같이 살았습니다. 그 부인은 자기 어머니에게서 한 번도 싫어하는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늘 밝고 즐거운 어머니의 얼굴을 보면서 이 부인은 자라났습니다. 그러면서 이 부인은 어려서부터 마음에 저절로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나도 엄마와 같이 되어야겠다.’ 이 부인의 그 아름다움에는 이런 근원이 있었습니다. 이 부인에게는 어머니라는 근원이 있었고 부인의 어머니에게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라는 근원이 있었습니다.

 

근원을 고치십시오. 근원을 바꾸십시오. 나라의 근원, 우리가 일어서서 고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은 할 수가 있습니다. 언젠가 ‘Touch the world through the prayer’ 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세계를 주물러라. 기도를 통해서 세계를 바꾸라.’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고치십시오. 근원을 고치십시오. 여러분이 바꾸십시오. 여러분 자신도 바꾸고 자신도 고치고 나라와 사회 그리고 교회의 근원도 여러분들이 고치십시오. , 대강 말만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고치고 철저하게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근원을 바꾸십시오. 예수님으로 근본을 바꾸십시오. 철저하게 삶을 그렇게 바꾸십시오. 기도도 그렇게 바꾸십시오.

그렇게만 하면 얼마 있지 않아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이 건강하고 복이 가득한 가정이 되고 따라서 여러분의 자녀들과 또 그들의 자녀들 나아가서는 사회도 나라도 건강하고 복 있는 나라가 되고 사회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일어서십시오. 조용하게 일어서십시오. 여러분들이 이 나라에 이 사회에 예수님을 던져 넣으십시오. 철저하게 하십시오. 대강하는 것 아닙니다. 말로만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면 여러분이 먼저 그렇게 되어야합니다. 여러분의 삶속에 여러분의 가정 속에 아주 철저하게 예수님으로, 하나님으로 채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