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감사해야 할 이유 (신명기 16:13-17)

분당소망교회 2021. 5. 29. 07:12

 

감사해야 할 이유

 

 

 

신명기 16:13~17

 

 

언젠가 한동안 벤처기업이 나라의 희망이고 젊은이들의 꿈을 이루어주는 것으로 생각하여 여기저기서 붐을 이루었습니다. 청운의 꿈을 가진 수많은 젊은이들이 화려한 나래를 펼 자리로 여기면서 벤처기업을 설립했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 무렵, 이 벤처기업들이 추풍낙엽처럼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런 현실을 자연환경과 식물, 꽃 열매로 아주 절묘하게 비유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번 들어보십시오.

함초롬히 핀 난초의 꽃망울은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꽃을 피운 난초는 죽음을 예감하는 것이기 때문에 슬프다. 꽃은 종족 보존을 위한 애처로운 몸짓이다. 난초는 이제 스스로 썩어 거름이 될 준비를 위해서 꽃망울을 피울 때, 사람들은 감탄을 하지만 정작 난초는 탄식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잘 영근 사과는 풍요로움의 상징이지만, 실제 그 열매는 배고픔의 결실이다. 사과나무가 배고프기 때문에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다. 비료와 물주기를 중단하면 사과나무는 척박한 땅에서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더 탐스러운 열매를 맺지만, 반대로 무성한 잎사귀의 뒤편에는 나태함이 숨는다.

시냇가의 잡초와 갈대는 무성하지만 아름답지 않다. 비가 오지 않아도 늘 풍족하기에 꽃을 피우고 꿀을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꽃을 구하려면 난초의 일조량을 줄이고 온도를 낮추어야 하며, 탐스러운 과실을 구하려면 나무의 비료와 물줄기를 그쳐야한다. 비료를 주면 잎이 무성해져서 겉으로는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열매를 적게 맺고 그나마 부실해지기 때문이다. 아주 절묘하게 말했습니다. 이 비유는 벤처기업으로 이어집니다.

최근 무수한 벤처기업들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까닭은 손쉽게 돈을 빌릴 수 있는 벤처 육성 자금 혜택 때문이다. 시냇가에 나태한 나무들이 꿀을 만들 필요가 없는 것처럼 풍성한 혜택만을 받은 벤처기업들은 생존을 위한 치열한 몸부림을 치지 않는다. 싼 이자 돈 빌려 비싼 이자놀이를 하는 머니 게임을 즐겼기 때문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감사의 꽃을 피우는 일이 참으로 그와 똑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안하고 풍요로울 때는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반대로 객관적으로 아무리 보아도 정말로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있는 분들이라고 생각되는 분들이 더 아름다운 감사의 꽃을 피웁니다.

어떤 연유이겠습니까? 혹 평안하고 풍요로울 때, 풍요와 평안이 나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기 때문에 꽃도 맺히지 않고 열매도 맺히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반대로 힘들고 어려울 때는 나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것들이 다 제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제대로 소통을 합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정확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정말로 여러분들에게 감사할 일과 행복을 주시고 싶다면 어떤 것을 선택하실 것 같습니까? 여러분들을 아직은 어리게 생각하고 너무 이쁘게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시기도 하겠지만, 정말 큰 감사를 받을 수 있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세상이 말하는 큰 복을 받을 사람들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이스라엘의 연중 강우량은 100ml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하루 밤에 비가 많이 오는 것이 100ml 정도가 된다고 하니 정말로 척박한 땅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농사를 빗물로 짓지 않습니다. 이슬로 짓습니다. 수확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땅들은 척박하고 바람이 불기만 하면 미세한 모래들이 날아와서 눈을 뜨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 속에서도 추수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넘치는 감사를 드립니다. 넘치게 감사합니다. 흘러나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많은 추수를 한 것도, 좋은 환경을 가진 것도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그렇게 감사하고 감격할 수 있었던가 그 이유를 생각합니다.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신 것 때문에, 받은 것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했습니다. 이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런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고 별 것 아닌 것을 손에 쥐었다 하더라고 하나님 앞에 서있기만 하면 감사하고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고 그리고 행복했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받고 손에 쥐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이 아닌 세상 앞에 서면 감사가 없습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고마운 줄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더 받을까 생각만 들지 감사하고 좋고 행복한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참된 지혜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1620년 청교도들 약 100명이 영국 국교회의 박해를 피해서 메이플라워를 타고 미국으로 갔습니다. 미국 동부에 이민 마을을 건설합니다. 인디언들과 사이가 좋았습니다. 욕심이 없을 때였습니다.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 땅의 상황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듬해 가을, 수확한 청교도들은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참으로 감격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신대륙까지 오는 동안 극심한 기아를 겪었습니다. 온갖 질병을 견디고 신대륙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꿈에 그리며 도착한 신대륙 땅은 온갖 풍토병, 자기네들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전염병, 가난, 굶주림 그리고 이민족과의 갈등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생 고생 끝에 원주민인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서 첫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그때 수확이라고 해봐야 너무도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감사와 감격이 넘쳤습니다. 거둔 첫 열매가 워낙 없었기 때문에 원주민들이 나눠준 곡식을 받아서 거기에 더해서 예물을 올렸습니다. 그것을 앞에 두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미국 추수감사절의 유래입니다. 11월 셋째 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감사는 받았든 못 받았든 그냥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이것이 진짜 감사이고 만약에 받아야 또는 받았기 때문에, 받은 것 때문에 감사를 드린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거래입니다. 주셨으니까 내가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아무 받은 것이 없어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 제가 확신을 가지고 수많은 경험을 가지고 자신있게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 한없이 기뻐하시고 행복해하시고 여러분들을 환경적으로 감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더해주십니다. 믿으셔도 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직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을 때였습니다. 광야에 있으면서 막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려고 할 무렵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농사를 지을 텐데, 그때 농사를 지으면 철철이 추수가 끝나는 대로 하나님께 감사해라, 보리가 나오면 보리, 밀이 나오면 밀, 나오는 대로 그때마다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감사예배를 드리고 여러분들이 즐거워하고 흥겨워하고 춤도 추는데 다음의 몇 가지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는, 여러분들만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불쌍한 사람들과 함께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되, 가족들끼리, 내가 아는 사람들끼리, 친한 사람들끼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들, 외국인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미국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과 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이웃도 함께 하긴 하지만 사업할 때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 정치할 때 도움이 되는 사람들을 불러서 함께 파티를 하는 경향이 많은데 본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과는 다른 때하고, 추수감사 때, 좋은 날일 때에는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명절이 되어도 즐거울 일이 없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설이나 추석 때 즐거워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누구하나 거들떠보지 않는 불쌍한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곧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남으로 생각하지 말고, 불쌍해서 조금 도와주는 것 말고 가족처럼 그들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여러분들이 유의하실 것은 나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과 함께 하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정해준 장소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사하되 내가 하고 싶은 곳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 여호와 앞에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디든지 하나님이 계십니다. 어디서든지 간에 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있고 그곳이 하나님 앞입니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장소, 하나님 앞이라는 곳의 가장 정확한 곳은 하나님께서 여기서 만나자고 정해주신 성소 즉 교회입니다.

지금도 전 세계의 유대인들은 명절 때에 성전이 있는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성지순례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성지순례는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휘둘려 관광 가는 것이지 성지순례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명절인데 우리끼리 즐기는 명절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절이므로 하나님께 가서 즐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감사입니다. 오늘 코로나로 일부만 모일 수 있었지만 그것이라도 하나님께서 여기 와서 예배드리라고 열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The Passover to the lord' 즉 하나님의 유월절, 즉 하나님께 드리는 명절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과 함께 요즘 어린이들의 생일을 생각합니다. 이상하게 어린이들의 생일이 마치 아이들이 로또 당첨되는 날 같습니다. 오로지 그 아이를 위한 날이 아이 생일 같습니다. 아닙니다. 제대로 가르쳐야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기독교인들은, 이 날은 이런 날이라고 제대로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네가 좋은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하여 엄마나 어떻게 애를 쓰고 아빠가 어떻게 했으며 엄마 아빠가 어떻게 길렀는지를 알게 하여야합니다. 그래서 너 혼자 즐기는 것이 아니라 네가 부모님께 감사하는 날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어야합니다. 사실 아이들의 생일은 부모님의 날입니다. 그렇게 해야 아이들이 제대로 큽니다. 혹자는 그렇게 하면 우리 아이가 다른 애들보다 버림받은 마음을 가질지 염려하는데,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대로 가르치면 제대로 크게 됩니다.

 

세 번째, ‘나에게 오는 데 빈손으로 오지 말고 예물을 들고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빈손으로 오지 말고 예물을 들고 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신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입으로만 하는 감사도 귀합니다. 그나마 입으로 하는 감사도 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입으로만 하는 감사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마음 없이도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에 있어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만 감사하고 그치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6:2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물, 물질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나의 이 마음이 그만큼 진정한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돈이 없어서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의 헌금이 교회에 들어오면 여러 가지로 좋겠지만 꼭 이것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십일조의 중요한 이유에 이것이 포함됩니다. 여러분들이 십일조를 내시면 그것으로 교회를 운영하고 구제도 하고 선교도합니다. 그러나 십일조의 가장 큰 의미는 하나님, 나의 수입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모은 모든 재산은 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정하는데 말로만 하면 진짜가 아닐 수가 있기 때문에 물질을 일부라도 내 놓으면서 하나님, 정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홉 개를 내가 가지고 하나만 내면 된다고 말씀하셔서 101만 내 놓습니다.’ 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유의할 것은 감사할 때 없는 사람들은 흉내만 내더라도 빠지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경에도 나옵니다. ‘양 한 마리 잡든지 그것이 없는 사람들은 비둘기 두 마리를 하라.’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비둘기 두 마리도 못하는 사람은 가루 조금만 해도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정도는 다 바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없는 사람들이 조심할 것은 힘에 넘치게 하면 안 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시는 분들도 집안 일 제치고 교회 봉사만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환영되지 않습니다. 교회가 환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힘을 헤아려’/10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한편 다른 사람들보다 좀 많이 받은 사람은 더 많이 받은 만큼 더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없는 사람들은 모양만 살짝 내도 좋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저 사람보다 많이 냈다..’ 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만큼 감사하며 내는 것이 헌금입니다.

마가복음 12장에 예수님께서 아주 짓궂으신 모습을 보여주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12;41) 라는 아주 짓궂은 장면입니다. 누가 얼마나 하는지 예수님께서 보고 계셨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 것을 보시고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12:43)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정말로 많이 넣나 안 넣나 보시기 위해서가 아니고, 예수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에 많이 넣으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그 마음을 보신다는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보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다 말씀하신 후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20